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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한 과부의 투쟁

어떤 도시에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사람같이 여기지 않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그 도시에 또 과부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재판관에게 늘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재판관이 오랫동안 들어주지 않고 있다가 결국 이렇게 혼자 말했다. '내가 정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무시하지만 이 과부가 자주 와서 나를 이렇게 성가시게 구니 그의 원한을 풀어주어야 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못 견디겠구나!'(루가 18, 2~5)

어떤 도시에 한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재판관'이라고 번역된 말의 원뜻 안에는 '금지자', '처벌관'이라는 소극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재판관의 본래 임무는 시비를 가려주고 불의한 자들의 폭거에 대해 약자를 보호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에게는 정반대로 불신이 깊게 깔려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당시에는 재판관을 도둑으로 비유해서 '도둑재판관'이라는 표현이 하나의 별명처럼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재판관은 로마 치하의 '재판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유다 법에는 없는 관직입니다.

이 재판관에 대해서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사람같이 여기지 않는 사람"이라는 간단한 말로 그가 얼마나 교만하고 비양심적인 냉혈인간인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현실적으로 양심 따위는 완전히 묵살해버린 사람이라는 말뜻입니다. 말하자면 자기의 권한을 욕심껏 이용하거나 뇌물을 받고 재판을 하는 것을 일말의 가책도 없이 서슴지 않고 할 수 있는 위인임을 말합니다. 사람을 사람같이 여기지 않는다면 가장 잔인한 인간형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사람을 대할 때는 이미 사람이 아니고 죄인이거나 피고인 아니면 돈주머니 등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동시에 그가 가지려고 하는 것을 못 가진 사람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재로 여겼을 것이며, 따라서 그의 판결이 어떻게 내려질지는 더 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누구나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겠지요.

이 이야기는 이 같은 무도한 재판관을 소개한 다음, 말머리를 돌려서 바로 그 도시에 사는 한 과부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이 과부에 대한 설명은 따로 없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가장 불쌍하고 가난하고 아무런 삶의 보장이 없는 사람의 상징으로 과부와 고아를 드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과부는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경제적으로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마저 가장 쉽게 유린당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과부'였습니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과부는 무력함의 상징,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상류층에 대한 불을 토하는 듯한 예언자들의 비판 중에서도 과부의 돈을 삼킨다는 말이 자주 나왔는데, 예수도 바로 바리사이파나 서기관들을 비판할 때 이 말을 쓰고 있습니다(마르 12, 40).

이 도시의 한 과부가 어떤 놈에게 유린을 당했습니다. 그것이 어떤 형태의 유린인지는 이야기 속에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배를 곯아가면서 모아놓은 돈을 폭력이나 감언이설에 빼앗겼을 수도 있고, 남자들이 그녀를 '인간'으로 상대하지 않고 동물적인 성욕의 대상으로 유린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여간 그 상대자는 과부의 힘으로는 도저히 싸울 수 없는 강한 자였음에 틀림없습니다.

이 과부는 결국 재판관에게 힘을 빌리려고 했습니다. 그녀는 이미 재판관이 '비인간적'이라는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그녀에게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는 최후의 길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즉, 과부는 그를 찾아가기 이전에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보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자기 힘으로 맞서보다가 도저히 되지 않으니까 가족을 동원해보기도 하고, 그것도 안 되니까 종교기관의 힘을 빌려보려는 노력도 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를 도우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절망상태에서 아주 좌절할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결국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 악명 높은 재판관을 찾았을 것입니다.

이 과부는 두말할 것도 없이 계속 문전추방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살기 아니면 죽기로 밤낮으로 그를 찾아갔습니다. 아마 그가 머무는 집만이 아니고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다녔는 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 재판관은 귀찮게 따라다니는 그녀를 일거에 모욕을 주어서 다시는 오지 못하게 했을 수도 있으며, 부하들을 시켜서 매질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과부는 그 사람을 설득하는 일을 생명을 내건 투쟁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언젠가는 이 과부가 그 재판관에게 자기가 당한 억울한 일을 하소연할 기회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그 여자는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십시오"라고 사정했습니다. '원한을 풀어달라'라고 번역된 원뜻은 '내 잃어버린 권리를 찾아달라'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맺힌 한을 풀어달라'는 말입니다. 그 하소연을 들은 재판관은 그 여자의 고소는 정당하므로 재판하면 이길 수 있는 것으로 안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아무런 이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피소자에게 이미 뇌물을 먹은 탓으로 정당한 재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기피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재판관은 그 과부의 극성에 마침내 손을 들면서 이렇게 독백을 합니다.

