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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루터는 "성서는 성서로 하여금 해석케 하라"는 명쾌한 표현으로 성서의 해석권을 교권에서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이 '만인사제설'로 누구나 글을 읽고 문법만 알면 성서를 해독할 수 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민중이 접근할 수 없는 성서를 민중의 말로 번역하여 민중에게 배포한 것은 개혁사 중의 핵심적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루터의 이 같은 분명한 언명과 태도결정에도 불구하고 그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고 시대적 암초에 부딪히게 됐습니다. 그 당시 일어난 계몽주의사상이 온 세계를 휩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시대까지는 비록 교권이 해석의 열쇠를 가졌지만 성서 자체의 권위를 침범하는 일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루터의 "성서는 성서로 하여금 해석케 하라"는 성서는 밖으로부터의 침범을 일체 거부한다는 쐐기를 박은 것입니다. 그 주장에는, 성서가 유일한 진리이며 또 그 자체가 독자에게 자체의 뜻을 알려준다는 확신이 깔려 있습니다. '성경'이 알게 한다는 것은 결국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계몽주의 이래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전권은 이성(理性)에 있다는 사조가 등장하게 됐는데 성서해석도 예외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풍조는 17세기 후반부터 본격화됐습니다. 이때 성서의 '성'(聖)자도 완전히 제거되었습니다. 성서도 다른 책과 똑같은 하나의 문헌으로 아성의 비판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이 같은 새 해석의 주인의 등장은 성서의 성격인식의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전까지 성서는 하느님이 영으로 사람을 기계처럼 사용하여 이룬 계시라고 주장한 데 대해서, 이제 성서는 문헌이며 '문헌'이니까 사람에 의해서 전승발전된 것이라고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이제까지 '신학'이라는 이름 아래 포괄됐던 역사적 사실과 교리는 이분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까지 그리스도교 신학 안에서는 전통적 교의학과 성서학이 구별되지 않았습니다. 엄밀하게는 성서학이 교의학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역할만 했습니다. 그런데 교의학은 교회내의 자기 신념이요 주장이기에 교회 자체의 척도에 내맡겨도 됐지만, 성서만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성서는 '교회'에 갇힌 것이 아니라 세계, 인간, 역사를 포괄하는 글로써 세계에 공개되어야 하는 책인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이데올로기로서의 교의학과 성서학은 분리되어 각각 제 길로 가야 했습니다. 물론 서로 영향을 받고 상호보완을 받기도 하면서.

이때의 상황을 종교개혁자 중의 한 사람인 츠빙글리(H. Zwingli)는 다음과 같이 환호했습니다.

이로써 지금까지 교회의 가르침의 표현으로 자명한 것으로 이해됐던 성서가 갑자기 성서 자체를 드러내어 성서의 가장 바른 이해로써 종교적인 관심을 입증하게 되었으며, 모든 신학적인 작업에서 성서해석이 가장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게 됐다. 그리고 성서는 더 이상 밖으로부터 그 의미의 보장을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것은 완전히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석해야만 하게 되었다. 루터는 이미 1519년에 이 같은 인식을 정식화된 양식으로 표현했는데, 그것은 바로 성서는 그 자신이 오직 유일한 해석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비판학적인 길을 대담하게 내밟은 사람은 젬러(Z. S. Semler)였습니다. 그는 "단순하게 하느님의 말씀과 성서는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성서는 어디까지나 부분적인 문서만 보존하고 있으며, 그 시대(과거)인들에게 의미가 있었으며, 현대인에게는 도덕적 교훈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는 성서해석의 문을 활짝 열어제친 것입니다. 그의 뒤를 따른 미하엘리스(J. D. Michaelis)는 그의 『성서개론』에서 신약성서의 역사적인 문제를 제기했는데 텍스트 비판, 언어문제, 각 책들의 성립과정 등을 상당히 조직적으로 그리고 비판적으로 다루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경향은 모든 것의 판단기준이 인간의 이성이며 자연법이라고 본 결과인데, 이 점을 가장 강조한 대표적인 인물은 파울루스(Paulus, 1761~1851년)입니다.

