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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한 부자와 거지

한 부자가 있었다. 그는 자색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잔치를 베풀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런데 그 집 대문 앞에는 나자로라 하는 거지가 헌데투성이가 되어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 했다. 그런대 심시어 개들까지도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다. 어느 날 거지는 죽어 천사들에게 이끌려 아브라함의 품으로 가게 되었고 부자도 죽어서 땅에 묻혔다. 부자가 하데스에서 고통을 당하다가 눈을 들어보니 멀리 아브라함 옆에 나자로가 있지 않은가! 그래서 그는 소리를 질러 '어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나자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시원하게 해주십시오. 저는 이 불 속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 아브라함이 대답했다. '아들아, 돌이켜 생각해보아라. 네가 살아 있을 때에 너는 좋은 것을 다 받았고 나자로는 나쁜 것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지금 여기서 위로를 받고 있으며 너는 거기서 고통을 받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수렁이 놓여 있기 때문에 여기서 네게 건너가려 해도 가지 못하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오지도 못한다. '부자가 말했다. '아버지, 소원입니다. 그를 내 아버지 집으로 보내주실 수 없습니까? 제 다섯 형제가 거기 있습니다. 나자로가 가서 그들에게 경고하여 고통받는 이곳에 그들이 오지 않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아브라함이 말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다.' 부자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사람들 중에 누가 그들에게 가서 말하면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대답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사람들 중에 누가 그들에게 가서 말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가 16, 19~31).

이 이야기는 예수의 것으로서는 가장 길고 예외적으로 자세합니다. 그렇게 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앞에서 예수의 이야기들은 일하는 현장 또는 그때의 일반적인 사건이나 민중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 등을 소재로 한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바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 형식입니다. 그러므로 그때 유다 사회에서 민담처럼 알고 있던 이야기를 먼저 소개하고 그것과 비교하면 이 이야기의 내용이 쉽게 풀릴 것입니다.

에집트의 유명한 '오시리스의 전설'중에 한 왕자가 죽음의 세계를 순찰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마지막 말은 이런 것입니다. "이 땅 위에서(팔자) 좋던 사람은 거기에도 좋고 땅 위에서도(팔자)가 나빴던 사람은 거기에서도 나빴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말 대로라면 저 피안의 세상이란 결국 이 지상의 삶의 연장이라는 뜻입니다. 에집트에 많이 살고 있는 유다 사람들이 이런 신화를 팔레스틴에 유포시켰는데, 그 과정에서 유다교의 틀에 맞게 변조됐습니다. 변조된 이야기는 간단히 말하면 가난한 라삐와 부자 세리가 저 나라에서는 팔자가 바뀌어졌다는 내용입니다. 즉 가난하던 라삐는 의롭게 살았기 때문에 잘살고, 풍요하게 살던 세리는 그 죗값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모두가 알고 있는 바로 이 유다교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대로 되풀이하지 않고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본질적으로 다른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지없이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돈이 무척 많았기 때문에 늘 일할 필요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언제나 호화롭게 차려 입고 매일같이 잔치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만찬은 홀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손님들도 불러왔을 수 있으나 만일 그랬다면 초청받은 사람들은 신분상으로 그와 같거나 그 이상의 사람들에 국한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친구들을 부르지 않고 홀로 화려한 식탁에 앉아서 우리 옛 풍속처럼 왕이나 고관들이 '풍악을 울려라' 하면 음악가들과 무희들이 그를 즐겁게 하려고 온갖 재주를 부리는 것을 보고 즐겼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는 향락에 빠져 그외의 것에는 아무 관심도 가질 수 없었으며 다른 것을 볼 눈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 사람과 완전히 대조되는 또 한 사람이 대문 앞에 있었습니다. 그는 거지였고 몸을 가릴 만한 의복도 못 입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개들이 그의 몸을 핥았겠지요. 그는 어떤 심한 피부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심했는지는, 개들이 그것을 핥았다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아마도 진물이 많이 흐르는 피부병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병은 문동이와 마찬가지로 부정한 병으로 낙인을 찍고 죗값으로 받은 천벌이라는 통념 때문에 그런 병자는 죄인으로 단정되어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느님과도 격리되어야 한다고 단정했습니다. 그래서 예배에도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몹시 굶주려 있었습니다. 풍요한 만찬식탁에서 대문 밖까지 풍겨나오는 냄새 때문에 그는 더욱 배고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언뜻 『춘향전』의 한 대목을 생각하게 됩니다. 암행어사가 된 이도령이 초라한 거지 행색을 하고 고을 원님이 베푸는 화려한 잔치마당에 나타나서 푸대접을 받는 장면 말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는 어떤 낯선 놈이기는 하나 그의 존재는 인정되는 데 반해서, 나자로는 그 부자에게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부자는 나자로에게 일체 관심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나자로가 거기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개들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개들은 나자로와 경쟁대상이었습니다. 개들은 그의 상처를 핥을 뿐 아니라 상 아래 떨어지는 음식 부스러기라도 주위 먹어 배고픔을 면하려는 그를 밀치고 다 주워 먹어 버렸습니다.

