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집

전집은 OCR 스캔 잡업으로 진행되어 오탈자가 있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등록해 주시면 관리자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수정 요청을 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2. 본문을 읽는 중에 오탈자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앞뒤 텍스트와 함께 마우스로 선택합니다.
3. 그 상태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타나는 창에서 수정 후 [수정요청]을 클릭합니다.
4. 각주의 경우에는 각주 번호를 마우스오버하여 나타난 창을 클릭하면 수정요청 창이 열립니다.

※ 컴퓨터 브라우저에서만 가능합니다.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하늘나라는 마치 밭에 묻혀 있는 보물과 같다.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면 다시 묻어두고 기뻐하며 집에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 13, 44).

어떤 사람이 남의 밭에 묻혀 있는 보화를 발견했습니다. '밭'으로 번역된 원문은 '들'이라는 뜻도 있고, '시골'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이 사람이 만일 소작인이었다면 농사를 짓기 위해 그 밭을 갈아 헤치다가 묻힌 보화를 발견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고 단순히 '들'이었다면 소작인이 아니더라도 다른 목적으로 남의 들에서 땅을 파다가 뜻밖의 보화를 발견했을 수도 있습니다.

땅속에 묻힌 보화! 여기에는 어떤 숨겨진 역사가 있을 법합니다. 가령 전쟁이 자주 일어나서 보화를 가져갈 수 없게 된 사람이 땅을 깊이 파고 밀폐해서 땅에 묻었다가 언젠가 다시 돌아와 그것을 도로 파가려고 했는데, 그만 뜻밖의 사건을 만나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만일 이 이야기에서 보화를 땅에 묻은 사람이 살아 있었다면 그것을 놓아둔 채로 땅을 팔 리가 없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그 밭을 사려고'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보화를 묻은 사람은 이미 죽고, 땅 주인은 그 땅에 보화가 묻혀 있는 것을 모르는 후손들이거나 아니면 어떤 약탈자의 손에 넘어간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하여간 우리는 마치 이 짧은 이야기에서 동서양에 무수히 나돌고 있는, 보물섬을 찾아나서는 모험담을 연상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에서 땅에 묻힌 보화가 무엇인지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돈으로 따져서 값이 많이 나가는 것을 보화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보화도 있습니다. 가령 '가보' 종류라면 그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도 없고, 어떤 다른 것과 대치할 수도 없습니다. 또 그것은 그 집안에서 가지고 있는 보화이지 남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일 수 있습니다. 여하튼 일반적으로는 돈으로 환산할 수 있고, 돈만 있으면 구할 수 있는 값비싼 것을 보화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는 무엇으로도 살 수 없고 팔 수도 없으며, 무엇으로 바꿀 수도 없고 또 남에게 왜 그것이 보화인지 설명할 수조차 없는 보화도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보화는 땅에 묻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발견한 사람 외에는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보화입니다. 그것을 묻은 사람은 알지만 그는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나그네가 되어버렸거나 이 세상에서 이미 없어진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하여간 '들'이거나 '밭'이거나 간에 그 땅을 소유한 사람도 그 보물이 거기에 묻혀 있는 것을 전혀 모르는 그런 보화입니다.

땅을 파다가 이것을 발견한 사람은 그 땅을 원상태로 해놓았습니다. 즉 그 보물이 보이지 않게 다시 묻었습니다. 그리고는 기뻐하며 집에 돌아갔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한 "기뻐하며"라는 기쁨의 뜻은 절대에 가까운 그런 것입니다. 그는 그 보물을 발견한 순간 충격과 환희에 온몸을 떨었으리라고 상상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아직 그것은 자기 손에 들어온 것도 아니고 물량적으로 그의 생활에 큰 도움이 됐다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그는 그것을 발견한 사실 그 자체에 도취하고 있습니다. 비록 우연히 발견했으나 그가 일생을 두고 그리고 그리던 목적이 바로 이것 하나였던 그런 것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보화'라면 아직 기뻐하기는 이르지 않습니까? 그것은 아직 손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남의 땅에 묻혀 있습니다. 비록 그가 그 땅을 자기 손에 넣으려고 했더라도 계획에 차질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물량적인 의미의 보화라면 그것을 놓아두고 돌아가는 길에서 기뻐했다는 표현은 이치에 닿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간 그가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라는 말로 끝납니다.

