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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을 계속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울타리를 치고 포도 짜는 확을 파고, 망대를 세우고 포도원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먼 길을 떠났다. 포도 따는 철이 되자 주인은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어 소출 가운데서 얼마를 세로 받아오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종을 잡아 때리고 빈 손으로 돌려보냈다. 주인은 다시 다른 종을 농부들에게 보냈다. 그랬더니 그들은 그 종의 머리를 때리며 모욕했다. 그래서 주인은 다시 다른 종을 농부들에게 보냈다. 그랬더니 그들은 그 종을 죽여버렸다. 이 밖에도 더 많은 사람을 보냈다. 그랬더니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여버렸다. 이제 주인이 보낼 수 있는 사람은 사랑하는 외아들 하나뿐이었다. 마지막으로 주인은 아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며 '그들이 이 내 아들이야 존경하겠지!' 하고 말했다. 그러나 농부들은 서로 말했다. '이 사람은 상속자다. 자! 죽여버리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를 잡아 죽인 다음 포도원 밖으로 내어던져 버렸다. 그러니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와서 농부들을 죽이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맡길 것이다"(마르12, 1~9/ 병행 마태 21, 33~46; 루가 20, 9~19).

이 이야기의 장(場)은 또다시 포도원입니다. 포도원의 규모로 보나 많은 종들을 거느린 것을 보아 그 주인이 큰 재산가임을 짐작케 합니다. 그는 어떤 땅을 포도원으로 개간하고 밤이면 침범하여 밭의 곡식을 짓밟고 뿌리까지 뽑아버리거나 달린 열매들을 먹어버리는 들짐승들 때문에 울타리를 쳤고, 포도를 딴 다음에 포도를 짜는 '확'이라는 기구도 장만할 뿐만 아니라 침범자를 감시하기 위해서 망대까지 세우고 농부들과 소출에 대한 분배계약까지하고 돌아갔습니다. 주인으로서는 일단 만반의 준비를 했다 하겠습니다. 이윽고 추수기가 되어 주인은 종을 보내어 계약대로 추수한 것에서 주인 몫을 찾아오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저들은 주인이 보낸 종들을 사정없이 때리고 빈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주인은 수 차례 되풀이해서 다른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폭행은 더 심해지고 마침내는 죽여버리기까지 했습니다. 마침내 이 주인은 지금까지의 방법을 바꾸어야만 하겠다는 생각을 골똘히 하다가 하나 밖에 없는 자기 아들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결정하면서 그는 이렇게 추측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이 내 아들이야 존경하겠지!"

이 말 속에는 '저들이 아무리 악하기로서니 내 아들에게까지 손을 댈 수야 없을 것이다'라는 자신감이 배어 있습니다. 이때까지 주인의 자세는 상당히 참을성이 있고 관대한 사람으로 부각됩니다. 그런데 주인의 추측은 어처구니없이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마지막 수단은 역효과를 냈습니다. 마지막으로 온 그가 주인의 외아들 임을 안 농부들은 아버지의 권위를 대신하는 존중해야 할 사람으로 보지 않고 단순히 이 포도원의 상속자로 본 것입니다. 즉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물질적 이해관계에서 그를 자신들의 마지막 방해자로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저를 죽이고 포도원 밖에다 내던져 버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야수들의 밥이 되게 하여 흔적도 남기지 않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그를 죽이기로 의논했던 말 한마디가 우리의 관심을 끕니다. 그것은 "이 아들을 죽여 버리면 그 유산이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 말에서 그 상황을 상상할 수 있는 열쇠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우선 포도원 주인은 그 지방에 살지 않고 먼 외지에 생활근거를 둔 사람 같습니다. 그러므로 저들이 그 같은 모험을 할 수 있었겠지요. 사실 그가 쉽게 올 수 있는 처지였다면 그런 반란이 연거푸 일어나는데 자신이 직접 왔을 것입니다.

