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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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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예수께서 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부자에게 관리인이 있었다. 이 관리인이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이 들려 주인이 그 관리인을 불러놓고 말했다.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말이 있는데 어찌 된 일이냐? 네 관리 사무를 청산하라. 이제부터 네게 관리인 직분을 맡길 수 없다.'관리인이 속으로 말했다. '어떻게 할까?주인이 내게서 관리인 직분을 빼앗으려 한다.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알았다. 이렇게 하면 내가관리인의 자리에서 떨어질 때 그들이 나를 자기들의 집으로 영접해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하나 불러놓고 첫번째 사람에게 '당신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을 졌소?' 하고 물었다. 그 사람이 '기름 백 말이오' 하고 대답하자 관리인은 '당신의 문서가 여기 있으니 어서 앉아서 오십 말이라고 쓰시오' 하고 말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또 얼마나 빚을 졌소?' 하고 물었다. 그 사람은 '밀 백 석이오' 하고 말했다. 관리인이 그에게 '당신의 문서가 여기 있으니 팔십 석이라고 쓰시오' 하고 말했다. 주인은 그 불의한 관리인이 슬기롭게 행한 것을 보고 칭찬했으니 이는 이 세상의 아들들이 자기 세대 일에 대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슬기롭기 때문이다"(루가 16, 1~8).

장면은 역시 농장이고, 부농(富農)인 지주와 그것을 도맡아 관리하는 사람 사이에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이 관리인은 그 집 재산을 관리하는 일꾼 중에서 우두머리였음에 틀림없고 그가 그 자리를 이용하여 그처럼 엄청난 비리를 저지른 것으로 보아 주인은 큰 부농이었을 것입니다. 또 그 많은 재산을 그에게 책임지운 것을 보아 그에 대한 주인의 신임이 아주 두터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어느 때부터인가 주변에서 이 관리인에 대한 불미스러운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한두 번이었다면 지금까지의 신뢰로 보아 그를 의심하지 않았을 터이나 여러 곳에서 여러 사람을 통하여 그가 부정을 저지르고 있다는 말을 계속 들은 그는 그 소문이 사실이라는 확실한 증거까지 포착했던 것 같습니다. 마침내 주인은 그를 해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이 관리인에게 장부 일체를 맡겨온 터라 그 일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적으로 그에게 관리를 위임하여 재량권을 주었던 것만큼, 배신감도 컸을 것입니다.

마침내 지주는 그를 불러 앉히고 그가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그의 고백을 들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응답은 주인이 들은 소문이 뜬소문이 아니라 사실임을 확인시켜주었습니다. 주인은 마침내 그를 해임하기로 결심하고 사무 일체를 인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물론 그중에는 손익계산서를 위시해서 정확한 채무장부를 넘겨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워낙 재산의 규모가 컸던지라 얼마간 정리할 기간을 주었겠지요. 이 관리인은 사실상 주인을 배신하고 비리를 저질러왔습니다. 실제로 상인들이나 소작인들을 상대하는 것은 자기 의무니까 그 자리를 십분 활용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마 그는 이런 정도의 비리는 절대로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과신했고, 일생 동안 그 자리를 지키는 건 문제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자리를 내놓는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해임통보를 받자 그는 크게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는 이 자리를 내놓으면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일을 할 수 없는 자기를 놓고 한탄합니다.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라는 그의 한탄은 바로 지금하는 일 외에 어떤 다른 일을 하리라는 마음의 준비는커녕 생각조차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한 처지에 놓인 그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고 고민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는 한 꾀를 생각해낸 것입니다. 그것은 주인이 단 한 번도 관여하지 않고 그에게 전부 내맡기고 있던 장부를 조작하는 일이었습니다. 채무장부는 단골손님과의 관계를 그대로 표시한 것입니다.