그러나 이성이나 자연법은 희랍적인 개념으로, 그 자체가 과학성을 입증할 만한 개념은 아닙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결국 인간의 사고가 판단의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판단은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인 한 어쩔 수 없이 그 시대의 영향을 받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루터의 "성서는 성서로 하여금 해석케 하라"는 주장은 유린당했을 뿐만 아니라, 어느 측면에서는 그를 거슬러 올라가 성서를 교회로 하여금 해석케 하라는 종교개혁 이전으로 되돌아간 셈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교권에 대해서 이성이 정면으로 나섰을 뿐입니다. 교권은 그 시대의 정치경제적 조건들이나 교권 주도자들의 관심 여하에 따라 성서해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침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이성'도 어쩔 수 없이 이성의 탈을 쓴 그 시대 시대의 사조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우리는 이른바 튀빙겐학파의 경우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1830년대는 헤겔철학이 사상계 전체를 거의 휩쓸다시피 했습니다. 헤겔적이냐 반헤겔적이냐는 있을 수 있어도 헤겔을 뺀 어떤 사상도 인정받지 못할 만큼 그는 철학의 기준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판국에 신학 역시 헤겔철학의 결정적인 영향을 받아 성서를 해석하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으로 바우어(F. C. Bauar, 1792~1860년)와 슈트라우스(D. F. Strauss, 1808~74년)를 들 수 있습니다. 헤겔에 있어서 유명한 것은 그의 변증론입니다. 주제(主題)와 반제(反題)와 종합(綜合)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른바 헤겔파(派)인 성서학자들은 헤겔의 이 변증론 그대로를 성서를 해석하는 데 적용했습니다. 가령 "바울로는 유다교와 그 반제인 그리스도교를 종합한 것이다"라고 주장했고, "베드로와 바울로의 대립을 종합한 것이 사도행전"이라고 보았으며, 복음서 역시 그런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러한 전제를 두면 어쩔 수 없이 성서 자체를 바울로적인 것, 베드로적인 것 또는 유다적이라는 시각으로 분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그것이 사실과 얼마나 거리가 있는지 충분히 입증되었습니다. 그중에 슈트라우스는 헤겔처럼 역사를 지배하는 것은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게 아니라 이른바 세계정신(Weltgeist)이라고 한 것에 연유하여, 신약성서는 역사의 예수가 중심이거나 그 시발이 아니고 신(神), 인(人)이라는 이념이 중심이었다고 대담하게 주장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바탕을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았습니다.

역사비판학적인 경향은 또 하나의 분파(分派)를 낳았습니다. 그것은 이른바 '종교사학파'라는 것입니다. 종교사학파의 거점은 독일 괴팅겐(Göttingen) 대학이었습니다. 그 창시자는 아이히호른(Eichhorn)인데, 리츨(A. Ritschl, 1882~89년)이 체계화했습니다. 이것을 성서해석에 본격적으로 적용했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예로 플라이데러(O. Pfleiderer)를 들 수 있습니다.

종교사학파는 성서도 역사적인 산물인 한, 주변의 사상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전제 밑에서 성서 안의 여러 종교들의 영향에 특히 관심을 모았습니다. 가령 구약은 알렉산드리아 철학, 페르시아 종교, 에집트 종교, 희랍 종교 나아가서는 불교적 전설에서까지 영향을 받았다고 보았으며, 특히 플라이데러는 그리스도의 하느님 아들설, 사탄의 정복자로서의 그리스도, 기적을 행하는 그리스도, 죽음을 극복하고 생명을 주는 그리스도, 왕 또는 주로서의 그리스도 등 다섯 가지 문제를 다른 종교들과 비교연구하여, 이런 것들은 기독교에 의해서 창시된 것이 아니고 이미 다른 종교에 있었음을 입증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 시기에 비판의 자유를 얻은 성서해석은 여러 갈래로 관심이 분산되고 이와 더불어 이른바 '예수전(傳)'운동이라는 것이 확산되어 성서를 제멋대로 풀이할 뿐 아니라 상상력을 동원한 문학성을 띤 글들이 무수히 쏟아져나왔습니다. 모르는 동안에 교의(敎義)의 대상인 예수가 문학의 주제로 등장한 셈입니다. 물론 문학에서의 예수는 예배의 대상이 돼버린 그리스도가 아니라 역사의 예수였습니다. 여기서의 예수상(像)은 가장 종교적인 인간, 가장 윤리적인 인간, 휴머니즘이 철철 흐르는 그런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것들은 성서에 엄격히 바탕을 둔 것이 아니고,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자신감과 상상력과 그로 인한 인간의 낙관적인 미래를 포함시킨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그 당시에 그린 예수는 인간이 지향해야 할 미래상이었으며, 그의 사상 역시 인간이 건설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유토피아상이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인간과 그의 미래에 대해서 무한한 가능성으로 낙관했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은 이러한 신념을 무너뜨렸습니다. 1차대전은 독일의 처참한 패배로 끝났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때에 비이성적인 인간상이 여지없이 폭로된 사실입니다. 즉 인간이 이성적이란 신념은 허구의 도그마 그 이상이 아님이 폭로된 것입니다. 전쟁을 통하여 유럽에서는 이제 어느 누구도 이성이 역사를 이끌어간다고 믿을 수 없게 됐습니다. 그보다는 어떤 맹목적인 의지가 인간을 휘몰면서 잔인한 싸움으로 끌고 갔습니다. 인간이 야수와 다름없던 이 현실 앞에서 그 도도한 희망에 찬 낙관주의는 여지없이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이와 때를 같이해서 실존주의가 대두하였습니다. 이것은 헤겔주의의 집단주의에 대한 항거와 군중심리에 대한 철저한 불신으로 번져 나갔습니다. 물론 권력에 대한 저항도 큰 역할을 했지요. 저들은 더 나은 세계에 대한 희망을 포기했습니다. 그보다는 모순과 갈등 속에 있는 실존을 어떻게 진솔하게 지켜가느냐가 중심과제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서를 보는 눈도 달라졌습니다.

