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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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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친구를 위한 투쟁

예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 한 사람에게 친구가 있다고 하자. 그 친구가 밤중에 와서 '친구여, 떡 세 덩이만 꾸어주게. 내 친구가 여행중에 내게 왔는데 그에게 줄 것이 없어서 그러네!' 하고 청하니까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문은 이미 닫혔고 아이들과 나는 자리에 누웠네. 내가 지금 일어나 자네의 청을 들어줄 수 없네' 하고 대답했다고 하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친구라는 이유로써는 일어나서 청을 들어주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간곡히 조르면 그것 때문에 일어나서 친구의 청을 들어줄 것이다"(루가 11, 5~8).

이 이야기도 저 과부의 투쟁의 경우와 같이 루가만이 전하는 것으로서 그 양식상으로 보아 쌍둥이같이 비슷합니다. 과부의 이야기는 여자에 대해서이고, 이 이야기에서는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명히 밝히지는 않았으나 예수의 이야기 투로 보아서는 남자였을 것 같습니다. 예수는 비슷한 경우에는 한 번은 여자로, 한 번은 남자로 바꾸니까요.

앞에서 과부는 가난함의 상징이라고 했는데, 이 사람 역시 그날 그날 벌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단 한 사람이 먹을 만한 여분도 남기지 못했습니다. 과부는 원한을 풀기 위해 그럴 수 있는 위치에 선 사람을 찾아간 데 대해서, 이 사람은 먼 여행길에 배를 꿇고 찾아온 친구를 위해 나섰습니다. 저 과부는 불의하기로 소문난 재판관을 찾아갔는데, 이 사람은 이웃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둘 다 자기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안고 남의 도움을 청해 간구한 것은 같으나 그 성격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밤중에 뜻밖의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마 먼 길을 오면서 끼니를 걸렀던 모양입니다. 그 친구가 몹시 배가 고프지 않았던들 그리고 염치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친구의 가난함을 알았을 터인데 그 밤중에 먹을 것을 달라고 했을 것 같지 않고, 웬만했으면 어두운 밤에 배를 곯고 있는 친구의 사정을 얼굴빛으로 알아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허기진 그가 집에 들어서자 마자 쓰러졌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그 사람은 지금 당장 친구를 먹도록 해주어야 할 긴급한 상황에 놓여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당시의 가난한 서민들은 끼니마다 식구에 따라 조그마한 빵을 한 사람당 세 개씩 나누어 먹을 만큼 화덕에 구워서 먹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단 하나의 여분도 있을 수 없었습니다. 예의가 있다면 떡을 만들 반죽이 모자라 자신의 것을 적게 하거나 아니면 안 하는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친한 친구라도 밤에 찾아오면 빵을 새로 구워줄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단 하루의 여분도 가진 것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친구를 만난 이 사람은 저녁 빵의 여분을 가지고 있을 만한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그 사람은 평소에 그의 친구였습니다. 결국 '친구'를 위하여 '친구'를 찾아간 셈입니다. 때는 '밤중'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반드시 '깊은 밤'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팔레스틴 서민들의 집은 창문이 없기 때문에 방안이 원래 캄캄한데다가 밤이 오면 기름을 아끼기 위해 등불을 켤 생각을 하지 않고 일찌감치 자리를 펴고 자는 것이 일반적인 생활습성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을 마음대로 켜고 사는 넉넉한 사람들에게는 초저녁이라도, 가난한 그들에게는 이미 깊은 밤중일 수 있습니다. 문의 빗장을 내리고 식구들과 함께 자리를 깔고 잠이 들었으면 그들에게는 밤중임에 틀림없습니다. 문을 두드리는 그에게 그 친구는 문을 열어주지 않은 채, 어쩌면 이불을 덮고 누운 채 "나를 괴롭히지 말게. 문은 이미 닫혔고, 아이들과 나는 자리에 누웠네. 내가 지금 일어나 자네의 청을 들어줄 수 없네"라고 말합니다.