채무장부는 빚을 준 사람에게는 '칼자루'고, 빚진 사람에게는 '칼날'과도 같은 것입니다. 채무장부는 빚진 가난한 사람들의 목에 두른 사슬과 같아서 그들은 사실상 노예 아닌 노예로 만드는 힘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민중들이 봉기하면 제일 먼저 관청을 습격하여 채무장부부터 찾아내서 불태워버렸습니다. 이런 사실은 그 채무장부가 빚을 진 자에게 얼마나 무섭고 증오스러운 것인가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채무장부를 담당한 관리인의 세도도 상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마음먹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농간을 부릴 수 있으니까요. 이 관리인도 바로 이 같은 처지를 기화로 해서 채무자와의 관계에서 제한된 권리나마 행사했을 것입니다.

그가 살아날 가능성은 바로 이 집의 단골손님들이며 동시에 채무자인 저들과의 관계를 좋게 마무리함으로써 해고당한 후에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는 길밖에 없다는 판단이 섰을 것입니다. 그 편이 주인에게 애걸하는 것보다 목숨을 부지할 가능성이 더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마침내 그는 채무자를 한 사람 한 사람씩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채무장부를 놓고 채무자와 협상을 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그 채무자들 중 액수가 상당히 많은 두 사람의 경우만 예로 듭니다. 한 사람은 기름 백 말을 빚졌습니다. 여기서 기름은 올리브기름을 말합니다. 팔레스틴에서는 '바트'(bath)라는 단위가 있는데, 그것을 우리말로 '말'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한 바트의 기름이라면 큰 올리브나무 한 그루에 달린 올리브 전체를 짜도 모자라는 양입니다. 한 나무에서 대체로 120킬로그램의 기름을 짜낼 수 있습니다. 어떤 시대에는 백 바트의 기름을 146그루의 올리브나무에서 짜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진 빚은 어마어마한 액수입니다.

또 한 경우는 밀 백 석을 빚진 사람입니다. 유다 사람들에게는 '코르'(kor)라는 곡식을 재는 단위가 있었는데, 1백 코르는 27,500킬로그램, 즉 343석입니다. 그런데 이만한 밀을 수확하려면 박토인 팔레스틴에서는 42헥타르의 땅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돈으로 환산하면 2,500데나리온에 해당됩니다. 1데나리온은 한 사람의 정당한 하루 일삯이니, 그것은 한 가정의 생활비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2,500가족의 하루 생활비용에 해당하는 빚입니다. 이렇게 보면 가난한 지역인 팔레스틴 상황에서 보면 그 주인은 거부(巨富)가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 관리인의 재량권의 범위도 대단했으며 빚진 사람들도 일반 서민이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예를 든 사람들은 빚을 많이 진 사람들이고 그외에 적은 돈을 빚진 서민들도 많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관리인은 그중에 100바트의 기름을 빚진 사람과 만나서 협상을 벌이고는 대담하게도 그 빚의 절반을 탕감해주었습니다. 두 번째로 밀 100석을 빚진 사람에게는 20석을 탕감해주었습니다. 이처럼 그는 한 사람 한 사람 채무자들을 만나서 그들의 빚을 감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눈에 띄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남의 재산을 마치 자기 재산처럼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면서 채무관계를 조정한 것, 그리고 탕감해준 액수가 일정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이 이야기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많은 상상을 할 수 있는 공백을 남겨둡니다. 왜 어떤 사람에게는 반을, 또 어떤 사람에게는 20센트만 감해주었을까요?

이 이야기의 제목이 '불의한 관리인의 비유'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그를 불의한 짓을 하는 사람으로 간주하기 십상이고, 그래서 그의 모든 행동을 악한 쪽으로 해석해버리게 됩니다. 그러니 그가 이렇게 차별을 두는 것은 자기의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한 것이라고 간단히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그는 그들의 사정을 듣고 그들의 입장에서 이런 결정을 내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전혀 갚을 길이 없는 서민들에게는 아예 채무장부에서 빚을 지워버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습니다.