갈릴래아 지방은 비옥하다고 소문났지만 '암 하 아레츠'라고 불리는 기층민중이 많기로도 유명합니다. 그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은 부재지주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부재지주란 물론 갈릴래아의 농민이 아닌 지주인데, 그중에는 로마의 세력을 등에 업은 권력층, 헤로데 왕가를 등에 업은 자들, 그리고 다른 지역의 부호들입니다. 예루살렘시에만도 갈릴래아 지방의 지주들이 상당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갈릴래아 민중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젤롯당이 봉기하여 예루살렘을 점령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채무장부부터 찾아내어 불 질러버린 일이었습니다.

당시의 다른 기록에 따르면 갈릴래아 지방의 외국인 부재지주도 상당히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된 연유는 갈릴래아가 크게 보아 로마 판도에 속한 지역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들 마음대로 마치 자기 물건을 필요에 따라 남에게 어떤 조건으로 나누어주듯이 외국 사람에게 소유권을 주었을 수도 있고, 또 갈릴래아 지방은 특별히 신흥제국들이 팔레스틴을 침략했을 때 너도나도 침을 삼키는 바람에 이리 찢기고 저리 찢기면서 지배권이 여러 제국의 손에 넘어가는 통에 법적으로 땅의 권리를 갖게 된 외국인들이 많았습니다.

그중 한 가지 대표적인 예를 들면 로마가 팔레스틴을 점령하기 이전에 희랍의 알렉산더 대왕의 세계원정을 계기로 에집트나 시리아 등 팔레스틴에 주둔했던 저들이 그대로 현지에 눌러앉아 새로운 나라를 세웠는데, 그중에 에집트를 중심으로 형성한 나라가 프톨레매오 군주국입니다. 주전 300년경에 그 나라의 재무를 담당한 사람이 갈릴래아 지방에 거대한 땅을 차지하고 포도원을 재배하여 포도주를 만들어 자기 나라 에집트로 대량 수송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저들은 그 땅에서 철수한 후에도 여전히 토지소유권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그러므로 갈릴래아 지방의 민중들은 특히 외국인 부재지주들을 증오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서 땅을 뺏는 것을 민족적인 차원에서도 애국적인 행동이라고 자부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당시는 이미 갈릴래아 지방에 '젤롯당'이라고 이름한 게릴라 부대들이 활약하고 있을 때입니다. 저들의 일차적인 적(敵)은 당대를 지배하는 로마제국이었지만, 민족주의로 무장한 저들이었기 때문에 외국인 부재지주를 적대시하지 않았을 까닭이 없습니다.