괴롭히지 말라고 한 표현을 미루어보아 단순히 대문만 두드린 것이 아니라 창피를 무릅쓰고 집요하게 배고픈 친구를 위해 문을 닫아 버린 친구의 마음을 두드렸던 것 같습니다. 그 친구라는 사람은 줄 만한 빵은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기에 줄 빵이 없다고 말하지 않고, 이미 닫은 문을 열 수 없고 잠자리에 든 평화로운 분위기를 깰 수 없다는 식으로 거절합니다. 팔레스틴 서민들의 집은 모두 단칸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일어나 조용히 움직여도 모든 식구가 다 함께 깨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친구는 그럴 수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사람은 가장(家長)으로서 충실하게 식구들을 보호하는 모범적인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찾은 이 친구도 꼭 같은 상황에서 굶주린 배를 안고 밤중에 찾아온 친구에게 문을 열어준 후, 그를 구하기 위해 이 사람을 찾아왔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그 집 식구들도 법석을 떨었어야 했을 것입니다. 이로써 두 사람은 '친구'라고 하면서도 큰 차이를 보입니다. 하나는 친구를 위해 언제나 열어놓은 상태이고, 하나는가정이라는 문을 굳게 닫은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이에 담이 생겼습니다. 그 담은 높아서 친구의 웬만한 간청은 전달되지 않습니다. 그 '친구'의 "나를 괴롭히지 말게!"라는 반응이 그 높은 담을 보여주고도 남습니다. 이 담을 넘는 길은 단 하나밖에는 없습니다. 그것은 집요한 투쟁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그 당시로서는 늘 있을 수 있는 상황을 가정 한 것으로 그 친구의 냉담한 반응까지 말하고 이야기를 끊습니다. 그리고 그 귀추는 이야기의 끝머리에 예수 자신의 희망을 필연적인 것처럼 담아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이 친구라는 이유로써는 일어나서 청을 들어주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간곡히 조르면 그것 때문에 일어나서 친구의 청을 들어줄 것이다(루가 11, 8).

이런 내용은 이 이야기를 그대로 연장시킬 수 있을 텐데, 예수 자신의 견해 형태로 바꾼 것은 특별히 강조하려는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간곡하게 조르는 것이 친구의 관계보다도 강하고 나아가서는 불의하고 잔인한 재판관보다도 강하다는 확신을 필연처럼 알려 주자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예수는 언제나 민중들과 더불어 살므로 그들의 심성과 그들의 생활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 이 이야기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밤중에 굶주린 친구를 위해서 남에게 구걸하러 가는 정성이라면 만일 자기가 가진 것이 있다면 그 친구를 위해서 내놓지 않을 사람이 아닙니다. 위에서 그는 내일 먹을 양식도 준비하지 못한 그날 그날 벌어먹는 일꾼이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좀더 짐작해보면 그는 내일 아침 먹을 양식도 없었음이 드러납니다. 만약 있었다면, 그는 그것으로 그 친구를 위해 빵을 만들어주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내일 아침도 식구들과 끼니를 걸러야 할 극히 가난한 사람입니다.

