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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어떤 운동이든지 그것이 반(反)체제성을 지속하려면 일단 지하에 숨는 잠복기가 있게 마련입니다. 민중의 힘은 음지(陰地)에서 자라며, 그것이 지각(地穀)을 뚫고 나올 때는 정면투쟁을 하거나 아니면 체제의 의복(衣服)을 걸쳐야 합니다. 예수의 민중도 처음에는 지하에 숨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어떤 다락방에 숨었다고도 하고, 후기의 복음서에는 제자들도 방문을 잠그고 있었다는 보도가 자주 나옵니다.

그러나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예수가 처형당한 후의 제자들의 행방이 끝끝내 아리송합니다. 갈릴래아로 갔던(마르코), 예루살렘에 숨어 있던(루가) 저들은 한동안 지하에 숨어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로마제국이 망하는 날만 기다리며 숨어 지낼 수는 없었으므로 교회의 지도층은 양지(楊地)에 나오기로 결정했던 모양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어떻게 처세(處世)할 것인지를 계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반(反)로마적 표현이나 감정을 위장하는 것이 필요하며, 로마로부터 한 종교로서 인정받은 유다교와의 타협의 한계선도 고려하여 그 우산 밑에서 보호를 받을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흔적은 비교적 일찍 씌어진 그리스도교의 고백문을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내가 전해 받은 가장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서에 기록된 대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과 무덤에 묻히신 것과 성서에 기록된 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일입니다"(고전 15, 3~4).

이 고백은 바울로 자신이 말한 대로 바울로 이전에 교회의 고백으로 정식화된 것입니다. 물론 전체 교회가 아니고 주로 이방(어쩌면 안티오키아) 교회의 지도층이 만든 것일 수 있습니다. 바울로는 이 고백을 존중하여 그대로 존중하여 전승하고 있으며, 또 그의 편지 전체의 맥락과도 일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먼저 주목할 것은 "내가 전해 받은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표현입니다. 바울로는 바로 이것이 그 당시에 양지에 나선 교회가 공포한 대표적인 고백이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예수가 죽었다는 사실과 사흘 만에 살아났다는 사실입니다. 즉 예수는 죽었으나 부활했다는 내용이 일찍부터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고백문을 담은 편지가 주전 60년경에 씌어진 것이고 보면 그 고백문은 그보다 훨씬 전에 이루어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주후 40년 이전일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가 로마에 처형된 후 불과 10년 안팎에 형성됐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다시 한 번 이 고백의 내용을 주목해봅시다. 먼저 밝힐 것은 예수가 죽었다는 말은 있으나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게 죽었는지는 일체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의 사실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다 알고 있었을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밝히기를 꺼린 것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 사실의 비(非)역사화의 구체적 실증이며, 음지에서 양지로 나온 뒤 생존이 일차적으로 중요하다고 보는 지도층의 타협적 자세가 전형적으로 표출된 것입니다.

이때 그런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고 '성서에 기록된 대로'라는 말을 삽입해넣었습니다. 이때 '성서'란 당시에는 구약을 지칭합니다만 구약 어디에 예수가 죽어야만한다는 내용이 있는지는 제시하지 않습니다. 사실상 구약엔 그런 대목이 없습니다. 또 아직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는 대로 로마제국이 그를 정치범으로 처형했다는 사실은 만천하가 알고 있는데도 '우리의 죄를 위하여'라는 제의적(祭儀的)인 의미를 나타낸 말로 대치시켰습니다. 그러니 로마가 예수를 죽인 것이 아니라 예수가 스스로 죽었다거나 하느님이 죽였다는 종교적인 언어로 추상화했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살아났다는 것도 어디서, 누구에게 또는 어떻게라는 표현은 전혀 없는 대신, 역시 '성서에 기록된 대로'라는 말로 신비한 이야기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어쩌면 예수의 부활을 민중봉기와 연계시킬 수 있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였는지 모릅니다. 사실상 그처럼 무능하고 비겁한 제자들이 예수의 십자가처형과 더불어 다 도망쳤다고 했는데 그들이 재기(再起)했다는 것은 민중봉기로 오해받을 소지가 충분히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로의 편지가 여러 편 나와 여러 교회에서 돌려보게 될 때까지는 예수사건에 대한 사실을 서술한 문서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우리 손에까지 전해진 마르코복음서가 가장 처음 씌어진 것인데, 그것은 대체로 70년, 즉 예루살렘이 로마에 함락된 전후에 씌어졌습니다. 그러면 적어도 40년의 공백이 생깁니다. 그때까지 예수에게서 일어난 사건은 구전으로 전승됐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까지 사도들을 위시한 교회의 지도층은 사실상의 목격자들이었으니까 그것을 문서로 기록할 필요를 다급하게 느끼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들이나 제1세대 제자들은 그 동안에 무엇을 했을까요? 그들은 교회를 세우고 교회 안팎에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설교에 몰두했었다는 것이 연구가들의 결론이고, 또 실제로 복음서 안에서와 사도행전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파는 복음서의 내용은 한 집단이나 개인이 쓴 예수사건의 서술, 즉 예수전(傳)이 아니라 그가 그리스도라는 주장을 핵심으로 하는 설교묶음이라고 단정합니다. 이 말은 저들이 예수의 역사성에 관심을 둔 것이 아니라,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증언에 치중한 것이 신약 성서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속단입니다.

