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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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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밥상공동체

함께 앉았던 사람들 중의 하나가 이 말씀을 듣고 "하느님 나라에서 잔치 자리에 앉을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께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대한 만찬회를 마련하고 초청장을 많이 냈다. 만찬 시간이 되자 청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종을 보내어 '준비가 다 되었으니 오시오' 하고 말하게 했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핑계하기 시작했다. 첫째 사람은 '내가 밭을 샀는데 가서 보아야 하겠소. 용서하시오' 하고 말했다. 둘째 사람은 '내가 소 다섯 마리를 샀는데 그것들을 시험하러 가는 길이오. 용서하시오' 하고 말했다. 그 다음 사람은 '내가 아내를 맞이했으니 가지 못하겠소' 하고 말했다. 그 종이 돌아와서 이것을 모두 주인에게 보고 했더니 집주인이 노하여 종더러 '어서 동네 큰 거리와 골목에 가서 가난한 사람들과 불구자들과 맹인들과 절뚝발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하고 말했다. 종이 그대로 하고 나서 주인더러 '주인이여, 분부하신 대로 했는데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하고 말했다. 주인이 대답했다. '큰길이나 울타리 밖에 나가서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도록 해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함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는 아무도 내 만찬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루가 14, 15~24; 마태 22, 1~10).

성대한 만찬회를 마련하고 사람들을 초대했다면, 그 초대자는 큰 부자였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마태오에도 있는 것으로 보아 마태오와 루가가 함께 사용한 '이야기 묶음'에 들어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큰 줄거리는 같으나 마태오에는 그 이야기 사이와 끝에 덧붙인 부분이 확연하게 보입니다. 마태오는 그 잔치가 워낙 큰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왕의 만찬'이라고 했습니다. 루가에는 그 초청자가 왜 그런 만찬회를 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마태오에는 그의 아들, 그러니까 왕자의 결혼식 만찬회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아마 그 만찬회의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서 덧붙인 말일 것입니다.

예수의 이야기 중에서나 그의 짧은 생애에서도 함께 나누어 먹는다는 것이 기쁨을 나타내는 가장 적절한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일수록 함께 먹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습니다. 내용 없는 말의 나눔보다 있는 것을 나누어 먹는 것이 더 구체적인 기쁨과 사랑을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늘 민중과 더불어 식탁을 같이했고, 하느님의 나라를 '더불어 먹는 현실'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제자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는 마지막 밤에도 식탁을 함께했는데, 그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때에도 더불어 먹을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마르 14, 25). 그러므로 더불어 먹고 마시는 만찬장에 참여한다는 것은 가장 영광스럽고 즐거운 자리에 초대되는 것입니다.

이 주인은 우선 미리 초대장을 보낸 사람들에게 종들을 보내어 정식초대를 재확인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하나같이 그 초대를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보면 내용은 다르나 성격은 꼭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밭을 샀기 때문이고, 어떤 사람은 소를 샀기 때문이며, 어떤 사람은 아내를 맞이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당시 아내를 맞이한다는 것은 한 여자를 노동력으로 산다는 것과 꼭 같은 의미이기 때문에 이들 셋은 다 가진 것이 있기 때문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들은 산 것들을 자기 소유물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실험해보기 위해 갈 수 없다고 했는데, 그 점에 있어서도 이들 셋은 꼭 같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기득권을 주장하고 일반이 인정하는 계층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을 처음부터 초대에서 제외한 것이 아니라 그 만찬회는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학자들은 이것이 예수의 초대를 거부한 유다교 지도층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 초대를 거부하여 주인의 심기는 대단히 불편했습니다. 루가에서는 집주인이 노하였다고 하는 정도로 표현했는데, 마태오에서는 "임금은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도시를 불살라버렸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초청에 응하지 않은 사람들을 '살인자'라고 한 것으로 보아 초청장을 갖고 간 종들을 붙잡아 죽여버린 사람도 있었다는 말로 들립니다. 그러나 마태오의 이 서술은 너무나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초청자는 큰 호의를 베풀었는데 그 심부름꾼들을 폭행하고 죽여버린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거니와 초청한 왕이 그 응징으로 저들을 죽여버렸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사는 도시까지 전부 불태워버렸다는 것도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이 말은 마태오가 역사적으로 경험한 사실을 여기에 삽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구체적으로는 60년대 후반에 시작된 로마제국의 침략전이 반영된 것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다음 이야기입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어서 동네 큰 거리와 골목에 가서 가난한 사람들과 불구자들과 맹인들과 절뚝발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도 급작스러운 이변이 일어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토록 분노했던 왕이 급전하여 무조건적인 용서와 해방을 선언한 것처럼, 이 주인은 상류층을 초청했다가 그들에게 분노를 느끼고 급전하여 그들과는 대조되는 계층, 즉 가난한 사람, 불구자, 맹인, 절뚝발이와 같은 소외된 사람들을 불러오라고 합니다. 배부른 사람들을 초청해 베푸는 만찬은 향락의 장소가 될 뿐이지만 이들에게는 굶어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주는 현장으로 바뀝니다. 그러므로 만찬회의 성격 자체가 질적으로 180도 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기존 사회에서는 같은 계급 안에서 끼리끼리 모여서 서로의 관계를 더 두텁게 하고 즐깁니다. 그러나 이 주인은 그런 일반 관습에서 급전하여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초청했을 뿐만 아니라 길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억지로라도 끌어다가 그 연회장을 채우게 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예수는 상류계급의 생활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마태오대로 한다면 궁전의 분위기입니다. 이것은 예수가 평소에 관심을 기울인, 그가 사는 현장과 다른 세계에 대해서도 결코 무심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는 왕이나 부유층이 국민의 고혈을 빨아 모은 재산으로 상류계급만을 상대하여 삶을 향유하는 것을 날카로운 비판의 눈으로 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부유층은 소유로 자기의 삶을 보장하려 하고, 소유로 저울질한다는 사실을 예리하게 인식하고 있은 듯합니다.