내가 정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무시하지만 이 과부가 자주 와서 나를 이렇게 성가시게 구니 그의 원한을 풀어주어야 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못 견디겠구나!(루가 18, 4~5)

이 독백에서 그 과부가 얼마나 집요한 투쟁을 했는지 그리고 그 재판관이 얼마나 악한 자로서 직무유기를 밥 먹듯 해왔는 지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런 그도 마침내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의 이야기가 늘 그랬듯이 여기서도 이로써 이야기를 끊고, 그 다음에 벌어지는 일은 듣는 자의 상상에 맡깁니다.

여기서 무엇보다도 이 이야기의 인물설정이 우리의 주목을 끕니다. 두 사람이 등장하는데, 하나는 남자고 하나는 여자입니다. 여자의 위치는 남자와의 관계에서 결정되고 남자의 위상 역시 여자와의 관계에서 결정됩니다. '여자'라고 하면 '남자'를 전제한 것이고, '남자'라는 말 역시 '여자'를 전제한 것입니다. 이 말은 '남자없이 여자 없고, 여자 없이 남자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통념으로는 여자를 하나의 인격을 가진 주체가 아니라 남자의 성욕의 대상, 노동력, 아이를 잉태하여 핏줄을 계승하는 기능, 그리고 한푼의 임금도 지불하지 않고 무슨 일이든지 시키면 으레 복종을 해야 하는 존재, 그런 의미에서 또 다른 형태의 종으로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는 이 역할 중에 어느 것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내쫓거나 갈아치울 수 있는 하나의 물건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면 여자들은 자신들을 어떻게 인식했을까요? 여자는 남자의 예속물로 자기의 감정이나 의욕과는 전혀 상관없이 남자의 본능의 대상이 되어주고 그 씨를 받아 잉태하여 혈연을 이어주고 임금은 고사하고 한마디 고맙다는 말도 기대할 수 없이 집안일, 밭농사 등을 해야 했고 그리고도 남성 위주로 만들어놓은 모든 법규를 철저히 지켜 사실상 손발이 묶인 죄수처럼 끌려다녀야하는 것을 운명처럼 생각하여야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의사나 감정의 표시를 해서도 안 되며 거부나 저항 따위는 바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반 여성이 그러할진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 여자는 과부입니다. 남편이 죽었거나 이혼을 당해서 남편 없이 홀로 살아야하는 사람이 과부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가부장제도하에서 한 남편의 아내로 있는 일반 여자에 비해서 자유로운 몸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부장제도 밑에서 남편의 지시에만 의존해왔으므로 경제적 능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남자의 아내일 때는 예속의 줄에 묶여 있으나 또 한편으로는 일반 남성들의 야욕에서 보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부가 된 그녀는 제 힘으로 자기를 보호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녀는 자기를 보호하기에는 너무나 약하고 자구책도 변변치 못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는 이 같은 한 과부를 하느님도 양심 따위도 초개와 같이 털어버린 남자, 그런 불한당 같은 놈의 손에 사람의 생사를 좌우하는 법이라는 칼까지 안겨주었으니 남자로서도 가장 강력 한 힘을 갖춘 자를 상대로 설정했습니다. 그를 이 과부와 마주 세움으로써 이 과부는 더욱더 힘없고 초라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바로 이 둘을 대립시켜 싸움을 하는 장면을 상정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그 싸움은 하기 전에 이미 승패가 결정됐는데, 예수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는 가부장제도 안에서의 여자가 남자들의 그늘 밑에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 여자들을 그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집념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의 남자들은 '여자'란 남자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그를 즐겁게 해주는 예속품이라는 생각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창세기 2장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로 만들어졌다는 창조설화를 영원한 진리처럼 내세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이러한 인식을 뒤집어엎기라도하려는 듯이 여자를 쓰다가 못쓰게 되거나 싫어지면 내버리고 갈아치우는 물건처럼 여기고 이혼권리를 독점한 남자들에게 이혼을 금지하면서 "처음에 하느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했다"는 또 하나의 자료인 창세기 1장의 창조설화를 내세웠습니다.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똑같이 남자와 동시에 여자를 한 주체로서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생애를 단편적으로 기록한 짧은 복음서 전승에는 놀라울 정도로 여자가 많이 등장합니다. 또한 예수 생애의 절정을 이루는 수난사건과 부활사건에서는 남자들은 다 도망친 반면 여자들만이 증인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이 과부의 등장은 예수의 눈에 어쩌다 비친 가련한 여인상이 아니라 예수의 마음속에 깊숙이 뿌리를 박은 한 집념에서 나온 것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바로 그러한 과부로서의 한 여자를 남자 중에서도 가장 잔인하며 강력한 자와 대결시키는 이 단순한 이야기로 예수는 벌써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가 이 이야기를 한 목적은 무엇일까요? 보기에 따라서는 여러 가지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우리는 먼저 가부장사회에서 첨예화된 모순인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설정한 데 주목했습니다. 