복음서를 읽으면서 놀라운 점은 이른바 예수의 '제자'들과 예수가 서로 끝까지 상충한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제자들은 예수를 끝끝내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는 그의 공생애를 갈릴래아에서 출발했고, 거기서 제자들을 선출했으며, 민중과 밀월생활을 보냅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어떤 비밀을 안고 있는 듯한 장면들이 간간이 튀어나옵니다. 마르코복음에 의하면 겨우 1년 남짓 민중과의 밀월생활을 끝내고, 이스라엘 민족의 큰 축제인 유월절을 기해서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그때 제자들만이 아니라 일부 여자들을 포함한 추종자들이 상당수 따라갔다고 합니다. 바로 이때,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예수와 제자들이 상충한다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추종자들은 그 길이 바로 메시아왕국이 이루어지고 곧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되는 고지(高地)를 향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태도는 심상치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 않고 로마총독이 주재하고 있는 필립보 가이사리아 근방을 지나면서 예수는 돌연 제자들에게 그에 대한 세평을 묻고, 마침내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묻습니다.

이에 대해 제자들은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마태오복음에서는 이 대답에 예수가 크게 만족하여 고백한 베드로(반석) 위에 교회를 세울 뿐만 아니라 세상의 전권을 위임한다고 되어 있으나, 원자료인 마르코복음서에는 베드로의 대답에 대해서 예수는 옳다거나 그르다는 말 한마디 없이 자신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당하고 처형될 것이라고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마르코의 내용이 옳다는 것은 마태오복음서를 유심히 읽으면 곧 드러납니다. 예수의 이 같은 반응에 제자들은 충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기대하고 상상했던 것과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예수에게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 마치 예수 더러 그러한 발언을 취소라도 하라는 듯이 예수에게 간했다고 간단히 표현되어 있습니다만 아마도 그들이 지닌 메시아론을 펴면서 예수에게 길을 잘못 가고 있다고 경고하는 뜻이 담겨 있을 수 있습니다.

저들의 이 같은 기대를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버려진 땅 갈릴래아에서 도적떼가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철석같이 믿고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나선 마당인데, 아무 결과도 없이 죽기 위해 예루살렘에 간다는 것이 납득될 까닭이 없습니다. 고난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희망을 버리면 민중의 기(氣)를 빼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저들의 희망은 바로 하느님 나라의 도래였습니다. 이제 그날이 올 것을 기대하고 가슴이 부푼 저들에게 죽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말이 청천(靑天)의 벼락이 아니고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는 단호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사랑하던 제자들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서릿발 같은 일갈을 내지릅니다. 아니, 성난 정도가 아니고 그들에게 끝없이 실망했을 것입니다. 마침내 그는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 53). 여기서 '사람의 일'이란 결국 '사람의 욕심'을 말합니다. 대가는 지불하지 않고 수확만 기대하는 사람의 욕심, 고난은 피하고 영광만 노리는 인간의 욕심, 사사로운 지위만 노리고 인류 전체의 살길을 생각하지 못하는 이기심 따위 말입니다.

그러나 마르코복음서대로라면, 제자들은 예수의 이 같은 태도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수용하지도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 그것이 원인이 되어 예수가 체포되자 모두 배신하고 도망쳐버렸는지 모릅니다. 사실상 마르코복음서에는 예수가 가장 아끼는 제자들을 계속 책망하는 것으로 일관합니다. 그것은 저들이 너무나 예수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이 같은 행태를 비교적 장황하게 서술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들이 설교할 적마다 자기들의 잘못을 고백한 것일까요, 아니면 자신이 누명을 쓰는 한이 있더라도 신도들에게 경고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였을까요? 나는 그런 따위의 학설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기에는 그들의 행태가 너무나 추합니다. 그들은 예수 이후에 예수의 민중을 이끌어갈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와 같이 사도, 제자들을 끝까지 맹렬히 비난하고, 마침내 배신자로 낙인을 찍고, 그중에 단 한 사람도 '예수의 복음'의 핵심을 이루는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참여하지도 못했다는 전승을 누가했을까 하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마르코복음을 대본으로 한 루가나 마태오복음에서는 그들에 대한 예수의 책망은 거의 삭제되고 오히려 미화했습니다.

그러면 이 전승의 주체는 누구였을까요? 그 주체는 공적으로 인정 받은 설교자들은 아닙니다. 사도나 제자일 수는 더더욱 없다고 봅니다. 그러면 남는 것은 무명(無名)의 민중들입니다. 갈릴래아에서부터 무조건 예수가 좋아 따르던 민중들, 아무런 전제 없이 예수의 뒤를 따라 예루살렘까지 간 민중들 말입니다. 아니, 좀더 구체적인 주체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최후 순간까지 예수의 십자가처형 현장에서 흐느끼면서 쳐다보는 여인들, 죽은 예수의 시체라도 보기 위해서 새벽같이 그의 무덤길을 찾아나섰던 여인들, 이들이 유일한 증인입니다. 바로 저들이 예수사건 전승의 숨은 원천이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아니라고 믿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민중들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른바 지도층에 대한 불신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유야 어떻든 예수의 사실을 은폐하거나 변조하면서까지 교회라는 조직을 지탱해나가려는 저들의 부당한 자세, 한걸음 나아가서는 여자를 깡그리 무시해 버리는 가부장적 남성 위주의 권위주의를 배격하고 나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상의 짐작이 맞는다면, 예수에 대해서 처음부터 두 가지 형태의 다른 전승이 계속됐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예수의 사건을 교리화하여 하느님의 종교집단을 만들려는 흐름과 또 하나는 역사 안에서 실제로 일어난 한 인물의 운명 속에서 자신들의 한(恨)과 고뇌, 그리고 희망을 체험하고 이것을 세상에 알리려는 그런 흐름 말입니다.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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