만일 우리가 장사꾼처럼 이해관계에서 모든 가치를 평가하는 사람이었다면 이제부터 듣고 싶은 이야기를 중간에서 절단해 버리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만일 이해관계에서 평가된 보물이라면 그는 아무에게도 묻혀 있는 보화 이야기는 하지 않은 채 집에 돌아와서 갖고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땅을 산 다음에 보화를 파내어 판 돈으로 비로소 기쁨을 누리는 장면을 이야기해야 순서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 짧은 이야기가 감추어 둔 비밀입니다.

다시 예수에게 우리의 눈을 돌립시다. 그는 작가도 아니며 전문적인 이야기꾼도 아닙니다. 그가 하는 이야기는 자신이 경험했거나 아니면 남을 관찰했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 시대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이야깃거리를 소재로 합니다. 이 이야기는 아마 두 번째나 세 번째에 해당되겠지요. 세 번째 경우일 수도 있다는 것은 유다 라삐들의 이야기에도 이와 유사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에서도 역시 어떤 사람이 거의 쓸모 없어 버려진 남의 땅에 매장된 보물을 알아내고 그것을 사서 그 땅에 있는 보물들을 캐내어 팔아 큰 부자가 됐다는 것입니다.

횡재로 그는 대궐 같은 집을 짓고 창고마다 곡식을 그득히 채우고 남녀 종들을 부리고 온 동리사람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어 희희낙락하며 잘 먹고 잘살게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라삐의 이야기에서 그 비중이 바로 뒷부분에 있는 것을 얼른 알 수 있습니다. 즉, 횡재를 해서 물질적으로 남보다 풍요한 삶을 누렸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중심입니다. 예수의 이야기도 출발이 이와 비슷하나 바로 사람들이 제일 궁금해하는 결과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은 채 이야기를 하다가 만 것처럼 잘라버리고 맙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 보화가 물량적인 것이 아니며 또 그 기쁨이 물질적 풍요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려고 한 것일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혹은 가까운 주변사람의 경우를 말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삶이 지루하고 아무 보람을 찾지 못하는 탓에 늘 낯을 찌푸리고 그날 그날 살아갔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소유로 된 땅뙈기를 비롯해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해 버렸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가 불쌍하고 미련하게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른 그 사람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기쁨으로 차 있었습니다. 환한 얼굴을 하고 눈동자는 무엇엔가에 도취한 듯 황홀하게 보였습니다.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까닭을 물어도 그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비밀을 간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만이 이해 할 수 있고 알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고 말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한 예수는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는 물론 돈으로는 살 수 없고, 돈으로 값을 칠 수도 없으며, 다른 것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그만이 아는 것을 가슴에 안았습니다. 바로 그것이 그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이유인 것도 알았습니다. 그만이 아는 이 보화를 발견하고 가슴에 안은 그에게는 그 외의 다른 어떤 것도 대수롭지 않았습니다. 가슴에 지닌 그 보화를 위해서 다른 것들은 모두 다 남에게 주고, 버릴 수도 있는 '그'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한 송이 백합화를 들여다보며 그 아름다움과 영화로움에 감탄했다는, 사치하기로 이름난 솔로몬왕의 부귀영화를 한낱 헛된 것으로 본 예수가 이제 이 이름없는 한 사람의 가슴속에 지니게 된 무한한 기쁨을 발견하고 그 이유를 안 것입니다. 왕의 기쁨도 아니고 부호의 기쁨도 아닙니다. 한 이름없는 평범한 사람의 기쁨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왜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요? 이 이야기 역시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알려주기 위한 목적으로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가 본 하느님 나라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땅에 묻힌 보화처럼 일반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역사 안의 어디엔가에 임재하고 있습니다. 그 나라는 일반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나라의 일부라도 본 사람의 환희 속에서 그 나라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나라는 물량적으로 잴 수 있거나, 가치평가를 할 수 있거나, 또 무엇과 바꿀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나라를 맞이한 사람에게 있어 그것은 전체입니다. 그것에 참여하는 또는 그것에 참여하려는 사람에게는 그것 외의 것은 아무것도 소중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가진 것을 다 버릴 수도 있고, 남에게 주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아버지나 어머니나 자식이나 땅을 버린 사람은 여러 갑절의 보상을 받을 것이요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마태 19, 29).

