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집

전집은 OCR 스캔 잡업으로 진행되어 오탈자가 있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등록해 주시면 관리자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수정 요청을 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2. 본문을 읽는 중에 오탈자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앞뒤 텍스트와 함께 마우스로 선택합니다.
3. 그 상태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타나는 창에서 수정 후 [수정요청]을 클릭합니다.
4. 각주의 경우에는 각주 번호를 마우스오버하여 나타난 창을 클릭하면 수정요청 창이 열립니다.

※ 컴퓨터 브라우저에서만 가능합니다.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하늘나라는 마치 이와 같다. 한 포도원 주인이 있었는데 그는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고용하려고 아침 일찍이 나갔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약속하고 포도원으로 보냈다. 그리고 아홉 시쯤 나가서 사람들이 일없이 장터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것을 보고 '당신들도 포도원에 가서 일하시오. 적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했다. 그들이 가서 일했다. 주인이 열두시에 다시 나가서 그렇게 하고 또 오후 세시쯤 나가서 그렇게 했다. 오후 다섯시쯤 또 나가보니 아직도 장터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 그들에게 '왜 당신들은 하루종일 이렇게 일없이 서성거리고 있소?' 하고 말했다. 그들은 '아무도 우리를 고용해 주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 저물었을 때에 포도원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 온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차례로 맨 먼저 온 일꾼까지 품삯을 치르시오' 하고 말했다. 오후 다섯시쯤부터 일한 일꾼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그런데 맨 처음에 와서 일한 사람들은 좀 더 받을 줄 기대했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을 뿐이었다. 그들은 주인에게 불평을 했다. '마지막에 온 일꾼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건만 하루 종일 찌는 더위 속에서 땀을 흘려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은 대우를 당신은 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그들 중 한 사람에게 말했다. '친구여 나는 당신에게 불공평하지 않았소.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지 않았소? 당신의 삯이나 가지고 돌아가시오. 당신들에게 준 만큼 마지막에 온 사람들에게 삯을 치르는 것은 내 뜻이오. 내 돈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소? 나의 착한 것이 당신 눈에 거슬리오?'(마태 20, 1~15)

이것은 한 포도원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예수의 이야기에서 보면 농산물이래야 올리브, 무화과, 밀, 겨자 정도가 나오고 그리고 여기서 나오는 것처럼 포도를 볼 수 있는데, 그때의 팔레스틴에서 농사짓는 곡식 종류가 지금에 비해 단조로웠던 것입니다. 아마 예수가 오늘 한국에 계시다면 논, 밭, 감자밭, 무, 배추, 옥수수 등등 훨씬 다채로운 소재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또 그런 것들이 그가 이야기하려는 내용을 비유하는 데도 편리한 도구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농사를 짓거나 안 짓거나 간에 밭에서 곡식을 보거나 시장에서 사먹어도 그저 맛이나 따지지만, 예수는 어느 하나 소홀히 넘기지 않고 그것을 심거나 추수하거나 또는 그것을 먹는 과정에서 우리가 생각지 못한 것을 가지고 핵심을 찌르곤 합니다.

이것은 포도원에서는 드문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이 포도원이 비교적 큰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 주인은 부농이었나봅니다. 그는 여느 날과 같이 아침 일찍 일터를 구하기 위해 일꾼들이 늘 모여 있는 시장으로 가서 일찍 온 일꾼들에게 그때 한 가정의 최소한의 하루 생활비인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자기 포도원으로 그들을 데려갔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도시마다 '인력시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노동력이 필요한 사람들은 그리로 찾아가서 일에 알맞은 일꾼을 불러옵니다. 그런데 예수 당시에도 유다인 사회에서 일정한 일터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장터 한구석에 모여서 자신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지금의 우리 경우와는 달리 하루에 고용되는 사람의 수가 극히 적어서 기다리는 일꾼들은 원하는 임금을 주장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모인 사람들 중에서 어쩌다 불려가는 사람들을 남은 사람들은 부러워했고, 그중 대부분의 일꾼들은 하루 종일 배를 곯고 부를 사람들을 눈 빠지게 기다리다 힘없이 집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이렇게 빈손으로 집에 간다는 것은 바로 온 식구들이 그날 저녁과 이튿날을 굶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날 허탕을 친 일꾼들의 귀가길은 암울했을 것입니다. 의욕도 있고 능력도 있는데 일터가 없다는 것은 그 세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반증합니다.

이 포도원 주인이 처음부터 한 데나리온을 약속했다는 것은 자발적으로 그들의 인권을 존중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주인은 9시쯤에 다시 장터로 나가서 일터를 찾는 일꾼들을 자신의 포도원으로 데려옵니다. 이렇게, 그는 12시에도 3시에도 장터에 나가 저들을 자신의 포도원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런데 이 주인은 9시 이후부터 불러들이는 일꾼들에게는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습니다. 그가 일한 만큼 '적당한' 삯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주인은 보통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처사를 합니다. 이미 해가 기울어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무렵인 5시에 또다시 그 장터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일없이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미 해는 기울어 더 이상 일꾼을 찾는 사람이 올 시간이 아닌데도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양식을 벌어 오기를 마냥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 때문에 차마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포도원 주인은 그들도 자신의 포도원에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니 새벽부터 일을 시작한 사람들과는 각기 일한 시간이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에 온 일꾼들은 거의 일할 시간이 없었으니 노동한 만큼 임금을 지불한다면 몇 푼 받을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런데 이 주인은 또다시 상식에 어긋난 짓을 했습니다. 그는 저들에게 일삯을 주는데,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불렀습니다. 저들이 일한 시간이 새벽부터 온 사람들에 비해 10분의 1 정도였다면, 저들은 한 데나리온의 10분의 1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도 약속된 것이 아니니 나서서 주장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주인은 저들에게 각각 한 데나리온씩 주었습니다. 그야말로 그들에게는 하늘에서 떨어진 떡인 셈입니다.

