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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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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들으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가에 뿌려졌다. 그런데 새들이 와서 그것을 쪼아먹었다. 또 더러는 흙이 별로 없는 돌밭에 떨어졌다. 싹은 곧 났지만 흙이 깊지 않아 해가 뜨자 싹은 타버리고 뿌리가 없어 말라버렸다. 또 더러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다. 그런데 가시나무가 자라 그 기운을 막아버리니 열매를 맺지 못했다. 또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졌다. 그런데 씨들은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가 30배도 되고 60배도 되고 100배도 되었다(마르 4, 3~8/ 병행 마태 13, 3~8; 루가 8, 5~8).

이것은 마르코복음의 비유 중에서 맨 처음에 실린, 잘 알려진 비유입니다. 이것은 그보다 적어도 20년쯤 뒤에 쓰여진 마태오와 루가에도 병행되고 있는데, 루가에는 표현에 약간의 변동이 있을 뿐, 내용이나 이야기를 하는 장면 그리고 이야기를 마치고 덧붙이는 말까지 꼭 같습니다.

이야기는 3절부터 시작되지만 이 이야기를 하는 현장이 너무나 아름답게 묘사되어 마치 무대 위의 한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예수가 평소와 같이 갈릴래아 호숫가에 몰려온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이런 장면은 고대 희랍에서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저들은 주로 사람이 많이 모이는 도시나 시장 어느 모퉁이에서 당대의 스승으로 알려진 사람들이 열변을 토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리로 몰려들어 경청을 했습니다. 인도 역시 지금도 그런 풍경을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미 세상을 뜬 저 유명한 '간디'나 그의 제자 '비노바' 같은 이가 지방 순회를 하면 수만 때로는 수십만의 사람이 운집하여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환호성을 올렸습니다.

바다와 같은 호수를 뒤로하고 선 그를 둘러싸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민중이 너무 많아서 밀고 밀리는 통에 도저히 이야기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호수에 띄운 조각배에 올라가 그것을 강단으로 삼고 호숫가에 바싹 모여든 청중들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2,000년 전 갈릴래아에서 벌어진 그 모습은 손에 잡힐 듯 아름다운데 그 호수는 지금도 그때 그 장면과 그 이야기를 가슴에 안은 채 불어오는 바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며 말이 없습니다.

그는 농사짓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듣는 사람들은 넓은 호수와 그 위에 뜬 조각배에 서 있는 예수를 보고 있었으나, 예수는 그때 비옥하기로 유명했던 갈릴래아의 뭍(陸地)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뭍이래야 결국 '밭'입니다. 어쩌면 그의 시선은 씨를 뿌리고 있는 농부에게 가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의 입에서 한 토막 이야기가 흘러 나왔습니다.

한 농부가 파종기가 되어 밭에 나가 씨를 뿌립니다. 틀림없이 '밀'이었겠지요. 저들은 자루를 어깨에 가로메고 한 손으로 그것이 쏟아지지 않도록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씨를 뿌립니다. 갈릴래아 지방은 '옥토'라고는 하나 팔레스틴의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말이고, 우리나라의 곡창이라고 알려진 땅처럼 그렇게 넓고 옥토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땅을 조금만 파헤치면 암석이 깔려 있는 밭도 많고, 농부에게 원수와도 같은 엉겅퀴라는 잡초가 무성한 곳도 많아서 아무리 파종 전에 그것을 뽑아내고 제거해도 워낙 번식력이 강해서 뿌리만 남았어도 또다시 번식하여 농사에 큰 방해거리가 되는 땅도 있었고, 흙보다 돌들이 더 많은 밭도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농부가 가려가며 씨를 뿌려도 어쩔 수 없이 옥토가 아닌 그런 땅 위에도 씨가 뿌려집니다. 심지어 어떤 씨는 밭과 밭 사이에 난 길 위에 뿌려지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농부는 처음부터 이런 불모지 같은 땅 위에 떨어져 없어질 씨앗을 계산하고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씨를 뿌린 다음 때가 되면 땅에 뿌려진 씨에서는 일제히 싹이 납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면 곧 토질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처음부터 길가에 떨어진 것은 새들이 와서 주워먹어버리고 그외에는 많은 부분이 말라버리거나 생기를 잃습니다. 암반이 밑에 깔린 흙 위에 떨어진 씨는 곧 시들어 죽고, 엉겅퀴가 무성한 땅에 뿌려진 씨는 엉겅퀴에 양기를 다 빼앗기고 죽어버립니다. 단지 싱싱하게 자라는 것은 옥토에 뿌려진 것뿐입니다. 옥토에 뿌려진 것만은 잘 자라서 심은 씨앗보다 30배, 60배, 100배의 수확을 거둘 수 있게 됩니다. 사실상 갈릴래아 지방의 곡식은 평작이 될 때에는 한 그루에 평균 35개의 낟알이 열린다고 하며, 아주 풍작일 때에는 100알까지 열리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어느 하나 특별할 것이 없는, 보통 농사꾼이면 늘 경험하는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듣는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농사짓는 과정을 구태여 다시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이야기는 무엇인가를 비유하고 있습니다. 비유는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공통으로 알고 있는 어떤 사실의 핵심을 전제로 하여 그것을 나타내는 데 그 목적을 둡니다. 그러므로 그 핵심적인 것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실없는 이야기로 밖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아니, 너무도 자명하기 때문에 오히려 수수께끼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그런 뜻에서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라"고 합니다.

