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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뜻밖의 심판의 기준

인자가 모든 천사를 거느리고 영광중에 와서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아놓고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별하듯이 그들을 구별하여 양은 그의 오른편에 염소는 그의 왼편에 둘 것이다. 그때 임금이 자기 오른편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라.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했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주었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의인들은 '주여, 우리가 언제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했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고, 언제 병 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우리가 찾아갔습니까?'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때에 임금은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내게 한 것이다' 하고 말한 다음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사자들을 위하여 준비한 영원한 불속에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었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아주지 않았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주님, 주께서 언제 굶주리셨거나 목마르셨고 나그네 되셨거나 헐벗으셨으며 병 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셨던 일이 있었기에 우리가 알고도 돌보아드리지 않았습니까?'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때에 임금은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중에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겠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다(마태 25, 31~46).

'세계심판'이라는 이름으로 마태오에서만 볼 수 있는 이 이야기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유목사회입니다. 심판의 현실을 목동이 양을 치는 현장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목동은 많은 양때를 거느리고 초원을 찾아, 갈 수 있는 모든 곳을 헤맵니다. 계절과 지형에 따라서 목초가 나고 안 나는 때와 장소가 있기 때문에 목동은 양을 살리기 위해 사실상 집을 떠나 언제나 양과 더불어 초원을 찾아다니는, 순례자와도 같은 생활을 해야 합니다. 양만 기르는 것이 아니라 염소도 함께 기릅니다. 낮에는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훈련된 개들과 더불어 양과 염소를 특별히 구별하지 않고 같이 몰고 다니며 풀을 뜯게 합니다. 말하자면 낮에는 아무런 차등을 두지 않고 똑같은 조건에서 그들을 보살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녁이 되면 공기가 쌀쌀해지므로 달리 취급해야 합니다.

양은 털이 많아서 덜 추워하는 반면 염소는 털이 적어 양보다 추위를 더 탑니다. 그런가 하면 양은 염소보다 맑은 공기를 더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어두워지면 둘을 갈라서 취급해야 합니다. 양과 염소는 털빛이 흰 색과 검은 색으로 뚜렷이 다르므로 구별하기는 쉽습니다. 염소는 바람막이가 잘된 따뜻한 울타리에 몰아넣고, 양은 비교적 공기가 잘 통하는 울타리로 모이게 합니다. 값으로 치면 양이 훨씬 비싸지만 목동의 눈에는 그런 구별이 없습니다. 단지 그들의 생리에 맞게 보살필 뿐 쏟는 정은 모두 같습니다.

목동과 양의 관계는 상당히 친밀하다고 합니다. 물론 일년 내내 함께 있는 탓이기도 하지만 목동의 애정과 보호하려는 노력이 짐승들에게까지 전달되어 또한 목동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 양이나 염소떼들은 대열에서 멀리 이탈했다가도 목동이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쉽게 알아듣고 곧 달려온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바로 목동이 낮에는 함께 사육하므로 아무런 구별을 하지 않다가 밤이 되면 염소와 양을 갈라놓는 데서 심판의 현실을 표현하는 소재로 삼은 것입니다.

인자(人子), 원문대로 하면 사람의 아들이라는 존재가 심판석에 앉습니다. 그 앞에는 어느 민족이랄 것 없이 모든 민족이 다 모였습니다. 심판자는 목동이 양과 염소를 밤에 갈라놓듯이 오른쪽과 왼쪽으로 갈라놓습니다. 가르는 기준은 심판자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양과 염소는 누구라도 털빛으로 그 기준을 알 수 있으나, 사람은 겉으로 보아서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유다교인들 같으면 오른쪽 사람들은 율법을 잘 알고 지킨 사람들, 왼쪽 사람들은 율법을 전혀 모르거나 그것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윤리도덕론자들은 한 쪽은 패륜의 무리들이고 다른 한 쪽은 윤리나 도덕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진실한 사람들이라고 단정할 것이며, 종교인이면 신심(信心)에 따라 구별됐을 것이라고 판정할 것입니다. 그리고 특히 그리스도인이라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금과옥 조같이 받들고 있기 때문에 한 쪽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 쪽은 이를 믿지 않거나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일 것이라고 짐작해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자의 논고와 판결은 너무도 예상을 '빗나간' 것이었습니다.