이 이야기 안의 농민들의 행동은 예수의 이야기에서 드물게 보는 농민반란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 당시에 농민들이 이렇게 폭력적인 반란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은 젤롯당의 사주를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추측이 맞는다면 이 이야기는 어느 때인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소재로 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비유가 그렇듯이 이 이야기는 어느 때 일어난 그 일을 단순히 회고만하는 것일 수 없고, 무엇인가를 비유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이 당시 예수는 정치적 차원에서 볼 때 좁은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의 활동의 현장은 갈릴래아입니다. 또한 갈릴래아는 그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갈릴래아는 지역적으로 보면 구(舊)북이스라엘에 속했습니다. 다윗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병합하여 한 나라를 이루어 솔로몬시대에까지 통일국으로 이어왔으나 그 둘 사이에는 언제나 전통적, 정신적 갈등이 이어져왔습니다. 다윗은 이 두 진영의 형평을 위해 노력했으나 솔로몬왕은 완전히 유다 중심주의로 선회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을 남유다국의 중심에 두고 구(舊)이스라엘에 속한 사람들은 제도적으로나 행정적으로 완전히 배제해 버렸습니다. 갈릴래아 지방은 예루살렘에서 상당히 먼 주변지역으로서 외세가 침범할 적마다 가장 수난을 당했는데 그것은 팔레스틴에서 그중 좋은 땅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변두리 지방이라고 유다국이 소홀히 한 탓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갈릴래아 지방은 계속 주인이 바뀌는 역사를 600년간이나 지속했는데,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다 지방 사람들은 갈릴래아 지방민을 멸시하는 뜻으로 '이방인의 땅 갈릴래아'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비운의 역사를 안은 갈릴래아에서 자라난 예수에게 자기가 밟고 다니는 이 갈릴래아 땅의 운명에 대해서 무심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권력자나 부재지주들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농토가 없는 무수한 '암 하 아레츠'들이 생존권을 위해서 집단적으로 입산하여 도적떼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들을 규합하고 의식화한 것이 젤롯당입니다. 이들은 단순한 생존권을 넘어서서 민족적인 과제를 자각하게 되었는데, 이 의식의 뿌리를 야훼신앙에서 찾았습니다. 저들은 폭력도 불사했습니다. 예수가 이들에 대해서 무심했을 까닭이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양식 있는 사람들은 저들의 운동에 가담하지는 못하더라도 그 동기에는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직도 로마의 세력이 시퍼렇게 살아 있어 노골적으로 반 로마감정을 노출시킬 수는 없었겠지만 어떤 형태로든 저들과 접촉을 가졌으리라는 상상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예수의 제자 중에 한 사람이 젤롯당 출신이었음을 밝힌 것도 있고, 베드로의 다른 이름인 '바요나'가 '칼을 쓰는 사람'이라는 의미도 지닌 것을 감안한다면 그도 젤롯당에 속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를 배반한 가리옷 사람 유다라는 수수께끼의 인물도 젤롯당에 속했던 사람이거나 적어도 그들을 동조하는 사람으로써 바로 예수에게 그러한 운동을 기대했다가 실망하고 배반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발음하기에 따라서는 그 당시에 반로마 비밀단체로서 언제나 비수를 품고 다니며 암살을 전문으로 하는 '시카리'와 비슷하여 이 혐의를 더 짙게 해줍니다. 이런 사실로 보아서 예수가 표면적으로 젤롯당에게 어떤 자세를 취했는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지만 지금 우리가 음미하고 있는 이 이야기가 이방세력에 대한 민중 반란사건이며 젤롯당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면 이런 사건에 예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젤롯당과 길을 달리했습니다. 목표가 달랐던 것입니다. 젤롯당은 눈앞에 보이는 로마 또는 그에 동조하는 민족반역자들을 제거하는 것을 최고목적으로 삼았지만 예수는 차원이 더 높고 근본적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는 우선 폭력을 반대했습니다. 새 세계의 도래를 기대한다는 면에서는 다르지 않으나 폭력을 궁극적인 해결의 길이라고는 보지 않았습니다. 아니, 폭력은 폭력을 부르는 악순환만 계속되어 비극의 역사를 연장할 뿐이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라는 예수의 경고가 이런 측면을 보여주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처한 협곡(峽谷)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와 같은 흔한 사건을 소재로 하면서 그가 지향하는 바를 비유를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부재지주, 특히 자기 땅을 점유한 외국인에 대한 증오심은 이 이야기의 시작에서부터 불붙을 수가 있습니다. 특히 땅이 없는 민중에게는 더욱 그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전례를 전제하면서도 포도원 주인의 인내심과 관용을 그 농부들의 폭거와 대조시키면서 점점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처음에 보낸 종들에게 부당한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이행하도록 전권을 주어 보냈는데 저들은 그를 구타하고 약속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이러한 농부들의 행동에 대해 분노했다거나 옹징하겠다는 여운을 남기는 말 한마디 없이 또 다른 종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농부들은 좀 더 심하게 머리를 구타하며(이것은 사람을 치명적으로 상하게 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모욕을 주었습니다. 모욕을 했다면 옷을 벗겨버릴 수도 있고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퍼부었을 수도 있으며 목에 어떤 죄목을 달아주고 사람들 앞으로 끌고 다니며 모욕을 주고 빈손으로 돌려보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주인은 여전히 화내지 않고 전과 똑같이 또 다른 종을 보냈습니다. 이쯤 되면 듣는 자는 서서히 부재지주에 대한 감정은 사라지고 이 농부들의 행동이 지나치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그런데 이 농부들은 지난날의 자기들 행동이 지나쳤다는 반성은 고사하고 주인의 관용도 깨닫지 못하고 더 흥분하여 이번에는 그 종을 아주 죽여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청중은 부재지주에 향했던 감정을 이 농부들에게로 돌리고 맙니다. 해도 너무한다는 감정을 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의 관용을 굽히지 않고 참을성 있게 똑같은 일을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이 밖에도 더 많은 사람을 보냈다. 그랬더니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여버렸다"라는 표현에서 이 주인이 얼마나 저들의 뉘우침을 기다리며 참았는지를 잘 드러냅니다. 이제 보낼 만한 종은 다 보내보았고 남은 일은 자기 아들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청중은 마침내 불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부재지주를 증오하는 마음으로 들었대도 이 지주의 아들만은 해치지 않을 것을 기대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농부들은 더욱 잔인해졌습니다. 이미 위에서 말한 대로 지주의 아들이기에 존경하기는커녕, 이해득실만을 따져 저를 마지막으로 제거해야 할 장애물로 본 것입니다. 저들은 그를 죽인 다음 포도원 밖으로 내버렸습니다. 이로써 이 농부들의 반란은 안하무인의, 단지 소유를 위한 폭거라는 것이 입증된 셈입니다.