이 이야기중에 그는 "이렇게 하면 내가 관리인의 자리에서 떨어질 때 그들이 나를 자기들의 집으로 영접해줄 것이다"라는 독백에서 그의 목적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저들이 후에 자기와 좋은 관계가 되어 기꺼이 자기를 집으로 맞아들이리라는 뜻으로서 반드시 자기가 감해준 돈을 어떤 형태로든 받아내겠다는 것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마무리는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가장 어려운 대목입니다. "주인은 그 불의한 관리인이 슬기롭게 행한 것을 보고 칭찬했으니"라는 말입니다. 8절의 '주인'이 누구를 뜻하는지는 이론(異論)이 많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를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그 관리인의 주인을 말히는 것인지 이론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8절 전반부까지는 이 이야기에 속한 것으로 부자인 주인의 판단이라고 봅니다. 왜 그가 이 관리인의 빚 탕감이 그의 재산을 축 내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칭찬했을까요? 돈에만 눈이 어두운 주인이라면 그가 자기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만 듣고 해고하는 처지이므로 채무장부를 정리하는 그의 작태에 분노를 누르지 못할 터인데 이 주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여간 이 이야기는 이것으로 일단 끝입니다. 칭찬하는 주인의 입장은 이 이야기를 하는 예수에게서 좀 더 밝혀질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예수는 다시 농경사회의 현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지주와 관리인 또는 소작인의 관계를 예수가 예리한 눈으로 주시했다는 것은 그의 이야기에 여러 번 소재로 등장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소재는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지주와 관리인의 관계에서 부정은 거의 일상적인 일에 속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경우에 거의 예의없이 주인의 입장에 서서 수하에서 일하는 관리인을 심판해버리고, 그를 다른 시각에서 이해해보려는 노력조차하지 않는 것이 상례입니다. 이 이야기도 그런 일반적인 통념을 반영하는 일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이야기에 '불의한 관리인'이라는 단서를 붙인 것이 그것입니다. 윤리적인 차원에 국한하면 그가 불의하다는 사실엔 이론이 있을 수 없지요.

남의 재산을 성실하게 관리하는 것이 관리인에게는 윤리에 합당한 의무요, 그렇지 못하면 죄인으로 간주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관리인의 의무는 채무장부를 잘 관리하고 손익계산을 정확히 해서 주인의 재산을 불리는 것이 일차적 의무입니다. 그렇게 해야 모범적이며 성실한 사람으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하는 예수의 시선은 이런 윤리적 통념에 매여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 마지막에 주인에게 그 관리인이 쫓겨나는 마당에 일을 마무리짓는 그를 주인이 칭찬했다는 말 한마디로 우리의 윤리개념을 뒤흔들어놓습니다. 이 주인의 칭찬 한마디가 흑백논리에 사로잡혀 통념의 노예가 된 사람들에게 통념의 껍데기를 벗기고 다른 가능성을 엿보게 합니다. 주인의 돈을 제 돈처럼 유용했으니 그 관리인은 불의한 사람이라는 단정을 내리고 그런 전제에서 그의 모든 행동, 생활 일체를 그런 시각에서 보고 단정해버리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러한 통념을 부숴버리듯 그의 행동을 이미 저지른 일과 관련짓지 않고 그 자체로 평가합니다.

이 이야기는 8절 앞부분으로 끝납니다. 그러면 '칭찬했다'라는 말로 끝낸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 계속된 8절 뒷부분, 즉 "이 세상의 아들들이 자기 세대 일에 대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슬기롭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예수 이야기에서는 아주 낯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의 이야기를 보아오고 있지만 이렇게 이 세상 사람, 즉 속세인과 다른 차원의 사람, 예컨대 '빛의 아들들'을 구분하는 식의 이야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희랍 로마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사상에 영지주의라는 것이 있는데, 그 사상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골격이 이런 이원론적 표현입니다. 그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표현대로 하면, 이 세상 사람들은 '어둠의 자식들'임에 반해 다른 차원의 사람들은 '빛의 자식들'이라고 했습니다. 빛과 어둠, 영과 육, 정신과 물질 등은 영원히 합칠 수 없는, 근원부터 다른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빛이 어둠에서, 정신이 물질에서, 영이 육체에서 해방되는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이 사상이 유다교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리스도교에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에게서는 그런 영향을 받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 이원론적인 구별은 고사하고 종교생활과 일상생활 안에서도 정신적 노동자와 육체적 노동자로 계층을 구별하거나 천한 것과 귀한 것, 높고 낮은 것을 구별하여 한 쪽에 치우친 흔적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빛의 아들'이라는 말 자체가 예수의 이야기 속에 포함된 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8절 아랫절은 원래 이 이야기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으로 추가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러한 판단이 옳다는 것은 바로 그 아랫절이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리하면 재물이 다할 때 너희를 영원한 장막으로 영접할 것이다!(루가 16a)

