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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교회가 조직화되고 그 당시의 정치체제에 따라 중앙집권제로 급진전한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으나, 그중에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하나는, 로마제국이 간헐적으로 기독교를 박해한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교회를 중심으로 모이게 하였고, 박해가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오히려 교회의 조직을 강화시키는 역작용을 하였습니다. 또 하나는 각 지방에 흩어진 교회들이 통일성을 이루지 못할 뿐아니라, 그레꼬 로마 제국 안에 있는 수많은 종교의 영향을 직간접으로 받아 신비주의 아니면 광신자로 빠지거나 자의적인 해석으로 그리스도교의 이름 아래 실상은 전혀 다른 것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경향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영향과 오류로부터 그리스도교를 지키기 위해 교회의 중앙집권화는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일찍부터 유다교의 유산을 받거나 헬레니즘내의 종교에서 종교의 계층적인 조직을 끌어들여 '감독'을 정점으로 하는 제도를 만들었으나 그것은 어떤 권위도 부여되지 않은, 사람에 따라서는 이름만이 있는 그런 상태였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걱정하는 신도들 중에는 강력한 감독제를 실시해 교회의 지도력을 강화하기를 원하는 경향이 높아져갔으며, 반면에 그러한 경향에 편승하여 교회의 권위를 확립하고 그 권좌에 앉으려는 상부의 책동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교회가 국가의 권력에 맞먹는 권력체로 자리를 굳힌 것은 이른바 콘스탄티누스 대제(大帝)의 그리스도교 보호정책 이후였습니다. 그는 로마황제자리를 둘러싼 전쟁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도움에 힘입어 승리한 후, 주후 313년에 그리스도교 박해 때 몰수했던 교회의 재산을 반환하고, 국가가 교회를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지원하도록하고, 성직자를 우대하여 국민적 의무를 면제할 뿐 아니라 교회내에서의 그들의 독자적 행위를 공인하는 등 사실상 그리스도교를 로마의 국교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리하여 마침내 395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로마제국의 국교(國敎)로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리스도인은 로마제국 전체 인구의 10분의 1 정도였는데, 그 세력은 대단하였습니다. 고위관료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고,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그리스도인이 우선권을 점유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교회는 감독제를 격상시켜 법왕제(法王帝)로 만들고, 그를 베드로의 후계자로 선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때에 그들은 마태오복음에서 예수의 말로 되어 있는 "너는 베드로다. 내가 내 교회를 이 반석 위에 세울 터인데, 죽음의 권세가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네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 18~19)라는 구절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였습니다.

마태오에 따르면 법왕은 하늘의 열쇠를 받은 대리자요, 땅 위의 모든 문제를 책임지는 해결자라 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의 계승자로 자부하는 법왕의 일차적 관심사는 교권 장악이었습니다. 교권이란 교회의 제도를 관장하는 권리를 말합니다. 그러나 법왕은 교권 이전에 교회의 가르침, 구체적으로는 성서해석의 열쇠를 독점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을 더 강조하기 위해서 이른바 법왕의 무오설(無誤說)도 창안해 내었습니다. 법왕의 무오설에 따르면, 법왕의 판단에는 착오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의 성서해석에도 착오가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이것은 어느 누구도 성서를 바탕으로 한 그의 가르침에 가감(加減)하는 행위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이로써 사제들의 위치도 자동적으로 결정된 셈입니다. 사제는 법 왕의 손발로서 그의 권위 밑에서 교회를 치리(治理)하고 성서를 풀이할 수 있는 전권(全權)을 분담 받았습니다. 교회에서 이들 외에 어떤 평신도도 성서를 풀이할 권리가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성례 전의 집행권도 사제만의 특권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성례전들도 성서에 기초한 법왕의 지시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천 년이 흘러 사회가 변동하였습니다. 그러니 성서의 문자만 가지고 현실생활을 규제해 나갈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법왕의 이름으로 새로운 상황에 적응할 수 있는 교시(敎示)가 계속되어야 했으며, 그것은 신도에게는 사실상 성서 자체보다 더 큰 비중을 갖도록 강요되었습니다.

또한 사실상 사제계층이 성서해석의 열쇠만 독점한 것이 아니라 성서 자체를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까닭은 이러합니다. 성서 원문은 구약은 히브리어로, 신약은 희랍어로 되어 있었으며, 사제계층은 그것을 번역한 라틴어 성서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일반 민중이 그런 고대어를 읽을 수도 없었거니와 일반에게 공개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저들은 사제들의 입만 쳐다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신도를 이끌어가기 위한 목적으로 성서를 부분적으로 발췌 해서, 그것을 교본삼아 신도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발췌한 내용이 성서의 전체 맥락과 어떻게 연결됐는지는 판단할 길이 없습니다. 또 성서는 구약만 39권, 신약이 27권인데, 그것이 씌어진 시대도 다르고 각 책들의 성향도 달랐습니다. 신도들은 그 책들의 비중을 가려낼 아무런 기준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결국 남는 것은 교권에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길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끔 이변(異變)이 일어났습니다. 성서의 원문을 접할 수 있는 사제들 중의 일부 또는 평신도이면서 이에 접할 수 있는 사람들 중에 교권에 의해서 해석된 것과 다르게 풀이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런 것은 절대교권으로부터의 탈출을 암중모색하고 있는 신도들에게 상당한 파문을 일으키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교권은 이런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이단으로 규정하고, 심하게는 사탄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씌워 극형에 처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성서 자체가 아니라 과학적인 측면에서 성서에서 지시한 것과 다른 세계관을 발설해도 처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이가 우주를 평면적 삼층구조(三層構造)로 이해한 성서의 우주관과 상충된다는 이유로 얼마나 가혹한 박해를 받았습니까! 이렇듯 교권의 절대권위는 성서의 문자풀이에만 국한하지 않고 세계를 이해하는 모든 철학이나 상상과 상충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사상가와 철학자들이 처형됐는지 모릅니다.