세상에서의 두 사람의 삶의 모습은 이 정도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연극으로 말하면 다음 막이 열립니다. 그 장이 바로 저 세상입니다. 거기서는 두 사람의 입장이 완전히 바뀝니다. 나자로는 천사들에게 안내를 받아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고 합니다. 유다 사람들에게 아브라함은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서 제일 명예로운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의 상징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요한복음 13장 23절과 마태오복음 18장 11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즉 나자로는 하늘나라의 만찬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특히 대접받는 자리에 앉았다는 말입니다. 이에 대해서 그 부자는 '하데스'에서 고통을 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성서에는 '하데스'라는 말과 '게헨나'라는 말이 있는데, '게헨나'는 마지막으로 저주받은 자리로서 우리말로는 '지옥'이라고 번역하며, '하데스'는 게헨나에 이르기 전에 무한한 고통을 받는 중간지점입니다. 이것은 우리말로 '연옥'이라고 번역합니다. 그는 이글거리는 불구덩이에 던져졌으나 타죽지 않고, 타는 고통만 계속 당하고 있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손가락에 물을 찍어 순간이라도 혀를 시원하게 해달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이 부자가 저 세상에 가서 나자로를 알아본 것을 보면 그가 지상에서 향락을 누릴 때 나자로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며 애걸했는지를 본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는 나자로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안하무인(眼下無人)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하는 말입니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나자로를 보내어 잠깐이라도 타는 혀를 적시게 해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살아 있을 때에 너는 좋은 것을 다 받았고 나자로는 나쁜 것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지금 여기서 위로를 받고 있으며 너는 거기서 고통을 받고 있다(루가 16, 25).

이것은 그 에집트의 이야기와 정반대입니다. 이 세상의 삶이 연장 되는 곳이 '타계'(他界)가 아니라 역전되는 데가 '타계'라는 말투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은 아브라함을 포함한 누구도 수정이나 변경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수렁이 놓여 있기 때문에 여기서 네게 건너가려 해도 가지 못하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오지도 못한다"는 말이 바로 이를 말합니다. 큰 수령은 뛰어 넘을 수 없는 '균열' 또는 '심연'이라는 뜻입니다.

부자는 그러면 나자로를 지상에 보내서 이 사실을 그의 형제들에게 알려서 자기 같은 운명에 빠지지 않도록 해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애걸은 거절되고 맙니다.

예수는 언제나 천지개벽(天地開闢)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는 혁명입니다. 기존의 관념이나 질서 따위를 뒤집어 엎습니다. 그는 겨자를 보면서도, 떡반죽을 보면서도, 부자를 보면서도 혁명을 생각했습니다. 또한 일반에게는 생각 없이 전해지는 이야기에서도 생각했기에 그 결과를 뒤집어놓습니다. 가난과 병에 시달리는 한 거지를 보면서, 그는 철저히 그들을 소외시키는 부자들을 연상하면서 또 한 번 혁명을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는 거지를 보면서 연민의 정을 갖고 '적선'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바로 기존사회의 모순을 직시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 이야기로 무엇을 알리려고 했을까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먼저 묻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왜 거지 나자로가 저 세상에서 그렇게 환대를 받았는가', '천사에게 안내를 받아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까닭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단지 그가 거지로서 이 세상의 온갖 고통을 다 짊어지고 굶주림에 허덕이다 죽었다는 것 외에 다른 표현은 없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그가 의로운 사람이었다거나 또는 독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등 하여간 그를 미화하거나 특별한 대우를 받을 만한 공로가 있는 사람으로 단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구원을 공로사상과 결부시켜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믿고 있는 구원론을 계속 주장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그렇게 보지요. 그러나 나자로가 윤리적으로 특별히 남들보다 낫다거나 종교적으로 특별한 믿음을 갖고 신앙생활을 남달리 했다는 표현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람을 판단하는 절대기준이 된다면 다른 사람의 처지를 액면 그대로 보거나 받아들이지 않고 언제나 그 사람의 현재가 바로 그의 업적의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업보'(業報)란 말을 많이 씁니다만, 물론 자신과 관련해서는 반성의 좋은 도구가 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남에게 적용시킨다면 기뻐하는 사람을 보면 그 기쁨을 함께 나누기보다는 그의 업보라고 생각할 것이며, 반면에 어떤 사람이 바로 이 거지처럼 비참한 처지에서 고통받는 것을 보면 역시 그 고통을 나누어가지고 그를 도우려는 생각보다는 그것이 바로 그의 업보라고 생각하므로 사람을 보면서도 실은 진정으로 사람 그 자체를 보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상태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 눈으로 이 지상에서 살고 있는 부자를 보면 그의 삶을 분석하고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분별하려는 비판의 노력 없이 단지 그의 업보의 결과라고 보는 데 그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와 같이 나자로는 반드시 의로운 사람이어야 한다는 전제를 갖고 이해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이 이야기에 적용하면 지상의 나자로를 유다 사람들과 같이 보게 될 것입니다. 즉 죄를 얼마나 많이 지었기에 저렇게 처참해졌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나자로의 고통을 구약에 나오는 욥의 고통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욥은 의로운 사람이었는대 하느님이 그를 시험하려고 나자로와 비슷한 궁지에까지 몰아넣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는 나자로가 욥과 같이 의롭다는 어떤 암시조차 없습니다. 그러니 나자로가 받는 대우 하나만으로써 또 이러한 공로사상이나 업보와 같은 생각은 전부 깨뜨려버립니다.