심판자는 오른쪽 사람들에게,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아"라는 최고의 약속과 축복을 한 다음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했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왼쪽 사람들을 향해서는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사자들을 위하여 준비한 영원한 불속에 들어가라" 하고 선언한 다음 그 이유로 바로 축복받은 이들이 한 일들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로써 그 심판기준이 위에서 예를 든 여러 부류들의 짐작을 완전히 뒤집어엎는 전혀 새로운 내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충격적인 것입니다. 더군다나 교리에 흠뻑 젖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는 일종의 허탈감마저 안겨줄 것입니다. 그들이 구원의 조건이라 믿는 어느 한 가지도 그 기준에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이 기준이라면 '하느님', '그리스도', '믿음', '속죄' 따위는 구원에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 아니냐는 회의를 불러일으킵니다. 따라서 사람은 아래와 같은 물음을 제기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아닌 자로서 가난한 자와 눌린 자를 위해서 싸우는, 휴머니즘에 뿌리를 내린 인권운동가들도 당연히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인가고.

충격적인 심판기준 말고도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심판자는 내가 주렸을 때에, 목말랐을 때에, 나그네 되었을 때에, 헐벗었을 때에, 병 들었을 때에, 그리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마실 것을 주었으며, 자기 집으로 영접했으며, 입을 것을 주었고, 병 간호를 했으며, 옥중에까지 찾아왔었다고 했는데 축복받은 자들이나 저주받은 자들에게서 한결같은 것은, 자기들은 전혀 그런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둘의 차이는 있습니다. 축복받은 사람들은 "주여 우리가 언제"라고 하며 그들 자신이 그런 일을 한 일이 없다고 부정하는 반면, 저주받은 사람들은 "주님, 주께서 언제"라고 하며 우리에게는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항변 섞인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오른쪽 사람들은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예수의 뜻을 잘 실천한 사람들로서 자기들이 가난하고 억눌린 삶을 돕는 것을 어떤 공로의식과 관련시키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였지만, 저주받은 사람들은 만일 우리가 그것을 알았더라면 으레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습니다. 설령 그 일을 했더라도 공로사상에서였을 것입니다.

에집트의 『죽음의 책』에도 심판에서 축복받은 사람들의 공적이 열거됩니다. 무슨 목적으로 그런 일을 했느냐는 물음에 심판자인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 이야기와 큰 차이를 보입니다. 이들이 사람에게 한 일은 실은 사람들을 위해 한 것이 아니라 신을 기쁘게 하는 도구로 사용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여기 이 이야기에서는 수난당한 자들 자체를 위해서 했습니다.

여기서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숨겨졌던 비밀이 공개되었다는 사실, 곧 가난하고 굶주리고 헐벗고 수난당하는 사람들과 심판자 자신이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 자세는 기본적으로 다르나 "주님, ……" 하고 되묻는 양쪽사람들에게 심판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중에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마태 25, 45).

이 말을 적극적인 표현으로 바꾸면 '바로 저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한 것이 바로 내게 한 것이다'라는 선언입니다. 유다교에서도 선한 일을 열거할 때 이런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주었다"라는 내용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고 오직 여기에만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예수의 시선에 다시 관심을 가져봅시다. 예수의 뇌리에는 언제나 '심판'이 깊숙이 자리잡고 있음이 여기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소재를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뛰어 넘어 신비한 세계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의 일, 그것도 사람들이 별로 거들떠보지 않는 목동의 일에서 그 소재를 찾은 것은 다른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너무도 민중적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목동이 바로 심판자요, 심판자가 바로 목동이라는 연상도 가능하게 합니다.

예수의 이야기를 묵시문학과 비교하면 이런 점에서 너무도 엄청난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양과 염소 무리에서 다양한 인류를 보았고, 목동의 작업에서 심판자가 할 일을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는 이 세상과 저 세상, 사람의 세계와 신의 세계가 이원론적으로 구별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통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그 또한 그렇게 살았습니다. 일개 목동이 하는 일의 한 단면에서 세계심판의 현실을 꿰뚫는 것은 예수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시각입니다. 그는 장차 올 세계, 그 자신도 일러 "하느님의 세계"라고 한 그 나라도 사람의 일상생활과 단절된, 어떤 신비로운 경험으로 둘러싸인 세계가 아니라 사람이 살고 있는 바로 이 현실 한가운데서 일어나는 잡다한 일들 중에서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에게는 애당초 '위에서 아래냐? 아래서 위냐?', '종교적 체험이냐? 세속적인 체험이냐?'라는 따위의 질문이나 사고를 유희할 자리가 없습니다.