우리는 예수의 다른 이야기들에서도 보통 사람들이 당연히 나쁘다거나 좋다거나하는 구별을 따르며 이야기의 소재를 그에 맞게 골라 쓰는대 대해서 예수는 그런 구별을 하지 않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친구를 사귀라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말인데,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은 통념을 깨뜨리는 말입니다. 친구를 사귀는 것이 선한 일이라면 사귀는 수단도 선해야 한다는 것이 통념입니다. 어떻게 들으면 돈은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라는 우리말과도 유사 합니다. 선한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아도 좋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좋은 목적을 달성하면 그 수단은 정당화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뜻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은 물론 아닐 것입니다. 목적을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는 처세술이 예수의 신조였다면 그의 운명은 달라졌을 수도 있고 그의 가르침도 무색해졌을 것입니다. 그는 목적과 수단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그는 불의에 대해 예민했지만 그것과 싸우는 방법으로서의 불의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또 한 그의 비극적인 최후를 초래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물론 이 말은 위의 이야기를 풀이한 것이기 때문에 전혀 고려에 넣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 자체가 우리에게 어려운 문제를 던졌기 때문에 풀이에서 이해의 열쇠를 찾아보자는 것입니다.

이 말에는 최후의 심판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재물이 다할 때가 바로 그것입니다. 즉 자기의 삶을 보장하는 모든 것이 제거될 때가 바로 심판의 때입니다. 그것은 위 이야기에서 주인이 관리인에게 지금까지 책임졌던 일을 청산하라는 것과 맞먹는 때입니다. 그가 자기가 수행했던 일을 청산하는 때가 바로 그 자리에서 쫓겨나는 때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일상적인 이야기는 아닙니다. 일상적인 생활의 규율이 아닙니다. 즉, 윤리적인 교훈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일상에서의 윤리적 행동과 비상시에 사람이 해야 할 도리는 상반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평소에는 가정을 가지고 부모, 자식을 부양한 사람이 가정을 모두 내버리고 다른 데로 가버린다면 불륜한 행위로 지탄 받습니다. 그러나 전쟁이나 그에 버금가는 특별한 상황에서 그렇게 하는 경우라면 누구도 그를 불륜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지금까지의 일을 청산하고 내쫓겨야 할 긴급한 처지에 있습니다. 이제는 과거에 한 일을 후회할 여지도 없고 보상할 능력도 없는 막다른 골목에 선 것입니다. 이 같은 막다른 골목에 선 그에게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찾는 것이 당면과제입니다. 그는 지금 그것이 일반 관습이나 통념에 맞느냐 안 맞느냐를 생각할 겨를이 없는, '종말'을 눈앞에 둔 처지에 있습니다. 그는 도망갈 생각을 해볼 수도 있고 주인을 속이기 위해 장부를 위조할 수도 있고 나아가서는 주인에게 마지막 저항을 해볼 수도 있습니다. 특히 그에게는 두 번째 방법을 택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빚진 사람들에게 그 많은 빛을 탕감할 권리가 있었다면 그는 장부를 위조해서 자기의 비리를 감출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고 '슬기로운'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빚진 자들의 빚을 탕감 해주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을 '꾀'라고 보면 대단한 '꾀'입니다. 이야기 속에서도 반영된 대로 이렇게 함으로써 저들을 친구로 삼아 실업 이후의 생활 대책의 한 방법으로 그런 '꾀'를 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빚들을 탕감하면서 차후에 자기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받으려 한 흔적은 없습니다.

