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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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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겨자씨 이야기

하늘나라는 마치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모든 씨 가운데 가장 작은 것이지만 자라면 어떤 푸성귀보다 더 커져서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된다(마태 13, 31~32).

사람은 같은 일을 계속 반복하다보면 그 일 자체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그가 일하는 대상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져서 무관심해지기 쉽습니다. 농부라고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농부는 매년 거의 똑같은 일을 반복합니다. 그의 일터는 '땅'이고 그가 가꾸는 것은 '곡식'입니다. 그에게 걱정이 있다면 하늘이 때맞추어 비를 내리고 햇빛을 비춰주느냐 하는 것이고, 그 외의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명한 것으로 보아 넘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노동자와 비교해 보면, 농부의 생활이나 그가 경험하는 바는 아주 다른 차원일 수 있습니다. 가령 집을 지을 때 마장이나 벽돌을 쌓는 노동자가 하는 일은 시멘트와 모래를 적당히 섞어 그것을 문질러 벽을 만들거나 얹어놓고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올리는 것입니다. 건축사는 그 집이 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성취욕을 누릴 수 있을는지 모르나 이 미장이는 생명 없는 물질을 매일같이 매만지고 때가 되면 임금을 받는다는 사실 외에는 별다른 기쁨이나 감격 따위를 느끼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농부는 그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는 생명을 가꾸는 신비한 일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여기 한 알의 씨알이 있습니다. 그는 밭을 갈고, 그것을 심습니다. 그리고 거름을 주고 잡초를 뽑아줍니다. 그래야만 그 씨알이 싹을 틔우고 또 자라나는 데 방해받지 않을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혼자 힘으로 그것을 자라게 하고 열매를 맺게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한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고, 열매를 맺는 우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농부는 하늘의 해와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더움과 차가움 사이에서 생기는 이슬, 그리고 사람과 자연 사이에 유통하는 기(氣)인 바람 등이 함께 협동해서 이루어가는 창조적 행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노동이 우주의 창조적 행위에 참여하는 것임을 인식하는 한 그는 저 미장이와는 아주 다른 처지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한 농부가 추수기가 가까운 어느 날, 평상시와 같이 밭으로 나갔습니다. 자기가 심은 땅의 곡식을 둘러보는 중에 겨자밭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겨자가 자기 키보다 더 크고 줄기들이 무성해져서 새들이 마치 자기들의 보금자리인 양 옹기종기 내려앉아 지저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농부는 평상시와 같이 그 새들을 쫓는 데 열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농부는 열두 자(尺) 이상이나 자라서 큰 나귀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 가려 보이지 않게 될 만큼 큰 것을 보고 새삼 충격을 받고 생명의 신비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겨자씨는 낟알 중에서도 가장 작은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 사람들은 겨자씨를 가장 작은 것의 상징으로 표현하여 '겨자씨만한 핏방울' 또는 '겨자씨만한 위법'이라는 표현을 곧잘 쓰곤 했습니다. 이 두 가지 표현을 연결시켜보면, 법정에서 자기 잘못을 변호하는 데 쓴 말 같습니다. 가령 누구에게 상처를 준 죄로 법정에 서게 된 사람이 그것이 극히 가벼운 상처였다는 표현으로 핏방울이 겨우 겨자씨만큼도 안 됐다고 하거나, 자기 잘못은 겨자씨만큼이나 가볍고 작은 것이라고 하듯이 말입니다.

하여간 이 농부는 눈에 보일락말락하는 작은 겨자씨를 자기의 밭에 심었습니다. 그렇기에 아마도 다른 곡식 낟알을 심는 것보다 더 조심스럽고 불안했을 것입니다. 그런 작은 것을 거칠게 갈아 헤친 대지에 내버리듯 심는 것도 그렇고, 더군다나 참새떼의 극성에 온전히 남아날지 자못 걱정이 되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심을 때는 습관에 젖어 그런 생각을 안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너무 작아서 '훅' 하고 불면 날아가버리는 그 낟알이 땅에 묻혀 싹을 내더니 이렇게 커져서 어느 곡식보다 더 크고 무성해져서 큰 나무에 비길 만큼 자라는 것을 보고 느닷없는 충격을 받았습니다(마태오에는 이것을 나무라고 했으나 그것은 나무만큼 크나 일년초입니다). 그렇게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던 미세한 것 속에 이렇게 엄청나게 큰 새들이 깃들일 만한 나무처럼 자랄 수 있는 생명의 위력을 간직하고 있다니! 그는 이렇게 무성한 겨자를 보면서 그 씨의 작음을 비교하곤 생명의 신비를 느꼈습니다. 그렇게 작은 것 안에 사람의 키보다 더 크고 많은 가지를 내고 무성한 잎과 꽃을 피게 해서 수십, 수백 배의 씨를 재생산할 능력이 간직되어 있다니!

