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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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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어떤 부자의 밭에 곡식이 잘되었다. 그래서 그는 궁리한 끝에 속으로 말했다. '내 소출을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내 곳간을 헐어 더 크게 짓고 곡식과 물건들을 다 거기 쌓아두겠다.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리라.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쓰기에 넉넉한 좋은 물건들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너는 안심하고 먹고 마시고 즐기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너 어리석은 사람아, 바로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루가 12, 16~20)

이 이야기는 루가복음에만 있는 것입니다. 뒤에서 또 다른 예를 볼 수 있겠지만, 루가에는 특히 경제적인 시각에서 심판을 하고 있으며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를 대비시키고 가난한 자의 편에 선 예수를 크게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어떤 곳에 한 부농(富農)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미 먹고 입을 것이 넘쳐 있는 판에 또다시 큰 수확을 거두어들였는데, 그의 걱정은 이 많은 곡식을 쌓아둘 곳간이 모자란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 부농은 제 힘으로 남보다 유달리 부지런해서 이같이 기대한 이상의 엄청난 수확을 하게 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가진 많은 땅을 소작인들에게 주어 풍작이 되도록 독려했을 것이며, 소작의 배분 관례를 깨고 잔인할 정도로 자기에게 유리하게 함으로써 부를 축적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이렇게 과대한 부의 축적은 땅이 없는 사람들을 싼 임금을 주고 삯꾼으로 고용해서 노동력을 착취한 결과일 수도 있으며, 풍작이 되도록 종들을 채찍질하여 거두어들인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어쨌든 뜻밖의 풍작에 즐거운 비명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포만감 뒤에는 논밭에서 허리 한 번 못 펴고 뼈가 휘도록 일하고 타작한 곡식을 지고 날랐으나 먹을 것이 없어 배고픔에 허덕이거나 노동력을 앞당겨 파는 형식으로 그 부자에게 며칠씩 먹을 양식을 구걸하는 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한숨과 비명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저들은 그나마 얻은 밥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원망의 소리는 물론이고 긴 한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을 것이고, 그저 흐르는 땀방울을 눈물방울과 함께 닦으며 쌓인 한을 삼키며 묵묵히 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농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이 넘쳐나는 곡식을 어떻게 보존하느냐?' 하는 궁리로 가득 차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주판알을 퉁기며 계산한 끝에 지금 있는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지어서 이미 있는 곡식들과 새 곡식, 그리고 다른 물건까지 보관하는 것이 가장 옳다는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러고는 그는 크게 안도해서 행복을 누리는 자기를 상상합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계획대로 이루면 비로소 이런 노래를 부를 것이라고 상상했습니다.

(내)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쓰기에 넉넉한 좋은 물건들은 많이 쌓아두었으니 너는 안심하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루가 12, 19).

우리나라 같으면 '내가 즐겁구나 풍악을 울려 내 즐거움을 더하여 라'라는 말이 덧붙여졌을 것입니다.

이 부농은 차고 넘치는 곡식을 바라보며 즐거운 환상에 젖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홀로'입니다. 이미 말한 대로 그는 자기를 대신해 땀 흘려 농사지은 많은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는 그들의 고충을 생각할 마음의 여유도 없거니와 그들의 탄식소리를 듣기에는 자기 욕심으로 곽 차 있었습니다. 비록 짧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 자신 외에 어느 누구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아내도 자식도 없는 듯이 이야기 속의 그는 '홀로' 있습니다. 그가 환상 속에서 부르는 노래에도 자기 식구들이 반영돼 있지 않으므로 '우리는 더불어 안심하고 먹고 마시고 즐기자!'라고 하지 않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자기 혼자만 생각합니다. 오직 '내 곳간! 내 영혼! 내가 안심하고 즐기리라!'는 말투뿐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더러 '안심하라'고 합니다. 이제는 두려워해야 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는 자기의 삶을 곡식과 그 밖의 소유가 보장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자기를 둘러싼 풍부한 물질이야말로 행복한 자기의 삶을 방해할 수 없게 하는 방패가 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끝 말이 나오기 전에 이미 듣는 사람은 그를 부러워하기보다는 오히려 불안함과 불길한 예감을 갖게 됩니다.

소유는 오히려 우환이 될 수 있습니다. 새로 창고를 짓고 곡식을 쌓아둠으로써 오히려 이전보다 더 흉악한 도둑을 부를 수 있습니다. 자기만 생각하는 그를 위해 그에게 충성할 사람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얼마나 고독한 사람이냐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차라리 추수한 곡식들을 성벽처럼 둘러쌓고 그 안에 감금되어 있는 모습으로 비칩니다. 그리고 자기 영혼에게 안심하라고 중얼거리는 모습이 오히려 마음에서 새어나오는 불안을 감추려고 애써 노래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자기가 가진 것에 갇힌 죄수로 보입니다. 그가 가진 것들이 감옥으로 보입니다. 그가 가진 것들이 그와 그 밖의 사람들 사이를 완전히 차단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더러 안심하고 먹고 마시고 즐기라고 하지만 먹고 마신대야 얼마나 많이 먹고 마실 수 있으며, 즐기라니 어떻게 홀로 즐긴단 말입니까? 오히려 그 안에 갇혀 권태와 지루함에 질식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청천벼락 같은 경고로 끝을 맺습니다.