이 주인은 저들과 똑같이 처음 온 사람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씩 일삯을 주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이 주인의 행위는 '사회문제'로 둔갑합니다. 이에 새벽부터 와서 일한 사람들이 들고일어났습니다. 그 주인의 처사가 '형평원칙'을 깼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마지막에 온 패들 이외의 나머지 사람들은 지금의 노동조합장을 뽑듯이 대표를 선정해서 주인에게 이렇게 항의한 모양입니다. '마지막에 온 일꾼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 같은 대우를 당신은 했습니다.' 그러니 주인의 행위는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주인이 항의하는 이들에게 부당한 행위를 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저들은 맨 나중 온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을 보고, 자기들에게도 그 비율로 으레 더 많이 주리라는 일방적인 기대를 했다가 어긋난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은 그 대표에게 이렇게 응수했습니다.

'친구여, 나는 당신에게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지 않았소?(그러니) 당신의 삯이나 가지고 돌아가시오'(마태 20, 13).

기존의 세태에서 보면, 이 주인의 말로 시비는 끝나야 합니다. 그는 약속을 어기지 않고 지켰습니다. 또 그 약속은 상대방에게 강제성을 띤 것이 아닙니다. 만일 이 주인이 일삯 지불 순서를 처음 온 사람들부터 시작했더라면 저들은 아무 불평 없이 약속된 삯을 받았으므로 만족하고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그 주인은 일부러 마지막 온 사람들부터 삯을 줌으로써 어떤 의도를 갖고 있었음을 나타내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처음 온 사람들의 불평을 그대로 노출하려고 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대답을 찾기 전에 잠깐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예수 자신에게로 눈을 돌려봅시다.

그는 가난한 실업자들의 실태를 주목하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들의 삶의 목적은 노동을 하여 하루하루를 먹고 살 수 있는 품삯을 받는 것이 고작인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저들에게 삶의 보람이 어디 있으며, 미래에 대한 희망이 어디 있겠습니까? 정말 구복(口腹)이 원수라고 마지못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는 노동시장의 질서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일한 만큼 삯을 알맞게 주는 것이 '형평원칙'이며, 정의구현에도 맞습니다. 고용하는 자나 일꾼은 아무 문제도 제기하지 않습니다. 노동력이 팔고 팔리는 인력시장에선 사람, 그리고 그 존엄성은 쏙 빠져버리고 맙니다. 따라서 일하고 싶어도 일할 길이 없어서 실업자가 된 사람의 문제는 관심에서 제외됩니다. 고작해야 무능해서 또는 게을러서 그렇다는 낙인만 찍을 것입니다.

이런 세태를 당연한 것으로 아는 세상에 예수는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그러한 통념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도 사람을 위해 있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마르 2, 27)라고 한 그가 이 같은 사회 통념의 자명함을 위해 사람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용납할 까닭이 없습니다. 이 같은 잘못된 세상의 가치관에서 '형평'을 내세워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따위로는 새 세상을 만들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이야기를 한 목적이 무엇일까요? 이 이야기에도 "하늘나라는 마치"라는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에서는 어느 정도나 그 나라의 한 단면을 드러내고 있는 걸까요? 그것은 그 주인의 행위와 답변 중 마지막 부분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내 돈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소? 나의 착한 것이 당신 눈에 거슬리오?"(마태 20, 15)

이 주인의 반응은 지금의 사회개혁이라는 시각에서 받아들이면 거부감을 일으킬 것입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자본주의적 발상이요, 발언이 아니냐!'고 단번에 흥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의 '나' 또 '내 것'을 이 시대에서 말하는 '자본가'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이면 아무 대답도 찾을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나' 또는 '내 것'을 새 세계인 하느님 나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귀족사회에서 '나'는 사회신분적으로 왕이나 귀족이었고, 자본주의사회에서의 '자본가'인데 대해, 공산사회에서 그 '나'는 프롤레타리아입니다. 이처럼 혁명은 그 주체를 바꿉니다. 하물며 하느님 나라에 있어서이랴. 하느님 나라의 새 질서, 새 가치는 기존질서의 어떤 항의나 거부가 통하지 않습니다.

그 '나'는 낡은 질서에서의 계약을 파괴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대신 새로운 질서, 새로운 가치로 낡은 질서에 내분을 일으키고 그 한계를 드러냅니다. 계약대로 한 데나리온을 받았으면 만족해야 합니다. 그런데 새 질서가 이 만족감을 뒤흔들어놓았습니다. 말하자면 기득권, 우선권에 대한 인식을 뒤흔들어놓은 것입니다. 만족해야 할 사람을 불평분자가 되게 했습니다.

그러면 그 새 질서, 새 가치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을 노동력으로 보고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는 질서입니다. 물질이 아니라 사람이 가치의 기준이 되는 세계입니다. 이 주인은 노동과 돈을 교환하는 세계를 교란하고 인간의 삶을 보장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새 세계를 제시합니다. 짧은 시간 일한 사람도 긴 시간 일한 사람과 똑같이 살 권리가 있고 삶이 보장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이야기를 한 이가 가르친 기도에서 '하느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고 한 다음 곧바로 '우리에게 그날 그날의 먹을 것을 주십시오'라고 한 것이 이 이야기와 맥이 통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
텍스트를 수정한 후 아래 [수정요청] 버튼을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