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인이여, 문을 열어주십시오' 하고 졸라도 주인은 '너희가 어디서 왔는지 나는 모르겠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가 '우리는 주인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인께서 우리를 큰 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하고 말할 터이나 주인은 '너희가 어디서 왔는지 나는 모르겠다. 악을 일삼는 자들아,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라고 말할 것이다(루가 13, 25~27).
위의 짧은 이야기는 루가에만 전해지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 앞에서는 문(門)에 관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문 중에는 '넓은 문'과 '좁은 문'이 있는데,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곧 쉽고 편리한 길만 선택하지 말고 오히려 어려운 길을 선택하라고 하고, 이어서 들어가려고 애를 써도 들어가지 못할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문은 들어가고 나가기 위해서 만들어졌지만 닫아버리기 위해서도 있는 것입니다. 낮이면 큰 문을 활짝 열지만 밤이면 그 문을 굳게 잠급니다. 낮에 문을 여는 것은 반가운 손님들을 환영하거나 일터로 나가거나 무슨 볼일을 보기 위해서 나가기 때문입니다. 하여간 낮의 문은 하루 종일 드나들기 위해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밤이 되면 문을 닫을 뿐 아니라 튼튼한 빗장을 지르거나 자물쇠로 잠그는데, 이것은 도둑과 같은 해를 끼칠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버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는 문이 열려 있는 때와 닫혀 있는 때 중에서 닫혀버린 경우를 소재로하고 있습니다. 문을 닫고 잠가버린 상태는 오늘 바깥 일은 끝났다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도시에서 상점을 내고 영업하는 사람들 중에는 문을 닫아걸 뿐만 아니라 문 앞에 '문을 닫았습니다'라는 푯말까지 달아놓습니다.
비유 이야기로 돌아가봅시다. 어떤 집주인이 문을 닫고 굳게 잠가 버렸습니다. 이것은 이미 깊은 밤이 되었다는 표시이기도 하고, 이로써 오늘의 내 할 일은 끝냈다는 의사전달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문을 잠가버린 주인은 비로소 하루의 임무를 끝내고 이제 남의 간섭을 받지 않고 집안식구끼리 오순도순 즐길 수 있게 되었다고 마음이 부풀어 있을 수도 있으며, 어떤 사람은 싫든 좋든할 수밖에 없는 바깥사람과의 접촉을 마치고 이제 문을 닫아버리고 자기세계로 돌아와 이제야 사색이나 독서 등에 몰두할 수 있다는 안도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문을 닫아버리는 것은 무대로 치면 마지막 막을 내린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순간을 예수가 거듭 이야기의 소재로 했기에 여기서 문 닫는 상황에 관심을 기울여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문을 닫은 후에 어떤 사람이 밖에서 굳게 닫힌 문을 황급히 두드렸습니다. 물론 이 주인은 불쾌했을 것입니다. 이 문 두드리는 손이 그가 여유를 갖고 해야 할 생활계획을 방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은 냉정하게도 문을 열어주지 않고 단호하게 그를 나무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 두드리는 사람은 계속 "주인이여 문을 열어주십시오"라고 졸라댔습니다. 그런데 그 주인의 다음 말로 보아 찾아온 사람이 무엇을 구걸하기 위해서거나 아무 연고 없이 와서 문을 두드리며 애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에서 심청의 이야기가 연상됩니다. 심청은 인당수에 몸을 던져 자기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했는데, 그 효성에 감동한 수신(水神)은 그를 세상에 되돌려보내되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화려한 꽃 속에 실어 물 위로 띄워 올려보냈습니다. 이것을 발견한 임금은 그를 왕후로 삼았습니다. 왕비가 된 심청은 천하의 모든 소경들에게 공문을 띄웠습니다. 소경이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도록 궁전 문을 활짝 열어두었습니다. 소경이면 누구나 찾아올 권리를 준 셈입니다. 그런데 왕후가 그렇게 하는 이유가 새어나갔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각기 심청의 아버지로 가장하여 온갖 술책을 다 써가며 드나들었습니다. 그런 날이 계속된 후 지친 심청이 어느 날 저녁 그 아버지를 찾을 것을 체념하고 문을 닫아버릴 것을 지시했다고 상상해봅시다. 그때,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이미 때는 늦고 밤도 깊었는데 말입니다. 성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문을 닫기 전까지는 권리가 있으니 당당하게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밤중에 찾아와 문을 열어달라고 조르는 그 사람은 불청객이 아니라 시간을 놓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단호하게 "너희가 어디서 왔는지 나는 모르겠다"라고 잘라 말할 때 저들은 "우리는 주인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인께서 우리를 큰 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라고 응수함으로써 '우리야말로 당신이 찾던 사람들이다, 그러니 으레 문을 열어줘야 할 것'이라는 이유를 대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닫힌 문 밖에서 심청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심청과 그 아버지 사이에 있던 일 중에서 몇 가지 정보를 입수하여 그것을 주워섬김으로 문안으로 들어가려는 경우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이미 그의 정체를 알아챘습니다. 그러므로 "악을 일삼는 자들아,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라고 합니다. 이 말은 며칠 동안 많은 간교한 자들에게서 받은 주인의 분노가 이 사람에게 한데 몰린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낮에는 대문 안에 들어설 권리를 가졌던 그인데, 정해진 여러 날 동안 끝끝내 나타나지 않다가 이미 때를 넘겨 나타난 자 앞에 닫힌 대문은 영영 열리지 않습니다.
문은 열기 위해서 있지만 닫기 위해서도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문이 열려 있는 때는 바로 기회입니다. 기회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주어지는 것입니다. 기회란 언제나 있는 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한 기회는 시간적인 한계가 명시되어 있습니다. '기회를 잡아라' 또는 '기회를 놓치지 마라'라는 말을 쓰는데, 이렇듯 기회는 찰나적인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주어진 기회란 놓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그런 때입니다. 그러므로 기회는 바로 언제나 있는 것처럼 아무 때나 마음이 내키면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때를 맞춰 잡아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중에 '쇠털같이 많은 날에 오늘만 날인가, 내일도 날이지!'라는 말이 있는데, 이런 삶의 자세로는 결코 기회라는 것이 현실로 인식될 수 없습니다.
또한 기회는 뒤에 털이 없는 대머리에 비교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다가왔을 때 잡지 않고 지난 후에 뒤따라 잡으려고 해도 뒤가 대머리이기 때문에 잡을 수 없는 그런 것이 기회라는 말입니다.
복음서는 이때를 '은혜의 때'라고 성격화합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문이 열려 있어 들어올 수 있는 때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에게나 열려 있는 '구원의 때'라고도 합니다. 이때는 누구나 문안에 들어가서 소원하는 바를 간구할 수 있으며, 또 그 간구는 성취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열리면 닫는 때가 있습니다. 문 닫힌 때가 바로 기회를 놓친 때입니다. 그때는 아무리 연고가 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닫힌 문을 두드리며 연고를 대며 권리를 내세워도 소용이 없습니다. 문을 두드리며 자신의 공로와 들어올 수 있는 권리를 하소연해도 이미 늦은 때입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를 통해 예수는 그의 초대가바로 '기회'임을 분명히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