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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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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마르코복음의 성립

이미 앞에서 언급한 대로 마르코복음은 유다 전쟁 이후 로마에 완전히 삼켜진 70년대 전후에 씌어졌습니다. 저자는 다른 복음서의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익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르코복음서가 없었던들 어쩌면 예수의 사건이 이만큼이라도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가 코이네 희랍어로 복음서를 쓴 것을 보면 그는 다른 복음서의 저자들처럼 이미 팔레스틴을 떠나 이방 땅인 헬레니즘 영역에 살고 있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 자신은 물론 예수사건의 목격자도 아니고, 팔레스틴의 지리에도 밝지 않은 것을 보아 본토 태생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의 설교 등으로 그리스도교의 주장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고 해도 누구를 통해서 예수에게서 일어난 사건을 그처럼 구체적으로 전해 들었을까요? 적어도 기록상에는 사실을 전달했다는 구절은 어느 한 곳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의 관심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교의(敎義)가 아니라 그의 생애 자체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뒤를 따른 이름없는 민중들의 구전을 전수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이후의 상태를 알 수 없는 갈릴래아 지방에서 민중의 전승을 이어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가장 중요한 시점에서 예수를 배신한 제자들과 대조되는 여인들에게 관심을 집중한 것을 보면, 그에게 구전한 것은 바로 그 이후에 종적을 감춘 막달라 마리아거나 그를 포함한 여인들이었다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상상이 어느 정도 타당하다면, 역시 복음서도 민중에 의해서 전승된 글인 것입니다. 이것이 마르코 자신이나 혹은 그후의 편집과정에서 역사성이 퇴색하고 교의적인 내용이 가미됐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로는 마르코복음서를 읽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비록 문서화된 복음서는 못 읽었어도 예수의 사건은 얻어들었을 법한데, 위에서 추론해본 이유 외에도 '유언비어 '처럼 근거 없이 떠도는 이야기를 그의 그리스도교 교리 정립의 바탕으로 삼을 마음은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상 그는 십자가사건과 빈 무덤의 증인인 여자들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으며, 특히 갈릴래아라는 지방 이름도 결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 수수께끼를 온전히 풀 길은 없으나, 그 나름의 이유는 있습니다.

바울로가 그리스도교에 접한 것은 물론 갈릴래아도 아니고, 팔레스틴도 아닌 이방 땅 안티오키아였습니다. 그러니 헬레니즘 영역에 세워진 교회원들에게서 전승받은 것입니다. 헬레니즘 영역의 교회가 역사의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그리스도론을 펼친 진원지입니다. 민중의 친구 예수를 신격화하여 예배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예수에 대한 존경심이 그만큼 컸다고도 볼 수 있으나, 더 중요한 것은 그레꼬 로마 세계를 지배하는 당시의 사고체계의 기본틀인 헬레니즘의 옷을 입히는 것이 '전도'에 절대로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가령 메시아는 히브리 말로 '기름 붓는다'는 뜻이기에 희랍어로 '크리스투스'로 번역했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유다인 아닌 사람들이 알 까닭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재빨리 '크리스투스'를 예수의 고유명사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 크리스투스라거나 단순히 '크리스투스'라고도 부르던 혼란의 흔적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 유다 사회를 배경으로 해서는 예수의 사실을 말하는 데 참 애로가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서에는 간간이 유다 풍속부터 소개한 데가 있습니다.

하여간 외국 땅에 자리잡은 그리스도교회에서는 예수의 사건보다 그것을 교의화하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그러므로 팔레스틴의 예수가 아니요, 유다가 아닌,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이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을 설명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객관적인 근거를 제시하는 설명이기보다는 선포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선포'라는 희랍 말의 동사가 '케릭세인'이기에 그것을 '케리그마'라고 합니다. 그들은 이 케리그마의 틀로서 헬레니즘에 유포된 영지주의적 세계관을 동원했습니다.

영지주의는 희랍문화가 중동아시아의 고대종교와 접촉하여 생겨난 제笠1 세계관인데, 그 골격은 철저한 이원론(二元論)입니다. 그것을 몇 마디로 줄이면 이렇습니다. 세상은 본래 빛과 어두움이라는 영원히 평행선을 긋는 두 세계가 있다. 그러나 우발적인 사고(事故)로 빛의 세계의 아들이 이 어두움의 세계의 포로가 되었다. 육체는 바로 어두움의 가시적인 표현인데, 빛이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버렸다. 그후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포로가 된 빛의 아들은 그의 본향인 빛의 세계뿐 아니라 자신의 본질마저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를 구원하는 길은 육체에서의 해방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의 본질을 알리고 본향을 알려서 그 사실을 인식하게 하는 일이 앞서야 한다.

이것은 해탈의 출발은 깨달음(覺)으로 시작된다고 보는 불교의 사고와 흡사한 데가 있습니다. 즉 혼미 속에서 깨어나는 것이 해탈의 첫걸음이라는 말입니다. 깨어난다는 것은 우리말로 하면 잠이 깸으로써 자의식으로 돌아온다는 뜻도 되지만 동시에 포로가 된 것을 깨는(破) 일인데, 그것은 인식을 실천으로 옮길 때 가능한 것입니다. 바로 이런 해방을 위해 빛의 세계에서 구원자가 세상에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철저한 이원론에서 볼 때 육체를 쓸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쓴 듯이 위장하고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현설(假現說)이라고 합니다. '케리그마'는 바로 이런 세계 구원의 틀을 이용한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이원적 언어도 동원했고(빛―어두움, 삶―죽음, 선―악, 신―악마 등등), 또 그리스도론도 그런 사고를 정식화했습니다. 케리그마가 눈에 가장 잘 띄는 것은 요한복음이지만, 바울 편지 등에도 곳곳에 그 틀과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언어는 헬레니즘에서 왔으나 '가현설'은 한결같이 배격했습니다.

예수의 사건을 팔레스틴에 국한시키거나 당대의 한 사건으로 치부해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그리스도론은 다음 두 가지 점에서 예수의 참모습을 오도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첫째는 바로 영지주의의 세계관이 그 당시의 희랍철학에 물들었고, 언제나 새로운 지식을 갈구하는 지식층의 사변적 산물로서 민중들의 현실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사변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들의 삶의 현실, 거기서 얻은 경험, 욕구 등을 묵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그리스도론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예수와 더불어 나눈 생생한 사건을 영원히 땅에 묻어버릴 소지가 크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예수에 대한 민중의 증언은 많이 묵살되었던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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