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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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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가서 '아이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는 '예, 가겠습니다' 대답하고는 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했다. 그는 '싫습니다. 가지 않겠습니다' 하고 대답하고는 그후에 뉘우치고 갔다. 그러니 이 둘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 아들이냐?" 하고 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대답했습니다. "둘째 아들입니다." 이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오히려 너희보다앞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 요한이 와서 너희에게 의의 길을 보여주었을 때에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으나 세리와 창녀들은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끝내 마음을 고치지 않고 믿지 않았다"(마태 21, 28-32).

포도원을 가진 한 농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들들에게 포도원에 나가서 일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맏아들은 이 지시를 듣자마자 싫은 표정이나 주저함이 없이 "예,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맏아들과는 정반대로 "싫습니다. 가지 않겠습니다"라는 차디찬 한마디로 아버지의 뜻을 거부하고 나가버렸습니다. 맏아들에 비해서 이 아들은 이미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했음에 틀림없습니다. 모름지기 아버지는 순간적으로나마 이 두 아들들이 자라온 과정까지 회상하며 '저 둘은 날 때부터 달랐다'라는 엉뚱한 판정을 내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판단은 전혀 맞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실망시킨 둘째 아들은 발길을 돌리면서 갑자기 후회했습니다. 당돌하게 아버지의 뜻을 거부한 그가 어떻게 그토록 급전했는 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후회했다'라는 데서 미루어보아 그가 아버지의 뜻을 거부할 때에 말로 표현된 것 이상의, 즉 아들로서는 전혀 용납되지 않을 만큼 과격한 행동으로 아버지를 모욕했을 가능성을 상상하게 합니다. 그랬을수록 그는 '주체적으로' 아버지의 뜻을 받고 그것을 거부했다는 말이 됩니다. 반면에 '예'라고 쉽게 대답한 맏아들의 경우는 그와 정반대입니다.

우선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맏아들에 대해서는 단지 대답과는 달리 실제로 포도원으로 가지 않았다는 것 외에는 다른 언급이 없습니다. 그의 행동은 둘째 아들의 경우보다 결과적으로 아버지를 실망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분노를 일으키는 행동을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아버지를 기만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말을 들을 때부터 진지하게 상대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늘하는 지시이니 오늘도 그런 정도로 가볍게 넘겨버렸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지시 자체만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고 모욕하는 행태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둘째 아들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이유를 뚜렷이 밝힌 것처럼 맏아들의 행동에 대해서도 무엇인가 그 이유가 표현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습니다. 한 아들은 처음에는 거부했다가 다음에는 순종했으며 다른 아들은 처음에는 순종했다가 다음에는 거부했다는 식으로 이 두 아들의 행동을 평면적으로 이해한다면, 이 이야기의 본뜻에 걸맞지 않습니다.

예수는 이렇게 단순한 이야기를 하고는 이 내용에 대한 판단을 제자들이 하도록 질문합니다.

"그러니 이 둘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 아들이냐?" 대답은 이마 정해진 질문입니다. 벌써 이 질문 안에 대답이 결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자명한 대답을 제자들의 입을 통해서 확인시킬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바른 판단을 하여 분명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도록 유도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비유를 하는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단순히 두 아들 중에 어느 아들이 아버지에게 더 효자인지를 비교하게 하려는 것일까요? 그럼으로 둘째 아들의 행동을 효도의 본보기로 삼으라고 말하려는 것일까요? 그렇게 보기에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목적이라면 두 아들 중 어느 하나도 효자로서의 본보기는 될 수 없습니다. 맏아들은 처음부터 아버지의 말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말을 따를 생각도 없이 그 자리를 피했으므로 옳지 않은 아들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둘째 아들도 처음에는 이유야 어쨌든 일단 아버지의 뜻을 거부했으니 비록 후회하고 그의 뜻을 지켰다고 해도 모범적인 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전형적인 효자라면 말과 행동이 일치하여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이런 이야기를 통해 듣는 사람들도 이미 알고 있는 어떤 다른 현실을 비유로써 비판할 목적을 가졌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질문에 대한 제자들의 자명한 대답 다음엔 비유가 아닌 현장으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런데 그 현장은 너무도 충격적인 것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오히려 너희보다 앞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마태 21, 31)

이것은 예수의 말로는 아주 원색적이고 과격한 것입니다. 세리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하였으므로 더 이상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예수의 말 속에는 '세리와 죄인'을 한데 싸잡아 말하는 경우가 몇 차례 나오는데 여기서는 '세리와 창기'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민중 가운데 창기들이 참여했음은 틀림없습니다. 말없이 들어와 예수의 머리에 기름을 부은 여인에 대해서 루가는 그가 '창기'일 것이라는 상상을 할 수 있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언어 대신 단순히 '죄인'이라는 말로 바꿉니다. 그렇게 자상한 예수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중의 삶을 제 것으로 삼던 그가 민중 중의 민중인 창기에 대해서 무심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창기는 인간으로서 가장 인간됨을 부정당하고 유린당하는 표본입니다.

