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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심판과 맡은 분깃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귀족 한 사람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오려고 먼 나라로 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종 열을 불러 각각 한 므나씩 주면서 '내가 나가 있는 동안 이것으로 장사를 하라' 하고 말했다. 그런데 같은 도시의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지 않아 대표들을 뒤따라 보내어 왕위를 줄 분에게' 이 사람이 우리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게 했다. 그러나 귀족은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돈 주었던 종들을 불러 각각 얼마나 이를 남겼는지 물어보았다. 첫번째 사람이 와서 말했다. '주인께서 주신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말했다. '잘했다. 착한 종아, 네가 가장 작은 일에 신실했으니 열 도시를 다스리는 권한을 네게 맡기겠다.' 두 번째 사람이 와서 말했다. '주인이여, 당신께서 주신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습니다. '이 종에게도 '네게 다섯 도시를 맡기겠다' 하고 말했다. 세 번째 사람이 와서 말했다. '주인이여, 보십시오. 주인이 주신 한 므나가 여기 그대로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수건에 싸두었습니다. 주인님은 엄하신 분이라 맡기시지 않은 것을 찾아 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시기 때문에 나는 주인을 무서워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주인이 대답했다.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오는 말로 너를 심판하겠다. 내가 엄한 사람이어서 맡기지 않은 것을 찾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줄 네가 알았더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예금하지 않았느냐? 그랬더라면 내가 돌아와서 그 이자와 함께 원금을 받았을 것이다.' 주인은 곁에 선 사람들에게 '이 사람에게서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를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하고 분부했다. 그 곁에 선 사람들이 '주인이여, 그는 벌써 열 므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주인이 다시 말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가진 사람은 더 받게 될 것이요,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것까지도 빼앗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임금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그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루가 19, 12~27).

하늘나라는 또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먼 길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그들에게 맡겼다. 각각 힘에 맞도록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고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고 또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곧 가서 그 돈으로 장사하여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겼다.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그와 같이 하여 두 달란트를 더 남겼다.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돈을 감추어두었다. 오랜 후 주인이 와서 그들과 계산하게 되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주인이여, 주인께서 다섯 달란트를 내게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겼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때에 주인이 그에게 '착하고 신실한 종아, 잘하였다. 네가 작은 일에 신실했으니 이제 내가 큰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의 기쁨을 함께 나누자' 하고 말했다. 두 달란트 받은 사람도 와서 '주인께서 두 달란트를 내게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두 달란트를 더 남겼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때에 주인이 그에게 '착하고 신실한 종아, 잘하였다. 네가 작은 일에 신실했으니 이제 내가 큰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의 기쁨을 함께 나누자' 하고 말했다. 그런데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와서 '주인이여, 나는 주인께서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무서운 분임을 알고 두려워서 그 달란트를 가지고 가서 땅에 감추어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 그 돈이 그대로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때에 주인이 그종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너는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알았다면 내 돈을 돈놀이하는 사람에게 맡겨두어 내가 와서 본전에 이자를 붙여 받도록 했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마태 25, 14~28).

이 이야기는 마태오와 루가에 병행하는 것으로 위에서 언급한 Q자료에 속하는 것입니다. 마르코의 자료는 다른 두 공관서에 병행하는 경우도 있고, 그중 하나에만 전승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편 Q자료는 마태오와 루가가 복음서를 쓸 때 대본으로 한 것인데 그 본 모양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려면 서로 대조하면서 분석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학문적 노력은 사실을 밝히는 것도 많지만 이야기를 더 어렵게 하기 때문에 이 책에서는 그러한 노력을 의도적으로 피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대조적 관찰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지를 볼 필요는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이 이야기를 그 예로써 두 복음서에 병행되는 내용과 비교해 보려고 합니다.

우선 이 두 곳에 실린 이야기가 같은 자료였다는 증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이 이야기의 전체적 틀이 같습니다. 둘째는 먼 길을 떠나는 주인이 세 사람에게 자금을 주면서 그 돈을 활용하라고 부탁한 내용이 같습니다. 셋째는 셋 중에 마지막 사람의 행태가 꼭 같은 점, 넷째는 처음 두 사람에게 주인이 칭찬한 내용도 유사하며, 다섯째는 마지막 종의 답변에서 그 주인의 성격에 그 책임을 전가한 점, 마지막으로 게으르고 적게 가진 사람의 것을 빼앗아 가장 많이 가진 사람에게 준 것 등이 같은 내용입니다.