이것이 마르코복음에 처음 실린 비유이기 때문에 마르코는 뒤이어 해설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같은 장 13절 이하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르코나 그가 속한 공동체에 의해서 설명된 것이지 예수 자신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만약 예수가 그렇게 설명해 줄 작정이었으면 처음부터 비유의 형식을 빌려 이야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말이라면 지금 우리가 이 비유를 주목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서로 통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염원이나 희망에서 하나가 된 사람들은 이 비유를 들을 귀를 가지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이야기만큼 허무맹랑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가령 거기에 로마 병정이나 희랍의 철학을 배운 사람들이 같이 섞여 있었다면 어안이 벙벙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저 말이 무엇인가?', '저 많은 사람들을 앞에 놓고 저런 알맹이도 없고 목적도 없는 이야기를 무엇 때문에 하느냐?'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는 무엇을 비유한 것일까요?

초기 교회의 풀이를 당연한 대답으로 삼아버리려는 안이한 생각은 접어두고, 먼저 이 이야기 자체를 주목하는 것이 첫 순서가 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세 가지 요소와 그 관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씨 뿌리는 사람', '밭', '씨앗'입니다. 이렇게 나누어 보면 그중에 어느 것이 중심인지 물어볼 수밖에 없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일까요? 그렇다면 씨 뿌리는 사람의 고충에 대한 이야기가 되겠지요. 밭, 즉 땅일까요?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청중들의 여러 가지 자세를 말하려는 것이겠지요. 씨앗일까요? 그렇다면 무릇 씨앗이란 자라기에 알맞는 땅을 만나야 된다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씨앗은 무엇일까요?' 아마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간단한 대답을 찾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초기 교회에서는 그 씨앗을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으로 벌써 그것은 예수 자신의 설명이 아님이 드러납니다. 복음, 기쁜 소식이라는 희랍 말 '유앙겔리온'은 '기쁜 소식' 또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를 의미하는데, 고대에는 전쟁에 이긴 소식을 전하는 뜻으로 사용했습니다. 초기 교회에서는 예수의 사건을 총괄해서 복음이라고 이름하기도 하고, 그 사건을 전승한 책을 그렇게 부름으로써 고유한 문화형식을 일컫게 됐습니다. 그러므로 씨 뿌리는 사람은 응당 '복음을 전하는 사람', 즉 '전도자'라는 대답이 쉽게 나옵니다. 그러면 여러 모양의 밭에 대한 대답도 자명해집니다. 그러나 이런 설명만으로는 이 이야기의 목적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아마 초기 교회에서는 선교활동을 하는데 많은 난관을 경험하고 실의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그래도 옥토에 심은 씨들이 잃어버린 씨들을 상쇄하고도 훨씬 남는다고 설명함으로써 격려하고 또 선교를 안이하게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헤쳐 나가야 할 어려운 난관이 가로놓여 있음을 경고하려는 목적으로 그렇게 풀이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 자신이 한 비유라면 장차 있을 전도자가 당할 어려움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또 여러 형태의 땅으로 '청중'을 비유했다면 그들에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한다'라는 지시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습니다. 가시덤불이 우거진 땅이거나 바위가 밀에 깔린 흙이거나 옥토이거나 간에 그것은 듣는 자의 책임은 아닙니다. 특히 옥토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밭의 토질에 대한 차이가 이 이야기의 중심은 아닙니다. 누구냐는 질문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씨 뿌리는 농부는 많은 씨앗을 잃어버리는 아픔을 겪습니다. 그가 그렇게 배를 곯아가면서까지 가장 좋은 것만 골라 아껴두었던 씨앗이 그렇게 많이 상실되는 쓰디쓴 경험을 한 농부는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씨 뿌리는 토지를 도식적으로 구분해 4등분을 한다면 심은 씨의 4분의 3은 잃어버린다는 슬픈 이야기가 됩니다. 