저들은 성서의 전승사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전승사 자체에 관심을 가졌는지 아니면 문학적 관심이 더 앞섰는지는 얼른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하여간 저들은 성서를 문학적 시각에서 분해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곧 그들은 성서는 어느 개인이 어떤 전기를 쓰거나 백지 위에 자기 생각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이미 전승된 여러 자료를 갖고 그것을 편집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은 전승사적 관심입니다. 또 한면으로는 전승사적으로 분해한 결과, 전승된 단편들이 조각조각 묶여졌다는 것을 해명해 보였습니다. 또한 그 조각들을 한데 묶는 데 있어서 일정한 양식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구약 연구에서는 군켈(H. Gunkel) 이, 신약에서는 불트만이나 디벨리우스가 그 대표적인 사람들인데,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각기 그 양식에서 여러 유형을 지적했습니다.

가령 복음서는 기적설화, 전설, 논쟁설화, 소설양식, 수난설화, 범례(Paradigma) 등등 여러 이름들을 붙였는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불트만이 지적한 아포프테그마타(Apophthegmata)로 성격화한 문학유형론입니다. '아포프테그마타'는 희랍 연극무대에서 상연되는 문학 장르의 하나입니다. 이 장르의 특성은 그 안에 담긴 한마디의 말(진리)을 극명하게 살리기 위해 모든 연극적인 틀을 만듭니다. 그러므로 상황이라는 틀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것이라는 전제를 갖고 있습니다. 이런 눈으로 복음서를 분석한 결과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말이 핵심이고, 그 말을 하는 현장은 그 말씀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의 말 자체 외에 그 말을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했느냐 하는 상황 설정은 역사성과 아무 상관이 없게 됩니다. 또한 복음서는 예수의 입에서 나온 몇 마디 말만 남고, 그의 행위 일체는 전혀 무의미한 것이 됩니다. 그렇지만 그 말들도 예수의 말이 아니고 예수에 관한 말이라는 판단에 이르렀으니 결국 역사의 예수를 알 수 있는 근거를 없앤 것이나 다름없게 됐습니다.

불트만과 동시대의 사람인 슈미트(K. L. Schmidt)는 이런 시각에서 쓴 「예수적 역사의 틀」이라는 학위논문에서 예수의 말을 둘러싼 모든 얘기들은 그 말을 살리기 위한 툴(Frame)이라고 했습니다. 그 뒤 몇 년 안 되어 위의 두 사람의 본격적인 복음서 분석 연구서가 나왔는데, 그 방향성은 꼭 같았습니다. 불트만은 또한 『예수』라는 책에서 복음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민중과 더불어 사는 예수의 행태, 민중의 편에 서서 그들의 병을 고쳐주고 위로하고 희망을 안겨 주는 행동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고, 오직 그의 말로 된 것만으로 엮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말 자체도 역사성을 가진 예수의 말을 전제한 것이 아니라,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한 설교적 성격을 띤 이른바 케리그마(kerygma)라는 전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후에 이들에 대한 반론이 다시 전개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이 정도로 줄이기로하고, 이른바 신학자라는 전문가들의 작업의 성격을 규명하기로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성서전문가(학자)들의 해석독점권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나를 살펴보아야겠습니다.