다음으로 이 부자의 경우에도 같은 맥락에서 의구심이 생깁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이 부자가 특별히 악해서 이웃이나 종들에게 잔인했다거나 남을 무자비하게 착취했다거나 폭력으로 남의 것을 뺏었다거나 또는 반윤리적이었거나 하느님을 거부했다는 식의 특별한 비리나 악함이 전혀 지적되어 있지 않습니다. 만일 누가 그의 호화로운 생활을 비판한다면 내가 악착같이 돈을 벌어 내 삶을 향유하기로 무슨 잘못이냐고 해도 공로사상 따위로 모든 것을 보려는 사람은 할 말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그를 불구덩이에 처넣고 견딜 수 없는 처참한 고통의 나날을 보내게 합니다. 나자로의 손끝으로 물 한 방울을 찍어 자기 혀를 시원하게 해달라고 애걸복걸하는 그의 모습은 나자로보다 더 비참합니다. 이 같은 형벌이 모든 사람에게 당연한 것이라고 받아들여지려면 지상에서의 그의 행적에서 악한 면이 더 크게 부각됐어야 설득력이 있을 것입니다. 대개 응보사상을 담은 민담은 예의없이 극단의 흑백논리로 악함과 선함을 대치시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더 놀라운 것은 한때 부자이던 그가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애원할 때 아브라함이 말하는 내용입니다.

아들아, 돌이켜 생각해보아라. 네가 살아 있을 때에 너는 좋은 것을 다 받았고 나자로는 나쁜 것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지금 여기서 위로를 받고 있으며 너는 거기서 고통을 받고 있다(루가 16, 25).

어느 한 구석 부자였던 이 사람을 책망하거나 그의 잘못에 분노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대목에서 일반 민담이라면 '이놈, 너 같은 놈이 감히 나를 아버지라고 해?' 하고 격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는 그것을 순수하게 받아 "아들아!" 하고 반응합니다. 그리고 그의 죄과나 잘못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고 단지 사실만을 지적합니다. 그것은 '너는 세상에서 충분히 즐겼고 좋은 삶을 다 누렸으며 나자로는 가장 괴롭고 비참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여기서 그렇게 비참한 삶을 보낸 나자로가 지상에 있던 너처럼 행복하게 만찬을 즐기게 되었고 너는 지상의 나자로와 같이 고통을 받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옮겨짐으로써 그들의 위치가 바뀌었을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냉담하다면 너무나 냉담하고 친절하다면 너무나 친절한 대답입니다.

마태오복음에서는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받기 위해서 거리에 나서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소리내어 기도하거나 자랑하듯 남을 구제하거나 그의 믿음을 시위하기 위해서 일부러 세수도 하지 않고 머리도 빗지 않은 채 동정을 살 만한 모습을 하는 사람들에게 책망 대신에 그는 "이미 자기 받을 것을 다 받았다"(마태 6, 2516)는 판결을 내립니다. 이 이야기에서의 아브라함의 대답은 바로 그와 같은 것입니다. 누가 그에게 새삼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원하는 대로 됐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자기 운명을 결정했다는 말이지요. 바꾸어 말하면 '너는 지상에서 원하는 것을 다 이루지 않았느냐. 그러면 그것으로 된 것이 아니냐'입니다. 여기서도 역시 공로사상이나 응보사상 같은 것을 무시해버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는 그 사실을 알리려는 목적만 갖고 있을까요? 그렇게는 볼 수 없습니다. 부자와 나자로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을 쪽은 역시 부자일 것입니다. 자기의 부가 어떤 수단으로 이루어졌든지 간에 저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는, 나는 나만 즐길 권리가 있다는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충격이 될 것입니다. 어쩌면 그는 종교생활의 의무도 착실히 하고 남을 해치지도 않은, 덕이 있는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 것으로 나 홀로 즐길 권리를 누구도 침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누구도 그 권리 주장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연옥에 빠져서 홀로 고통에 시달리면서 지상에서 그 존재마저 깡그리 무시했던 나자로와 관계를 맺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는 지상에 있을 때 놀부처럼 눈길 하나 주지 않던 형제와 관련을 갖고 싶어해도 이미 자기가 파놓은 함정이 너무 깊어서 전혀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 부자와 같은 삶을 자명한 것으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서운 경고를 주고 있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내가 가진 것은 내 것이라는 권리의식에 갇혀서 고통받는 이웃을 볼 수 없는 부자들에게 종말이 오기 전에 네 삶이 어떻게 변화해야 할 것인지를 말하려는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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