물론 이것은 밭의 면적이 실제로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오늘의 한국 농민들이 일년 내내 땀을 흘려 농사를 지어도 투자한 만큼의 농경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결과에 분노하여 농촌을 떠나듯 그 생활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씨 뿌리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예수 자신이 자기 경험을 이야기한 것일까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농부는 '예수 자신'일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이라면 이 이야기는 그의 생애의 후반에 했을 것입니다. 그는 짧은 생애에 너무나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쓴 경험을 했습니다. 갈릴래아 지방에서는 씨를 뿌리는 농민처럼 민중들과 더불어 호흡을 같이하며 저들의 공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서 돌발 위에 뿌려진 씨처럼, 가시덤불에 돋아난 씨들이 말라버리듯 그를 떠나가거나 그의 뜻에 동조하지 않는 사태가 꼬리를 이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복음서는 제자들의 무지와 편견과 배신 등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의 생애는 실패의 삶이었습니다. 잃어버림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는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옥토에 뿌려진 씨가 자라 마침내 30배에서 100배의 수확을 거둘 것을 내다보고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이 비유가 그의 삶을 이야기한 것이라면, 이 옥토에서 얻을 수확은 미래에 대한 희망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자기의 생애를 되돌아보며 한탄했다고 쉽게 단언할 수 없습니다. 그는 그의 생활이 고달파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라고(루가 9, 58) 한탄했다고도 전하고, 저 수난 예고에서는 그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 버림을 받고 처형될 것이라고 거듭 예고 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자기 안에서의 좌절감을 표출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만약 이것이 예수 자신의 생애에 관한 비유가 아니라면 무엇을 비유했을까요? 이것은 그의 이야기 전체의 핵심인 '하느님 나라의 비유'라는 결론이 가장 타당할 것입니다(마르 1, 15 참조). 그는 하느님 나라가 임박했다는 것을 그의 설교의 주제로 삼았으며 또 그 나라는 곧 올 것이라는, 아니 오고 있다는 것을 거듭 밝혔습니다(마르 1, 15). 심지어 제자들을 파견할 때는 너희들이 가야 할 곳을 다 돌기 전에 하느님 나라는 도래할 것이라고까지 예언했습니다(마태 10, 23). 그러나 이것은 예수 자신의 기대만이 아니라 청중, 즉 민중이 공통으로 품고 있는 핵심적인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그의 말처럼 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실망, 좌절, 절망으로 몰고 가는 여러 가지 장애물들이 겹겹이 가로놓여 그런 희망을 비웃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자신만의 쓴 경험이 아니라 그 나라를 목이 타게 기다리면서도 비유로도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곧 아는 민중의 경험일 수 있습니다. 기다리는 나라가 예상했던 대로 현실로 오지 않으니까 배신도 하고 자포자기하는 사람들도 무수히 많았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의 예수에 대한 배신은 그 나라를 약속한 예수에 대한 실망의 결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들에게, 아니 어쩌면 예수가 자기 자신에게 '그러나 그 나라는 반드시 온다', '옥토에 뿌려진 씨가 100배의 결실을 맺어 잃어버린 것을 상쇄하고 곳간을 가득 채우고도 남아돌 만큼 풍요한 그날의 결실은 온다'라는 사실을 재확인하고, 그 신념을 선포하기 위한 것이 이 이야기의 목적으로 보여집니다.

이 이야기에는 전승하는 과정에서 '하느님 나라는 마치'라는 전제가 빠져버린 것 같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하느님 나라 대신에 더욱 암울한 현실이 계속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결과일지 모르겠습니다.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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