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흔히 자신보다 신분이 높거나 지식이 많은 사람들을 동경하여 그들을 모방하기 쉽습니다. 그것은 열등감에서 해방되려는 일종의 본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개는 '자기상실'밖에 가져다주는 것이 없습니다. 자기의 체험을 스스로 멸시하고 주체의식을 포기하기 때문에 성서의 성립과정에 적극 참여하지 못하거나 해석권도 더 지체 있는 사람들에게 자진해서 내맡기는 역사가 자주 일어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성서는 철학도 아니요 그렇다고 불교의 '화두'같은 것도 아닌 쉬운 이야기책입니다. 이것은 글자를 읽을 수 있고 읽는 법(文法)을 알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 서로 모순되는 것도 있고 상충되는 것도 있으나 모르면 모르는 대로 넘겨도 큰 줄거리를 아는 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동양에도 무슨 책이든 백독(百讀)만 해라, 그러면 그 뜻은 저절로 알게 된다는 무사자습(無師自習)의 교훈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려운 외국어로 된 책을 두고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 성서는 각 나라 말로 잘 번역되어 있습니다. 한국 말에도 여러 가지 번역이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원문(原文)을 읽지 않으면 모른다, 해석학을 별도로 학습하여 안목을 얻지 않으면 전혀 알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는 여러 가지 복잡한 해석방법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지름 길이 될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방해도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속아서 안 되는 것은, 첫째로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성서를 모른다는 협박입니다. 그러나 원문도 모르고 해석학을 모르고도 그런 과정을 거쳐 간신히 도달한 결론보다 훨씬 빨리 그리고 명쾌한 해답을 얻는 경우는 얼마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른바 학자 또는 전문가들에게 세뇌당해 처음부터 자기 이해능력에 회의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너무 오랜 세월 한 책을 놓고 너무도 많은 갈래의 해석이 나와서 성서학을 하다보면 그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고 '아닌 것' '비본질적'인 것을 가려내는 데 모든 힘을 다 쏟아서, 본뜻의 문턱에도 못 가보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또 누구는 어떻게 해석하고, 누구는 이런 학설을 말한다고 소개하다가 자기 뜻은 하나도 제시 못할 뿐 아니라, 성서 본문 대신 그 '누구, 누구'의 학설만 나열한 책을 많이 봅니다. 이런 책은 언뜻 보아 객관성이 있고 무게를 더하는 듯하나, 실은 내가 정작 만나야 할 대상 사이를 첩첩이 가로막고, 통행료를 강요하는 격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크게 경계할 것은 욕심입니다. 성서를 무슨 요술 방망이로 아는 이들이 많은데, 그런 이들은 백독(百讀)이 아니라 천독(千讀)을 해도 그 눈을 뜨지 못합니다. 성서는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하면 그런 것들이 쏟아져나오는 요술 방망이가 아닙니다. 마치 광산 이면 다 금이 묻힌 곳인 줄 알고 아무 광산에나 마구 삽질을 해봐야, 금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 책에는 돈 버는 기술도, 아들 낳는 방법도, 승진하는 길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알려면 시중에 쏟아져 나오는 온갖 잡지를 탐독하세요.
필자는 무슨 책을 읽거나 어떤 사물을 대할 때 전체, 즉 '전이해'(前理解)를 갖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그 책이나 사물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책이나 사물을 바로 읽거나 바로 관찰한다는 증거는 그런 '전이해'들이 하나하나 껍질이 벗겨지는 것을 경험하는 일부터 시작되는 법입니다. 그런 '전이해'가 깨지는 과정에서 온갖 욕심은 없어지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전혀 다른 것, 새로운 것을 만나게 될 때 우리는 사물의 핵심에 다가서게 됩니다.
필자는 그런 소원을 갖고 지금까지 예수의 이야기를 '학문'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평신도의 자세로 재현했습니다. 그런데 그 작업을 하는 중에 필자는 예수의 관심이나 언어가 나의 그것과 얼마나 차이가 크냐! 하는 것과 또한 이른바 학문적인 것에 내가 얼마나 오염되었나!를 깨닫고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감정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말들을 얼마나 많이 잃어버렸는가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