아마도 그는 그때에 범람하고 있는 배고픈 자나 헐벗은 자나 거처할 곳이 없는 자들이나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자들을 보고 만나면서 그들의 고통을 나누어 짊어졌을 것입니다. 만약 그가 한낱 구경꾼이었다면 저들을 그 고뇌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사람이 해야 할 일차적인 일이며 최후의 심판도 이것을 기준으로 이루어져야 된다는 신념을 이렇게 극명하게 선언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 풀이 첫머리에서 이 이야기의 특별한 위치를 말했습니다. 이것은 특히 마태오복음의 전체적 흐름에서 볼 때 눈에 띌 만큼 고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예수의 것이 아니고 예수 이후의 것으로, 예수의 이름을 빌려 예수의 뜻의 일면을 강조한 이야기일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특히 수난당하는 민중과 자신을 격의 없이 동일화한 갈릴래아에서의 예수의 행태는 이러한 비유가 예수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가장 주목할 만한 예입니다. 그는 기회만 있으면 죄인으로 낙인 찍힌 사람들과 아무런 조건 없이 가장 가까운 공동체를 의미하는 식탁을 함께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들, 소외된 자들, 이른바 유다교에서 죄인으로 규정한 자들을 위해서 세상에 왔다고 선언하는가 하면 갈릴래아의 민중들에게 "너희를 맞아들이는 것이 나를 맞아들이는 것"(마태 10, 40)이라고 했듯이 저들을 객체로 보지 않고 자신과 동일시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렵고도 중요한 물음을 던져야 하겠습니다.'이 심판자는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 이야기 처음에서는 '사람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란 구약에서 두 가지 뜻으로 쓰였습니다. 하나는 자기를 겸손하게 부르는 말로 에제키엘 같은 사람은 줄곧 자기를 그렇게 불렀습니다. 이에 대해서 심판의 주역으로서 '사람의 아들'이라고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다니엘서에 그런 특수한 존재가 등장합니다. 예수도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을 자주 썼는데 역시 두 가지 뜻으로 사용했습니다. 하나는 자신을 가리킬 때에 쓴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삼인칭으로 장차 심판을 담당할 이를 지칭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은 어디까지나 겸손의 표현이었습니다. 만약 그 말이 '메시아'라는 의미를 포함했다면 오히려 제자들이 그를 '인자'(人子)라고 불렀어야 할 터인데 그런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자는 모든 천사를 거느리고 영광중에 와서 영광의 보좌에 앉는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보아서 심판자로서의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썼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그 이름이 바뀌어서 '임금'이라고도 합니다. 34절, 40절에 심판자를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관서 그 어디에도 인자를 '왕'이라고 대칭한 데는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제자들 또한 예수를 왕이라고 부른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자라고 불렀건 왕이라고 불렀건 이 이야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심판'입니다.

그리고 심판자가 "내가 주렸을 때에" 운운하는 것은 심판자로서의 인자나 왕이라는 개념으로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굶주린 왕, 굶주린 천사를 거느린 인자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인자로 불렸거나 왕으로 불렸거나 심판의 기준을 천명하고 '수난당하는 자신에게 어떻게 했느냐' 하는 것을 심판의 기준으로 삼는데, 바로 '그 수난자가 자신이었다'라는 비밀을 밝히는 것으로 보아 이 이야기의 주인인 예수 자신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옳은 판단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는 신이라고 자처하지는 않았으나 마치 신에게서 전권을 이양받은 자처럼 행동했다고 했는데, 여기에서도 비록 영광 속에 인자를 등장시키고 임금의 이름을 동원하나 예수 자신은 마치 신에게서 전권을 이양받은 자처럼 역사 안에서 민중과 더불어 살며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였고 이 심판이 바로 그러한 선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면 심판의 주역은 바로 수난당하는 민중 자체라는 결론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결론은 이 이야기에서 심판자 자신의 말도 그렇거니와 예수의 행태 전체에서 뒷받침된다고 하겠습니다.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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