하느님의 나라, 즉 새 세계는 바로 저 궁전 또는 저 부유한 자의 집을 귀족이나 상류층이 아니라 가난하고 병든 자들이 독점하는 때가 바로 하느님 나라 도래와 맥을 같이한다고 본 것 같습니다.

그는 기회만 있으면 가난한 사람들과 음식을 나누어 먹었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를 앞당겨 실현하는 행위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런 현실이 상류층, 나아가서는 왕실에까지 누룩이 가루 서 말 속에 들어가 전체를 부풀리게 하듯 확대되어 조용한 혁명이 이루어지기틀 기대했을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도 이른바 세속적인 소재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이야기가 언제나 그렇듯이 누구나 아는 이야기,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고 더 이상 다른 것을 생각하려고 하지 않고 주저앉아 버린 사람은 상상도 못하는 혁명적인 가능성을 꿰뚫어 그 길을 제시합니다. 이 이야기는 사람의 손이 닿을 수 없는 뜬구름 같은 이야기도 아니고, 방관자의 위치에서 하는 말도 아닙니다. 이것은 평범하고 자명한 것으로 전제해 버리는 바로 그 일상성을 찢고 청중에게 혁명의 의욕을 불러일으킵니다.

아마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리에 세뇌된 사람들이라면 이런 질문을 던졌을 것 같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나라 비유라면 그 만찬에 참여한 사람들이 그에 합당한 자격을 갖춰야 할 것이 아니냐?'라는 것입니다. 즉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의롭거나 아니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에 의해서 깨끗해진 사람들 또는 믿음에 의해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말입니다. '가난하거나 병든 것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는 없고, 더군다나 거리에 나가서 만나는 사람을 아무나 입장시키라는 것이 하느님 나라의 현실이라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와 상충되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문은 이 이야기를 읽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문제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마태오복음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덧붙여 있습니다.

임금이 손님들을 만나려고 들어갔을 때에 거기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가 있는 것을 보고, '친구여, 그대는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에 들어왔는가?' '이 사람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22, 1113).

모든 사람들에게 만찬장의 문이 열려 있었으나 그 주인은 들어온 사람들에게 예복을 입을 것을 요구했으며, 그것을 갖추지 않은 사람은 추방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맨 처음 초청받은 기득권을 가진 자들에게 이런 조건을 내세웠다면 납득이 가나 초청을 받은 일도 없고, 초청을 받았어도 그런 조건을 갖출 만한 능력이 없는 사람들, 또는 자기 길을 가던 길손들을 그대로 끌어들여 놓았으니 비록 그런 조건을 알았다고 해도 그들에게는 그럴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들어와서 이런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추방한다면 그것은 주인의 횡포 이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바로 위에서 언급한 대로 그리스도인들이 우선권을 주장하면서 불평하는 데 대한 교회 지도자들의 반응이지, 이 이야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지금껏 교회에서는 마태오의 이 마지막 말을 크게 내세워 그 만찬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믿음의 예복을 입은 자들만이라는 설교를 계속해오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한 예수의 행태가 그의 이야기 내용과 꼭 같았습니다. 그는 세상이 죄인이라고 낙인 찍은 민중들과 더불어 살며 그들의 병을 고쳐주고 무조건 그들을 환영했는데, 저들에게 과거를 묻거나 또는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라고 요구하거나 다시는 그러지 않을 것을 다짐받는 따위의 요청은 전혀하지 않았습니다. 아무조건 없는 영접만이 있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언명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나라를 윤리나 도덕, 나아가서는 기존 종교가 만든 자(尺)로 잴 수 있는 그런 현실이라고 생각하면 큰 잘못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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