너 어리석은 사람아, 바로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루가 12, 20)

풍요함에 도취되어 있는 이 사람은 너무도 자명한 이런 결말이 자기에게도 닥쳐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할 틈이 없었습니다. 풍족한 소유가 그의 동물적인 삶을 보장해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의 죽음까지 가로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소유한 것이 삶을 보장해준다고 생각했으나 죽음 앞에서는 그가 믿던 그 소유들이 얼마나 무용한지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가 죽든지 말든지 그 물건들은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죽으면 죽음과 동시에) '내 것'이라는 그 '나'는 없어집니다. 그러니 소유한 물건과 '나'는 전혀 상관이 없게 됩니다. 소유한 물건으로 '나'를 보장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나는 내 운명의 길로 가고 나를 보장한다고 생각했던 소유물은 그것대로 다른 데에 쓰여질 것입니다. 그러니 소유물을 나의 영원한 동반자로 여기고, 이것이 삶을 보장해줄 듯이 생각한 이 사람은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여기서 또 한 번 우리는 예수의 예리한 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풍요한 사람을 볼 때 부러워하거나, 아니면 좀더 생각을 깊이하는 사람은 그만한 재산을 축적하는 과정에서 그가 얼마나 나쁜 짓을 많이 했는지를 생각하며 비판의 눈으로 보거나, 어떤 사람들은 그래 봐야 하루에 세 끼 이상 더 먹겠냐며 냉소적인 시선으로 볼 것이나 예수는 바로 그의 어리석음의 정곡을 찌릅니다. 그것은 '네 소유가 너의 삶을 보장하지 못하며, 네가 죽으면 그것이 네 소유라는 보장도 또한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이 부유한 사람은 그의 눈에는 어리석은 연민의 대상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농사꾼이 땅을 파고 씨를 심고 물을 주는 등 노동을 하며 한 생명이 자라나는 것을 보면서 희열을 느끼고, 한 여인네가 떡가루에 누룩을 넣어 반죽을 한 다음에 그것이 부풀어오르는 것을 보고 느끼는 감격과 떡이 되어 식구들에게 나누어 먹이는 기쁨은 아무도 뺏을 수 없는 데 반해, 이 부자의 자기 위안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예수는 꿰뚫어보고 있습니다.

'오늘 밤에 내가 죽게 된다면 이 많은 재산은 누구의 것이 될까?' 이것은 그 사람의 허세 밑에 깔려 있는 불안을 투시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막연하게 죽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오늘 밤 이라도'라는 것은 바로 그의 불안의 극치를 나타낸 것입니다. 이런 극단적인 예감이 갑자기 드는 것은 심리적으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극도의 기쁨은 바로 슬픔으로 들어서는 분수령이 될 수 있습니다. 행복감이 절정에 이른 순간 눈물을 터뜨리는 경우를 우리는 얼마든지 보았습니다. 그것은 그 행복에 너무 애착을 느끼기 때문에 그것을 잃으면 절대로 안 된다는 조바심이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표현대로 하면 이것은 예수가 그의 허상을 깨는 경고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을 것이다"라고 선언하는데, 그 선언이 바로 하느님의 이름으로 된 것임을 보아 단순히 그 부농의 심리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는 죽음이 이미 코앞에 닥친 것을 모르고 행복한 앞 날만을 꿈꾸는 그의 비참함을 꿰뚫어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이야기를 한 목적은 무엇일까요?

하이데거는 신을 전제로하지 않는 실존철학자입니다. 그는 줄곧 인간을 물어왔습니다. 그 어떤 것이든 이해하려고 하면 확실한 거점을 설정해야 합니다. 그는 너무나 자명한 것을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죽어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객관적 진실이지 주관적으로 인식되지는 않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은 자신이 죽으리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젊거나 건강한 사람이면 더욱 그러합니다. 이것은 사람이면 누구나 지닌 어리석음입니다. 주변에서 계속 죽어가는 것을 보고 가까운 사람들의 장례식에 참여하여 그를 매장하는 것을 보고 있는데도, 자신이 저처럼 죽어 땅에 묻히리라는 것은 전혀 실감하지 못합니다.

풍요한 사람들은 더욱 자기 죽음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소유에 둘러싸여 근거 없는 안도감에 취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바로 그런 사람들일수록 죽음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죽음을 막지는 못해도 최대한으로 연장해보려고 갖은 방법을 다 동원 합니다. 장수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면 쓰거나 달거나 아무리 더러운 것이라도 다 구해 먹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장수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무슨 짓이라도 다 합니다. 이러다 보면 그는 결국 죽음의 때를 연장하겠다는 욕구 때문에 생활 자체가 곤욕스러워지는 자가당착에 빠집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는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당장 오늘 밤에 죽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밤에 죽는다'는 것은 그가 곳간을 크게 새로 짓고 곡식을 쌓아올리고 그것에서 행복의 보장을 찾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 그 순간 그 모든 재물이 네 것이 안 되고 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되면 문제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자기가 가진 보화를 부둥켜 안고 죽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만 그런 것은 예외이고 대개의 사람은 그런 막다른 골목에 서면 자기가 살아온 과거를 후회합니다. 이 부호(富豪)는 어떻게 했는지 예수의 이야기가 늘 그렇듯이 더 밝히지 않습니다만, 아마 크게 뉘우쳤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 죽을 사람에게 들려주려는 것이 아니고 그와 같이 미련한 부호들에게 하는 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야기의 목적은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네가 가진 것으로 너를 보장하려고 곳간을 늘려 짓고 축재(蓄財)에만 열중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서 지금 굶주린 사람들에게 그것을 나누어 주어라'라는 뜻을 알리려는 것입니다. 그런 일도 당장 죽게 되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이 어리석은 부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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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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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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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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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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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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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 나라와 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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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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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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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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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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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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