이 '창기'는 적어도 크게 두 가지 사실을 세상에 폭로하고 또 절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짐승 이하로 전락한 파렴치한 남자들의 죄악상을 비추는 거울로서 그들을 고발하는 존재이며, 다른 한편으로는가장 잔인하게 착취당하고 이용당하면서도 이미 인간임을 부정당하는 고난의 존재로서 두고두고 썩은 세상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저들은 남성 위주 사회에 바쳐진 제물입니다. 특히 남성에게 바쳐진 제물입니다. 노동이나 시간만 바치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를 바치는 것입니다. 그 앞에 그녀는 이미 사람이 아닙니다. 남성의 동물적 성욕 배설의 장(場)입니다. 그녀의 존재는 바로 이 사실을 세상에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는 가난 때문에 팔린 몸이거나 아니면 남자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유린당할 대로 당하고도 쓰레기처럼 거리에 내던져진 폐물과 같은 존재입니다.

사실 남자가 만들어낸 정조관념이 저들로 하여금 정조라는 것을 포기하게 만들었습니다. 창기는 향락시장에만 팔려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신의 이름을 이용한 신전 주변에도 이른바 '종교 창기'라는 것이 우글거렸습니다. 그들의 포주는 바로 종교를 관장하는 남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들만이 아니라 여자들마저 창기를 인간 쓰레기 중의 쓰레기로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지금 "너희보다 앞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들어갈 수 있다'가 아니라 '들어가고 있다'라고 합니다. '장차 들어갈 것'이라고 하지 않고 '지금 들어가고 있다'라고 합니다.

이 선언만큼 기존사회의 가치관을 포함한 전체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과격한 언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선언 하나로 '거룩하다'는 이름 밑에 보장된 온갖 가치와 제도, 의(義)나 선(善)이라는 보장 아래 싸여진 도덕이나 윤리로 지탱하는 세상, 선악을 분별하여 응징하는 법체제 등을 포함해서 한꺼번에 모두 파괴하고 맙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말하는 너희는 누구일까요? 우선 분명하게 떠올릴 수 있는 대상은 바로 저 창기를 '창기'되게 하고, 저주하는 존재들입니다. 마태오복음은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장(場)을 성전으로 설정하고, 예수에게 맞서 시비를 거는 자들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내세웠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는 '너희들'은 바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라는 전제를 안고 있습니다. 저들은 라삐들과 더불어 유다교의 상징입니다. 저들은 가장 거룩한 것의 상징이고, 백성 위에 군림하는 권위 자체입니다. 저들은 로마의 그늘 밑에서 유다 민족의 대표기관인 국회에 해당하는 의원들로서 그 사회의 질서와 법칙을 창출해내고 계도하며 선악을 구별하고 시비를 가려내는 위치에 있는 자들입니다. 한마디로 이 이야기에서 아버지의 지시에 무조건 "예" 하고 순종하는 맏아들의 상징입니다. 그렇게 자신들을 위장하고 백성들을 가르쳐왔습니다. 그러나 저들 자신은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철저한 위선자들, 예수가 가장 증오하는 허위에 찬 자들입니다. 그러나 창기는, 종교는 물론 일반생활권에서도 그들의 존재 자체가 거부당해왔기 때문에 종교니 윤리니 하는 말조차 입에 담을 수 없었고 그럴 엄두도 못 냈습니다. 저들의 존재양식은 신이나 양심을 들먹거릴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전 주변에서 감히 고개도 못 들고 "오! 하느님! 자비를 베풀어주소서!"라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가느다란 비명 같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예수는 저 여자들의 한 맺힌 생활 속에 밴 뜨거운 한탄의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오!'라는 비명 이상 더 이어가지 못하는 저들의 침묵에서 신을 향한 울부짖음을 들었으며, 바로 그들 앞에, 이 비명 앞에서 하느님 나라의 문이 활짝열 리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사실을 어떻게 솔직한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는 비유를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라고 쉽게 대답하지만 아버지의 말을 가볍게 무시해버리는 사람들 속에 종교인이나 그리스도인을 포함시킨다면, 신을 말하지 않고 어떤 종교를 고백하거나 그 조직에 가담하지 않으면서도 포도원 현장에 나가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 저들은 바로 비종교인, 비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저들을 일러 이름을 감춘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러봅니다.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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