한편 다른 점들도 눈에 띔니다. 첫째로 마태오에서는 처음부터 세 사람의 능력에 따라 자금을 달리 준 데 대해서 루가에서는 자금을 똑같이 주었다는 점, 둘째로 마태오는 단순히 "어떤 사람이 먼 길을 떠나면서"라고 했는데 루가에는 "귀족 한 사람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오려고"라고 한 점, 셋째 마태오에는 잘한 사람들에게 그것에 해당되는 큰일을 맡기겠다고 한 데 대해 루가에서는 왕위를 얻으러 갔었다는 전제답게 그들의 업적에 상응해서 열 도시, 다섯 도시 등을 다스릴 권한을 주겠다고 한 점 등입니다.

이외에도 루가에서는 이 이야기와 좀 거리가 있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그것은 그 도시 사람들이 귀족이 왕위를 받는 것을 반대하여 왕위를 줄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에게 그 뜻을 전달했다는 것이고(14b), 이에 대한 보복으로 그는 자기가 임금이 되는 것을 원치 않은 그 '원수들'을 끌어다가 처형하라고 명령한 사실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이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줍니다. 이런 경우에 어떻게 이 차이점을 헤쳐나가고 어느 복음서의 이야기를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먼저 이 이야기의 골자를 추려봅시다.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끝 사람 때문입니다. 끝 사람은 주인이 준 자금을 전혀 활용하지 않고 애당초 땅에 묻었다가 그 돈을 고스란히 돌아온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책임을 주인에게 전가합니다.

"주인님은 엄하신 분이라 맡기시지 않은 것을 찾아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시기 때문에 나는 주인을 무서워했던 것입니다." 내용상 별 차이 없으나 마태오에는 "나는 주인께서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무서운 분임을 알고 두려워서 땅에 감추어두었습니다"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가 맡은 것을 활용하지 않은 책임을 주인에게 전가할 뿐 아니라 주인에게 불만을 담은 어투입니다. 끝 사람의 이러한 자세에 대하여 주인은 분노를 터뜨립니다. 주인은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았다면 예금이라도 해서 이자라도 받았어야 될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가당치 않은 그의 변명을 크게 나무랍니다. 루가에는 그를 나무라는 말에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오는 말로 너를 심판하겠다"라고 합니다. 이 말은 마태오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이 이야기의 정곡을 찌릅니다.

마태오에는 그 서두에 "하늘나라는 또 이와 같다"는 전제로 출발 하나 이야기의 내용 전체를 살펴볼 때, 하늘나라의 내용이 보이는 데는 아무데도 없습니다. 루가에서 볼 수 있듯이 사실 그 이야기는 바로 심판에 초점이 있습니다. 주인이 맡긴 자금을 사장(死藏)시켜놓고 긴긴 시간 동안 자기가 맡은 것을 활용하지 않은 이 사람은 심판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만일 마태오대로 이야기한다면 심판받는 이 사람에게 변명할 구실을 줄 수 있습니다.

'같은 사람인데, 왜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섯, 두 달란트씩 자금을 주고 나는 한 달란트밖에 주지 않았소? 애당초 주인이 나에게 아무런 가능성도 기대하지 않은 마당에 내가 주인을 위해서 애써 노력할 필요가 어디 있겠소?'라는 투의 반응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불만 속에는 주인의 불합리성을 내세운 변명에 반항의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루가에는 처음부터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꼭 같이 한 므나씩 나누어주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두 가지 점에서 납득할 만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집니다. 하나는 이 사람의 불만 섞인 변명, 주인에 대한 터무니없는 공격이 근거 없는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 되고, 또 하나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평등한 기회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변명의 여지를 봉쇄합니다. 똑같이 대우했는데 앞의 두 사람과 대조하여 그 성과가 뚜렷하게 다르므로 이 사람의 핑계는 전혀 가당치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심판을 가르치는 데 초점이 있으므로―이것은 마태오에서도 같습니다―이런 점에서 루가의 이야기가 더욱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왕위를 받으러 가는 한 귀족'이라는 전제가 일반적으로 단조로운 예수 이야기와 좀 다른 성격을 보여줍니다.