일반적인 인식으로는가난한 사람들이 더 이기적이고 한푼 돈에도 혈안이 된다고 합니다. 우리 속담에 '풍요한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는 말이 있는데, 뒤집어 말하면 내일 먹을 양식도 없는 사람에게는 남을 생각할 여유를 기대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느 정도라도 먹을 것을 저장하고 있는 사람들과 그날 그날의 양식마저 준비 못한 사람을 대비시켜 놓고, 먹을 것 하나 없는 저 민중에게서 사회의 통념을 깨는 기적 같은 마음씨를 통찰하고 있습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점점 소유의 노예가 되어버리고, 마침내 가진 것의 포로가 되어 자유를 잃어버리는 사람에 대해서 애당초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오히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유롭고 때로는 자기를 초월할 수 있는 힘을 가집니다. 내일 아침 먹을 것도 없는 사람이라면 오늘 저녁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곯은 배를 안고 잠자리에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가진 사람이 그런 경우에 처한다면 극도의 절망에 빠지거나 비애에 젖어서 친구를 생각하거나 밤중에 찾아온 사람이 굶주렸다는 따위를 염려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가진 자들과는 정반대 현상을 민중들에게서 경험했기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만일 '누가 주인공이냐?'고 묻는다면 물론 처절히 가난한 사람입니다. 알레고리적인 해석에 습관이 된 사람이면 곧바로 이런 질문을 할 것입니다. '그중에 어느 누구를 하느님에 비유하는 것이냐'고! 그렇게 물으면 그 대답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바로 어느 정도 양식을 갖추고 안락한 가정을 이룬 이 친구라고 단언할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이야기가 열심히 기도하라는 권고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몰인정한 친구도 그의 간절한 요구에 부득불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그에게 소원대로 그 빵을 주는데, 하느님이야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지 않을 것이냐?'라는 일반적인 해석에서 보면 그렇게 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굶주린 친구를 위해 빵을 얻으러 간 이 가난한 친구의 역할입니다. 이 사람은 굶주린 친구를 구하기 위해 이미 문을 닫아버리고 자리에 든 친구를 찾아갑니다. 찾아간 친구는 문을 닫아걸고 자리에 듦과 동시에 마음의 문도 닫아버렸습니다. 친구의 배고픔을 하소연하는 친구를 위해 문을 열려고도 하지 않는 것처럼 그의 마음도 닫혀 있습니다. 문을 걸고 자리에 든 그 가정이라는 분위기에 그는 포로가 된 셈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친구와의 관계에서 차단되어 있습니다.

친구의 요청을 들을 귀를 갖지 못한 사람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참 인간임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종교적으로 말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바로 그러한 사람의 굳게 닫힌 문을 이 주인공이 두드린 것입니다. 굳게 닫힌 집의 문만 아니라 이웃사랑에 등을 돌린 그의 마음의 문을 두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계속 거부했습니다. 이 주인공은 그러나 그 문을 열 때까지 두드리는 손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예수의 짐작처럼 그의 성화에 못 견디어 문을 열고 그의 소원을 들어주었다면 그는 참 인간으로서 으레 해야 할 이웃으로서의 의무를 다시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발전시키면 이 가난한 사람은 한밤중에 두 친구에게 두 가지의 다른 일을 해냈습니다. 육체적으로 배가 고픈 친구에게 먹을 것을 주어 살려냈고, 사랑이 고갈되어 마음의 문을 굳게 잠근 친구의 마음의 문을 두드려 그를 다시 이웃과 관계를 가지는 사람이 될 수 있게 함으로써 사람의 참모습을 찾도록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구원으로 이끄는 주체는 누구입니까? 굶주린 배를 채워줄 빵을 가지고 문을 걸어 잠근 그 친구가 '하느님'이라면 닫힌 문을 열고 구원의 손을 뻗친 것은 바로 이 '가난한 친구'입니다. '구원'이란 그저 하느님이 일방적으로 주는 것이고 사람은 입을 벌려 받아먹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처럼 간곡하게 투쟁하는 노력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열십히 기도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는 언젠가 같은 말을 반복하며 사람들 앞에서 길게 늘어놓는 기도를 비판하면서 "기도는 되도록 짧게 하라. 하느님은 너희가 기도하기 전에 너희가 필요한 것을 이미 아신다"(마태 6, 8)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느님은 누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는 기도하지 말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자신은 물론이고 그를 따르는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기도를 권장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은 단순한 시혜자(施惠者)고 사람은 수혜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사람이 하느님의 은총의 역사에 참여하는 행위입니다. 좀더 극단적인 표현을 하면 사람의 절실한 노력 없이는 하느님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마치 문을 닫아걸고 자리에 누운 그 사람과 같이!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기도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무릎을 꿇고 손을 맞잡은 채 소원을 아뢰는 종교적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당하는 어려움을 털고 일어나 친구를 위해서 염치없는 수모를 각오하면서도 그에게 먹을 것을 얻어다주는 행위 그 자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해서 구원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는다"(마태 7, 21 이하)고 했습니다.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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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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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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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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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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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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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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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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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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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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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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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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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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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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