악랄한 재판관을 남성의 상징이라고 한다면, 과부는 그 시대 사회제도 아래서 억눌리고 있는 여성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시각으로 보면 억눌려 살면서도 그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여성해방운동의 일환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와 맥을 같이 합니다만, 가난과 비천의 상징인 과부와 폭력의 상징처럼 그려진 이 남자를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상징이라고 보면 민중해방운동의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과부나 민중들이 결국은 승리하고야 만다는 신념을 불러일으키려고 한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머리말은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하기를 권유하는 비유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통해 말하려는 것이 그런 것이라면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일단 당황하게 됩니다. 통상 기도는 하느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을 과부로 설정한 것은 현실에 가장 알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무시하고 사람을 사람같이 여기지도 않는 불의한 재판관으로 기도의 대상인 하느님을 비유한 것은 잘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예수의 이야기 중에는 이러한 비상식적인 예가 있습니다. 주인의 돈을 낭비한 불의한 사람의 이야기가 그 한 예입니다. 최후에 계산을 해야 할 마당에 그는 주인을 또 한 번 속여가며 채무장부를 위조해서 빚진 자들에게 선심을 쓴 것을 칭찬하는 대목이 그것입니다. 제사장 족속과 사마리아 사람을 대조시켜 사마리아 사람이 하느님의 가장 중요한 계명의 실천자라고 선언한 것도 파격적입니다. 그런 것을 전제하면 이 이야기에서 그는 하느님마저도 집요한 기도(투쟁)에는 마침내 항복하고야 만다는 신념을 강조한 것이라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하느님은 간절한 간구를 꼭 들어준다는 예로 "아들이 떡을 달라는데 돌을 줄 사람은 없으며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사람은 없다"(마태 7, 9)라고 했습니다. 루가에도 이와 병행되는 예가 있습니다. "아들이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사람은 없다"는 말은 같은데 "떡을 달라면 돌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는 말 대신에 "달걀을 달라면 전갈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11, 12)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은 두 곳에 병행되는데,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이라는 단서를 붙이고 "하물며 하느님이야 그 간구를 들어주지 않겠느냐?"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느님을 '인간의 아버지'로 비유하는 것도 내용적으로는 가당치 않은 비교입니다. 그것은 너희가 악하다는 전제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간절한 간구는 악한 것마저 극복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느님 자리에 설정한 재판관은 극도로 불의한 자로서 선한 구석이라곤 한 군데도 없는 사람으로 극대화시키고 있고, 이 과부의 집요한 간구는 마침내 이런 악의 화신 같은 사람까지 결국 굴복시키고 말았다는 이야기로서 집요한 간구는 평소에는 무(無)와 같고 침묵과도 같이 관여하고 있지 않는 것 같은 하느님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이러한 시각에서 단순화시키면 비록 나약한 과부일지라도 집요한 투쟁을 계속하면 남의 눈에 달걀로 바위를 깨려는 것같이 어리석게 보일지라도 결국은 하느님마저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기도는 머리로 생각하고 허공을 향해 중얼거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투쟁입니다. '행동 없는 간구'는 기도가 아닙니다. 이 여자가 집요하게 바위와 같은 그를 뚫고 들어가 결국 그녀의 성화에 못 이겨 그 재판관이 자기 직무를 이행하게 한 것은 끊임없는 투쟁의 결과입니다. 바로 그 행동이 그녀의 기도입니다. 이렇게 보면 기도란 단순히 '무엇을 해주십사'라는 소원을 비는 종교적 한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마저 움직이게 하는 인간의 투쟁입니다. 그 간구하는 것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집요한 행동으로서의 간구와 하느님의 뜻이 만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이 이야기 다음에 설명하는 부분에서 "너희는 이 불의한 재판관의 하는 말을 들으라.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백성의 원한을 풀어주지 않고 오랫동안 그대로 두실 것 같으냐?"라고 합니다.

이 설명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이 이야기에 나오는 과부는 한 개인이 아니라 '택하신 백성'을 비유한 점입니다. 그런데 이 택함을 받은 백성이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집요한 투쟁을 하면 마침내 하느님의 마음이 움직이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의 성취는 하느님이 일방적으로 하늘에서 떨어뜨려주듯이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투쟁으로 동참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 과부의 집념과 집요한 투쟁을 하느님의 운동에 참여하는 행위로 보는 예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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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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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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