위에서 예수의 이야기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거나 그들이 다 알거나 경험하고 있는 어떤 시대적 이야기를 소재로 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에도 바로 그러한 시대적 사건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성서(루가)대로 하면 헤로데왕이 죽는 해에 예수가 난 것입니다. 헤로데는 로마제국의 꼭두각시 왕이었으나 워낙 교활하고 로마제국에 솔선하여 충성했기 때문에 비록 그 세력이 제한돼 있었으나 그의 판도는 다윗시대를 방불할 만큼 대단히 넓었습니다. 그는 죽으면서 배다른 형제들이기는 하지만 세 아들에게 자기의 관할영역을 분할해주었습니다. 그런 의사를 로마에 전달하여 재가를 받을 때에 그는 예루살렘과 유다 지방을 맡기로 한 맏아들 아르켈라오(Archelaus)만은 '왕'으로 인정해달라는 요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로마는 분할된 지역의 통치자로서의 요청은 받아 들였으나 왕위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헤로데가 죽은 후 유다 지방의 일개 봉건주에 불과하게 된 아르켈라오는 집요하게 왕위를 인정해줄 것을 로마에 요청하다가 결국 로마로 직접 간 일이 있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그를 싫어했습니다. 더군다나 그가 왕으로 임명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서 시민대표 60명을 선정해서 로마로 파견하여 반대의사를 관철하는 투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로마는 결국 아르켈라오에게 왕의 칭호를 인정해주었습니다. 이에 힘을 얻은 그는 귀국하자마자 그의 반대파들을 숙청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때 모든 유다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정치적 사건입니다. 아마 아르켈라오가 얼마 동안 예루살렘을 비워야 하는 상태에서 신하들에게 임무를 맡기면서 그 능력과 충성심을 시험해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자신의 심복들에게 정보를 샅샅이 듣고 그중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은 높이 기용하고 기회주의자로서 자기가 없는 동안 방만한 생활을 한 사람들은 추방했습니다.

예수는 바로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이 이야기를 소재로 하면서 심판의 성격을 알리려고 했습니다. 일반인들은 단지 그들이 싫어하는 헤로데의 이야기를 냉소적으로 주고받는 것으로 불만을 해소하는 데 그쳤겠지만 예수는 흘러간 이야기 같은 이 사건에서 변명의 여지가 없는 심판의 국면을 연상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알레고리적 해석에 젖은 사람들은 여기에 등장하는 "왕"(루가) 또는 "어떤 사람"(마태)을 '예수'라고 하고, '그가 돌아와서'는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된 후 하느님께로 가서 천하를 다스릴 왕권(그리스도)을 받아가지고 세상에 재림한다'는 뜻이고, 바로 그 기간 동안 자기 의무를 다하지 않고 그를 헐뜯고 그가 다시 재림하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하는 '유다인들'이 바로 '받은 돈을 땅에 묻고 불평하는 종'이라고 풀이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리에 근거한 틀에 박힌 상상일 뿐이고, 이 본문에는 그렇게 상상할 만한 어떤 단서도 없습니다.

예수는 비록 특수한 사건을 소재로 하더라도 말하려는 내용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상식적인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평등하게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딴말로 하면 예수는 사람을 처음부터 구별하지 않고 똑같이 한 가능성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좀더 좁혀서 다른 말로 하면 예수는 바로 이 이야기를 하는 그 시대를 '구원의 때'라고 보았습니다. 과거를 묻거나 신분을 묻는 따위의 때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개방된 때라고 본 것입니다. 그런 의미를 나타낸 것이 모두에게 똑같이 한 므나씩 나누어주었다는 말입니다. 계급사회에서 보면 이런 신념은 현실과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도래 앞에서 그때는 개방되어 있다는 것이 예수의 신념입니다. 유다교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신념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죄인과 의인을 엄격히 구별하고 율법을 적용해서 모든 사람들의 공죄(功罪)를 구분하여 판정하는 것이, 다시 말해 심판받는 것이 바로 종말이요, 하느님의 의의 실현이라고 보는 그들에게는 평등이란 있을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하느님 나라가 도래한다"는 절규를 반복하되 어느 누구에게도 조건을 달지 않았습니다. 유다교에서 죄인으로 규정된 민중들을 무조건 영접했으며, 그들을 맞아들일 때에 과거를 묻거나 어떤 단서를 붙이는 일도 없었습니다. 큰 잔치의 비유 이야기에서처럼 거리로 나가서 만나는 사람은 누구나 데려오라고 했듯이 예수의 행동 자체가 그러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오히려 세상이 쌓은 인간 사이의 담을 헐고 법에 의해 죄인으로 규정됐거나 질병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환영했고, 예수는 그 나라는 그렇게 개방됐다는 것을 자신의 행태로 여실히 보여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때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열린 가능성의 때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가능성'이란 말은 강제가 아니라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상태 또는 때라는 말입니다. 선택하는 데 자유가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선택한 결과에 대한 책임도 선택한 자 자신이 져야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처음 두 사람은 자기들이 받은 자원을 활용하여 최선을 다하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마지막 사람은 그것을 땅에 묻어버리고 방종하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심판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기가 선택하는 대로 되는 것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주인이 책임을 주인에게 돌리려는 그 사람에게 "나는 네 입에서 나오는 말로 너를 심판하겠다"라고 한 것은 정곡을 찌른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상과 같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마태오 끝 절, 즉 28절은 이 이야기와 사실상 아무 관련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14절은 그 시대에 유포된 이야기를 반영했을 뿐 이 이야기의 요점과는 아무 관련도 없습니다. 단지 이 심판의 기준으로서 '작은 일에 충성하라. 그러면 보다 많은 것을 맡길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보다 큰 신뢰를 받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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