그리고 나서 주인이 어떤 반응을 했다는 것을 진행하는 대신 "그러니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와서 농부들을 죽이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맡길 것이다"라고 묻고 필연적인 결과를 예고합니다.

갈릴래아의 민중은 그것이 무엇을 비유하는지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마르코복음은 이 이야기의 현장을 예루살렘의 성전 뜰로 삼고 있으며 청중은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 장로 즉 유다 민족의 최고층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 끝에 그들은 이 비유가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알고 예수를 잡으려고 했습니다"라고 합니다. 요컨대 이 비유는 바로 유다 역사에서 권력층의 죄상을 힐책한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종으로서 유다 사회에 계속 보내졌습니다. 그들은 저들의 죄상을 비판하고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지킬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권력층은 계속 저들을 모욕하거나 구타하고 투옥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죽여버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긴 역사가 반복돼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마치 저들의 폭거를 모르는 듯 거듭 예언자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유다 민족 지도층들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채 똑같은 불의와 항거를 계속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사랑하는 아들에게 전권을 주어 보냈는데 그 마저 죽여 포도원 밖으로 내버렸습니다. 바로 이 말을 하고 있는 현장에 선 이들이 그 후예들입니다. 저들도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 농부들은 오랫동안 포도원 주인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것을 보고 마지막으로 보낸 상속자인 아들을 처단함으로써 지주를 제거해 버리고 자기 땅을 삼듯이 신을 전제로하지 않고 신의 이름을 빌려 민(民)에 군림하는 위선자였습니다.

이제 다시 생각해야 할 점이 두 가지 남았습니다. 하나는 그 부재지주가 하느님을 상징한다면 듣는 사람에게 거부감을 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종종 그런 기준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있는 사실 혹은 민중들이 아는 사실을 전제로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주가 아니라 그의 참을성입니다. 다음의 문제는 예수가 이야기를 했다면 자신이 예언자와는 다르게 하느님의 외아들임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살아서 하는 이야기에서 그가 죽임을 당할 것을 이야기 속에 포함시킬 수가 있었겠나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어디서고 자신을 하느님의 외아들이라거나 그런 암시조차 비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후에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에 대해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부분은 교회에서 예수의 이야기에 덧붙인 부분이라는 많은 견해에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빼고도 이 이야기의 목적은 뚜렷합니다. 하느님은 계속 참고 또 참으면서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저들에게 관용을 베풀고 있으나 결국에는 꼭 심판을 이루고야 만다는 것을 천명하는데 있습니다.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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