이 이름없는 사람이 "기뻐하며 집에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라는 말은 이런 의미와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루가에는 "내 이름" 대신에 "하느님의 나라"(18, 29)로 되어 있습니다. 그가 돈에 눈이 어두운 장사꾼이라면 발견한 보화를 그대로 안고 돌아오지 왜 도로 묻고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 땅을 사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겠습니까? 설사 그대로 가져오는 것은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이요 밭을 사면 그 밭에 묻힌 것도 모두 그의 것이 된다는 법적 해석을 적용한다 치더라도 그가 그 보화를 보고도 못 본 듯이 도로 묻고 그 땅을 산 것은 윤리적으로 정당한 행위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랬다면 이것은 한 투기꾼에 대한 이야기가 될 뿐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 사람의 기쁨이 그런 수준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사람이 보화를 찾는 과정도 우리들이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윤리적 수준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나라가 그런 것입니다. 그것을 윤리적으로 '보다 나은 세계'라거나, 기존의 어떤 가치체계보다 월등히 낫다거나, 완전한 것이라고 상상하면 이 이야기와는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이 같은 짧고 순박한 이야기로 그 나라의 단면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전의 교사들에게서 '보물'은 '복음'이니, '기쁨'은 '예수'니 하는 단언적인 가르침에 익숙해져서 이 순박한 이야기를 그대로 인식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이해방법일 수는 있어도 절대적이라고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원(原) 이야기는 그 땅에 묻힌 보화가 '하느님의 나라'라고 하는데, 만약 이전의 교사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것이 '복음'이라면 또 그 관계를 설명해야 하는 복잡한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의미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이 경우를 우리의 생활현장 속으로 돌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장사꾼적인 잇속 때문이 아니고 내 가진 것을 다 없애버려도 아깝지 않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그런 환희를 경험할 수 있을까요?

가령 한 외아들을 가진 어머니가 병들어 죽어가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재산인 집을 팔아 마침내 그 아이를 낫게 했다고 합시다. 그때 그 어머니는 병이 나은 아이를 끌어안고 팔아버린 유일한 재산인 집 때문에 울까요, 아니면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을 다시 품에 안은 그 감격에서 희열을 경험할까요? 그런 상황 이 또다시 온다면 똑같은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그렇다고 그 아이가 꼭 이 이야기에서 말하는 하느님 나라와 직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그를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내버릴 수 있는 어머니의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사랑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요? 누가 참사랑을 잇속으로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있습니까?

명예도 재산도 다 버릴 수 있는 희열과 힘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사랑이 아니지요. 이 사람이 발견한 사랑은 그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고, 그 사람 외에는 누구의 눈에도 가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에게만 보화이지 남에게는 무의미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은 마침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합니다. 그것은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랑은 지루함도 변함도 있을 수 없습니다. 변하는 사랑, 지루해지는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영원한 사랑은 공간적 폭도, 시간적 길이도 없습니다. 즉 영원한 순간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 이름은 무엇이든 좋습니다. 내 삶 전체를 다 쏟아 부어도 아깝지 않은 그런 것을 지녔으면 그는 그것을 만날 때 땅에 감추어진 보화를 만난 이 사람의 경험을 함께할 수 있을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
텍스트를 수정한 후 아래 [수정요청] 버튼을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