교권은 그들의 해석권을 절대화하기 위해서 또 하나의 길을 터놓았습니다. 그것은 성서를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는 것이었습니다. 알레고리적 해석이란 문자에 나타난 그대로가 아니라 그 문자가 구체적인 어떤 것을 상징한다는 주장입니다. 그중에 당대에 가장 존경받는 철학자이며 성서의 경전화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어거스틴의 성서해석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루가복음에만 있는 이른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가는 도중에 강도를 만나 반쯤 죽어 있었습니다. 그 앞을 제사장, 레위 사람이 지나 갔으나 그를 돕지 않은 채 그대로 가버렸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 타고 가던 말에서 내려 감람유와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말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다음날 그는 여관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그 사람을 돌보아줄 것을 당부하면서 혹시 그 돈이 부족하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주리라는 그런 얘기입니다.

이 비유를 어거스틴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예루살렘은 낙원이다. 예리고는 지옥이다. 강도 만난 사람은 인간 일반이다. 반쯤 죽었다는 것은 인간이 범죄로 해서 완전히 자기를 상실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자기를 살릴 가능성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다. 말에서 내렸다는 것은 그가 세상에 왔다는 뜻이다. 기름을 붓고 술을 붓고 싸맸다는 것은 그가 십자가 위에서 흘린 피를 말한다. 데려다준 여관은 교회를 의미한다. 다시 오겠다는 것은 재림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알레고리적 해석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의적인 풀이를 할 권리가 교회에만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을 하다보면 성서를 얼마든지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제계층은 1천여 년 동안에 이런 알레고리적 해석을 독점했는데, 그 해독은 현재 오늘의 한국 교회에까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알레고리적 해석은 성서 자체가 말하려는 것을 밝히려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사람이 어떤 의도를 관철하기 위해서 성서의 권위를 빌리는 행위일 따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의적 해석권은 교회만이 독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교회가 내세운 최대한의 덕목은 '복종'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강변했습니다.

알레고리적 해석은 '영적(靈的)인 해석'이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성서가 문자로 되어 있는데, 그것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그 문자 뒤에 있는 영적인 의미를 알아야 비로소 성서를 제대로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해석은 영적인 눈을 가진 사람에게만 가능한데, 바로 그 눈은 법왕을 정점으로 하는 사제들 만이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반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그들의 해석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척도를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주장은 단순한 궤변이 아니라 그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었습니다.

이미 위에서 언급한 경전형성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 '오리게네스'는 성서해석 방법을 3가지로 구별합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육체가 있고, 혼이 있고, 그것을 종합하는 정신이 있는 것처럼 성서도 자의적(恣意的)인 것이 있고, 그 문자 배후에 도덕적인 것이 있으며, 이것을 종합하는 것이 영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그 구체적인 예로 창세기 35장 22절의 "르우벤이 아버지의 소실을 범하였는데"라는 구절을 보면 우선 그 자의적 의미는, 르우벤이 실제로 아버지의 소실과 성관계를 가졌다는 것을 말하며, 두 번째 해석으로는 르우벤은 인간의 도덕법을 위반한 패륜자라는 것이고, 세 번째 해석으로는 르우벤을 하느님의 장자로 해석하고 그의 범죄가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 야훼를 배반하고 다른 신을 섬겼다는 뜻이라고 해석합니다. 여기에서 세 번째가 바로 영적 해석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알레고리적 영적 해석권은 성서의 역사적 연구에 바탕을 두지 않고 교의적(敎義的)사변적(思辨的) 근거 위에서 해석된 결과입니다. 거기에는 성서 자체가 본래 의도하는 바와는 달리 교회의 질서를 지키거나 신자들의 생활을 통솔하려는 지배의지(支配意志)가 앞서서 성서를 왜곡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아무튼 이러한 '영적인 해석' 이 판을 친 중세기의 평신도들은 자기의 판단력을 완전제거할 때만이 교회인(敎會人)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 양상은 말 못하는 어린애가 그 어머니가 먹여주는 것을 받아먹을 수밖에 없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아니, 말 못하는 어린아이도 쓰면 뱉어내어 싫은 것을 거부할 권한이 있었으나 당시 민중들에게는 그런 권한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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