첫째로, 저들은 위와 같은 우여곡절을 연출하면서 성서해석을 독점함으로써 민중을 완전히 소외시켰습니다. 중세기는 민중을 교도(敎導)하는 일방통행의 길밖에 열어놓지 않았고, 루터는 성서를 민중에게로 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뒤를 잇는 계몽주의의 세찬 물결에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의 의도가 무산되기도 했지만, 정치세력을 등에 업고 종교개혁을 하는 동안 민중에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민중 운동을 박해하는 결과를 낳게 됐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에 전적으로 동감한 토마스 뮌처(Thomas Münzer)라는 목사는 루터가 번역한 성서를 읽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리를 인식하고 용기를 얻어 궐기한 농민들의 편에 서게 됐습니다. 그는 농민들의 주장을 대변했으나, 루터는 그것에 귀기울이려 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지지하고 있던 봉건주와 짝하여 그 탄압에 나섰던 것입니다. 이것은 루터가 교권의 횡포는 철저히 인식했으나 그것에서의 해방의 대상에 대한 인식이 뒤따르지 못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교권의 위세가 주춤해지고 르네상스 이후에 불어닥찬 계몽주의의 태풍 속에서 성서해석권은 '교권'에서 '대학'으로 옮겨져 이른바 학자들이 그 열쇠를 이어받았습니다. 저들은 그 시대정신에 따라 교리와 성서를 구별하고 성서를 역사비판적 방법을 적용하여 분석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모순이 있었습니다. 저들의 목적은 교권 밑에서 형성된 교의적 또는 교리적인 것과 성서를 분리하자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요한 작업동기는 무엇보다도 성서 안에 있는 역사적 사실을 '도그마'로 은폐하지 말고 그대로 밝히자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엉뚱하게 됐습니다. 복음서만 국한해 보더라도 이미 언급한 대로 예수의 행태만이 아니라 그의 말까지 비역사적인 것으로 판정됨으로써 역사적으로 기준을 삼을 만한 근거를 거의 상실하다시피 된 것입니다. 역사비판적 방법의 극치를 이룬 것은 이른바 '양식사학'인데, 그 방법으로 얻은 결론은 복음서에는 역사적 사실이 중심이 아니고 그것을 교리화한 설교인 '케리그마'만이 남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이해의 대상'을 향해 출발한 이 행로가 결과적으로는 다시 교권이 주장하던 것으로 되돌아가는 자가당착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이것은 학문적 추구에서 온 필연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예수를 말하는 복음서가 어떤 취급을 받았나를 추적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는 성서가 경전으로 결정되기 전까지 거의 사복음서를 공적(公的)으로는 아니더라도 구약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경전적 권위로 받아들였습니다. 바울로의 편지 서신들은 그보다 훨씬 일찍 유포됐으나 역시 이차적인 것으로 받아들였을 뿐, 경전으로 인정하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미 위에서 지적한 대로 경전 결정과 교권 확립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인데, 이 시기 이후부터 놀랍게도 복음서들이 민중에게서 격리당하는 운명에 처해졌던 것입니다.

초기에는 복음서 중에서 요한복음이 가장 중요한 경전이었지만 얼마 뒤에는 바울로 서신이 전면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종교개혁시대까지 계속되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중세 기에는 그레꼬 로마 사회에서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 복음서의 부분들을 엮어서 일반에게 공개했습니다. 그리고 바울로의 편지라고 생각되는 서신들과 베드로의 글로 알고 있던 베드로1서를 교본으로 부각시켰고, 복음서 중 특히 공관서는 전체를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성서를 민중에게로의 길을 연 것으로 평가되는 루터마저도 중세기와 거의 꼭 같은 성서해석의 길을 권고 했습니다. 복음서 중에 요한복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한 주장이든지 이른바 '사도적 복음'이라는 개념 밑에 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크게 부각시켜 그것을 안경 삼아 복음서를 읽어야 된다는, 어찌 보면 강요나 다름없는 충고가 그것입니다. 왜 저들은 역사의 예수를 서술하는 복음서를 그렇게 민중에게서 격리하려고 했을까요?

그들의 주장은 그리 중요한 것 같지 않습니다. 오늘의 시각에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복음서의 예수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교회나 사회의 기존 체제에 너무나 위험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민중과 더불어 사는 예수의 행태, 그의 행동이나 언어상의 반(反)율법 내지 반(反)체제적인 과격성, 체제유지적 도덕률에 대한 전면적인 저항 그리고 로마정부에 대한 정치범으로서의 처형 등등이 어떤 완충지대 없이 그대로 민중의 손에 넘어갈 경우의 위험성은 너무나 큰 것이었습니다.

나아가서는 그레꼬 로마 사회에 유포된 지성주의라든지 이성을 바탕으로 하는 철학적 사고 앞에 그대로 내놓을 경우, 예수는 조소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병을 치유하는 데 전력을 기울인 그의 모습이라든지 약자의 편에서 무조건 그들을 위하다가 힘없이 죽어간 그의 생애가 새로운 신으로서의 그리스도로 소개되기에는 당시의 가치관에서 볼 때 너무나 거리가 멀어 보였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미 세력화되고 로마제국과 손잡은 당시 체제로선 예수를 수용할 자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등장하는 '대심판관'은 당시뿐만 아니라 역사의 예수에 대한 교권의 입장과 형태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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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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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로데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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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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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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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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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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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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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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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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