이 이야기의 풀이에도 친구를 사귀었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주인이 자기 재산에 손해를 끼치는 행위를 슬기롭게 마무리지었다고 칭찬했다는 대목에 대해서 그의 이런 행위가 결과적으로 주인이 미처하지 못하고 생각지도 않았던, 남을 구제하는 일을 했기 때문에 칭찬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정말 그가 자기를 내쫓는 주인의 명성을 올리기 위해서 이런 꾀를 생각해냈을지는 의십스럽습니다. 그러나 그가 한 일은 큰 부자임에 틀림없는 주인의 재산을 그 보다 재산이 적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빚의 사슬에 목이 매여 고통받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짐을 덜어주거나 해방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풀이말에서 '불의한 재물'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 주인의 재물 자체가 불의한 방법으로 모은 것이라는 의미에서 불의한 재물이라는 뜻인지, 아니면 이 관리인이 주인을 속이고 자기 재산이 아닌데도 자기 것인 양 한 그 행위 자체가 불의하다는 의미인지 선뜻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만일 그 주인의 재산 자체가 불의한 재물이라는 뜻이라면 이 이야기의 의미는 굉장히 커집니다. 그럴 경우에 이 관리인은 마치 의로운 도둑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른바 의적(義賊)들이란 일반적인 도둑과 달리 불평등한 세상에 불만을 품고 불의하게 모은 부자들의 재물을 뺏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목적으로 활동한 사람들입니다. 만일 이 관리인을 의적에 비할 수 있다면 그는 최후의 심판 앞에서 바로 의적의 길을 선택한 셈입니다. 이런 가능성을 좀더 짙게 하는 것은 이러합니다.

그가 많은 재산을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었다면 관리인의 직책에 있을 때 사복을 채워 일생을 보장하기도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위해 아무런 축재(蓄財)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처음 이야기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그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서 주인이 결국 그를 내쫓았는데 그렇다면 그 낭비의 성격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일반적으로 생각해서 향락에 빠졌다는 말인지 아니면 마지막 행위에서 보듯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심을 썼다는 말인지요? 자신의 향락 때문에 낭비한 것이라면 그가 관리하는 재산의 범위가 너무 크고, 자신의 사복을 채운 것이 아니라면 결국 가난한 자들에게 선심을 썼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이지 어느 한 쪽으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런 가능성도 생각해보는 까닭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행위를 규정할 때에 그의 전력을 전제로 하고 그 사실 자체의 내용도 모르면서 선입관을 그대로 적용시켜 쉽게 판단해버리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어서입니다.

사람은 '가능성'입니다. 사람은 평상시와 비상시에 질적으로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가 절도를 한 전과범이었다고 해서 그의 모든 행동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그런 전제로 미래의 그를 판단해 버리는 일반의 독단이 얼마나 위험하고 맹목적인가를 알고 반성하자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도 결국 이 같은 경고가 포함되어 있다고 봅니다. 한 걸음 나아가서 이 이야기가 알리려는 중요한 것은 종말은 숙명 같은 것이 아니라 종말을 앞둔 사람에게 선택의 기회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라는 식의 생각에서 발악을 하거나 체념하는 사람들에 비해서 이 사람은 그 심판을 '기회'로 받아들이고 마지막 순간까지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칭찬을 받은 이유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다른 사람의 행동을 전력(前歷)과 연결시킴으로써 생기는 맹점을 알게 해줍니다. 사건이 일어났다 하면 전과자의 명단부터 뒤지고, 전과자라면 이유 여하를 묻지 않고 거부해버리므로 거듭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는 사람들을 다시 암흑의 세계로 쫓는 우리의 시대에서 이 주인의 칭찬은 너무도 이색적입니다.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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