이것이 또 한 토막의 예수의 이야기입니다. 위에서도 생각해 본 것처럼 이것은 예수 자신의 충격적인 경험담인지 아니면 농민들의 환희를 전달했는지 모르나 두 가지가 다 가능합니다. 하지만 일생 동안 겨자농사를 지으면서도 이런 신비한 체험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잠깐 일상에서 풀려나오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이 감격을 일반에게 다시 되돌려주기 위해 어느 농부의 감격스런 경험담을 전했거나(마태오나 루가에는 '어떤 사람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 사람은 물론 농부입니다) 아니면 그 자신이 체험한 내용을 전했는지 모릅니다.

하여간 예수는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평범하게 보아버린 사물을 레이저광선으로 쏘아서 내부를 건드리듯이, 예리한 칼끝으로 잘라 어떤 물건의 단면을 보이듯이, '일상'이라는 바다 깊숙이에서 진주를 캐내듯 날카로움과 자상함을 갖춘 관찰자이자 스승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너무나 담백하고 단순합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모든 농부들에게 일상적인 사실만을 말하는 것이고, 그 이상 혹은 그 밖의 것을 암시하는 것은 티끌만큼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알기 쉬운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예수의 말로 전해진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해도 그대로 될 것이요,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 20)를 이 비유와 직접 연결시켜 이 겨자씨를 '믿음'으로 보고, 그 믿음의 위력을 나타내는 말로써 '겨자씨만한 믿음'조차 갖지 못한 사람들을 책망하는 것이라는 해석이나, 혹은 예수의 어린 시절이 그렇게 보잘것없이 초라했는데 그가 자라서 마침내 인류를 구원하는 메시아가 되었다는 해석은 이 단순한 이야기를 소화하는 데 큰 장애물이 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 믿음은 단순하게 '신뢰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가령 사도신경의 내용 같은 것을 믿는 그런 '신조'라고 해석하면 더욱 이해하기 어렵게 되며, 우리가 보고 만질 수 있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뜬 구름 잡는 식의 이야기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는 것은 '극히 기본적인 믿음'이라는 뜻이지 이 비유의 내용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또는 이 겨자씨의 의미를 고정시키거나 이 이야기를 '교회'나 '전도행위' 등에 한정시키는 독단도 이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데 장애물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무엇을 알리려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 이야기의 머리에 단서가 있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의 성격'을 알리려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비유' 하면 "하느님 나라는 마치……"라는 형식으로 된 것이 보통이나 여기서는 표현이 약간 길고 다릅니다. 그러나 내용에는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느님 나라는 어떤 나라라는 걸까요?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만큼 지극히 작은 것으로 출발하지만 마침내는 완성되고야 만다는 사실을 알리려는 것일까요?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는 어떤 장애물이나 역사의 어떤 역류에도 불구하고 역사 안에서 성장하고 있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겨자씨만큼 지극히 작은 것이 초목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되는 것처럼 충격적으로 도래한다는 뜻일까요?

이러한 두 관점을 가지고 성서학자들은 두 갈래로 나누어져서 시비해왔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단순한 이야기를 그렇게 복잡한 이론으로 양분시키는 것은 이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새들이 와서 것들일 만큼 큰 겨자를 보고 충격을 받은 농부에게는 '성장'이나 '대조' 등이 갈라지지 않습니다. 누가 그 농부더러 '당신이 놀라는 까닭은 그것이 성장한 것 때문이냐?'라고 물어도 대답은 하나일 것입니다. 그에게는 둘을 나누어 묻는 그 자체가 대답을 가로막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이것이 '하느님 나라의 비유'라고 했을 때 그것이 어떻게 도래하든지 간에 오고야 마는 현실이라는 확신을 주는 비유 이상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 농부가 스스로 겨자씨를 땅에 심고 가꾸었지만 새삼 그 자람에 놀라듯이 또는 다 큰 자식을 보고 새삼 성인이 된 자식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고 충격을 받는 부모들처럼, 하느님 나라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도 새삼 놀라게 그렇게 도래할 것입니다.

해마다 봄이면 싹이 나고, 여름이면 자라고, 가을이면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이 반복 중에도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무가 커지고 굵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랜 세월을 인권을 위해서, 민주주의를 위해서 싸워왔습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어도 같은 불의가 되풀이되고, 수난도 되풀이됩니다. 그것이 반복되면 사람들은 흔히들 실의에 빠집니다. 그러나 한 십 년, 이십 년 전과 오늘을 비교하면 느닷없이 감탄사가 저절로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때보다 지금의 인권의식이나 민주의식이 놀랄 만큼 자랐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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