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더 참을 수 없어 일어난 것이 평신도의 봉기입니다. 계몽주의의 바람을 타고 그에 편승한 자유주의 신학의 결과로 교회는 텅텅 비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복음이 민중에게서 소외된 결과가 아니라 교리적 경직성에 대한 염증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신비주의와 광신주의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이 두 가지도 제도화된 교권에 대한 반항으로서 나타난 현상입니다. 기(氣)가 막혀서 죽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적극적으로는 경건운동과 청교도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독일의 경건주의는 바로 이러한 평신도들의 신학에 대한 불신운동과 맥을 같이합니다.
저들은 성서를 읽혀지는 그대로 읽을 것을 주장하고 신학에 저항할 뿐 아니라 기성교회와 거리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성서대로 살려고 힘썼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운동에 가담한 목사들이 생겨났습니다. 저들은 독자적으로 전도단(傳道團)을 조직하고,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리고 교회 밖에 교육관(Gemeinde Hause)을 만들고 성서공부를 했습니다. 블룸하르트(Blumhardt) 부자(父子)의 전기를 읽으면 그때의 경향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개개인들의 전기로 보아서는 안 되고, 그때 평신도들의 동향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영국의 청교도운동도 역시 반(反)신학운동, 반(反)교권운동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저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죽음의 항해를 결심한 것은 자유를 찾아서였습니다. 그 자유는 바로 신앙의 자유입니다. 청교도주의가 얼마나 엄격한 문자주의였나하는 시비를 떠나서 성서를 단순하게 읽으려는, 민중의 신학에 대한 저항을 내포한 행동이라는 점에서 그 적극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들 중에는 심하게는 부부관계에서도 성생활을 거부하고, 현대의 어떤 문명의 이기(利器)도 사용하기를 거부한 그룹들도 있어 기존 교회의 체제와 정면충돌을 일으켰습니다. 저들의 전도열도 대단하여 그것이 세계로의 선교 진출을 가능하게 한 추진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의 운동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수도원 운동입니다. 수도원운동은 이미 2세기 중반부터 시작됐습니다. 그 발단을 동방교회에 두는 사람들은 안토니우스(250년경~356년)를 시발자라고 봅니다만, 서방교회에서도 이미 비슷한 시기에 이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이 운동이 밖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보려고 하나, 평신도들이 제도교회에 불만을 품고 이 운동에 가담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 몇 가지 중요한 이유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교회는 이미 예수의 뜻을 따르는 집단이 아니라 교권을 수호하는 장(場)이 되어버렸습니다. 거기에는 이미 '예수를 배우려는'(imitatio Christi) 분위기는 사라지고, 교권에 순응하는 신도들의 수련장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교회는 날이 갈수록 많은 재산과 힘을 갖게 되었으며, 교리상으로는 세속과 거리를 둔다고 하면서 실상은 권력과 타협으로 연명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 평신도들은 교회만이 아니라 세상 밖으로 나가려는 운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제한되어 있으나 독자적인 영역을 만들고 기도, 성서 읽기, 노동의 삼대원칙을 지켜가면서 금욕생활로 사치해진 교회 지도층에 저항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저들이 사유재산제도를 거부하고 결혼, 가정생활을 포기한 점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자신이 그러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혼을 신성시하고 새크러먼트의 하나로까지 존중하는 교회제도에 대한 저항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의 생활은 나무랄 데가 없고 그들의 주장 중에 정당한 부분이 많아 후기에 교회제도 속에 포용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평신도운동의 근본을 이루는 것은 바로 기성 교회에 대한 불신과 성서학에 대한 저항정신이었습니다.
그러나 평신도운동에도 물론 반동성(反動性)과 그에 따른 과격성이 없지는 않습니다. 성서의 학문적인 해석은 결코 소극적인 결과만 가져온 것은 아닙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성서를 교권에서 해방시킨 것은 학문적인 노력의 결과였습니다. 영적인 해석이라는 아리송한 주장으로 해석권을 독점한 사제들에게서 해방되게 한 것도 학문적인 노력의 결과입니다. 또 성서문자주의에 비끄러매어 법전화하고, 그리하여 완전 박탈당한 자유를 민중에게 돌려준 것도 학문적인 노력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학문적 해석과 평신도들의 이해가 제대로 맞물리지 못함으로써 그 같은 소극적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