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예수? 왜 예수면 예수이지 역사의 예수라고 하는가? 그것은 성서에 인간으로서 역사적으로 생존한 예수와, 이미 믿음과 예배의 대상이 된 '그리스도'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칭호 또는 단순히 예수나 그리스도라는 칭호 안에 포괄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에는 복음서들에 서술된 내용을 아무 비판 없이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절대 조건으로 했다. 따라서 역사의 예수와 예배의 대상인 그리스도 사이에 아무 구별도 짓지 않고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객관적 학문의 대상으로 삼으면서부터 전에는 터부시되었던 물음을 제기하게 되었다. 그것은 복음서에 기록된 내용이 어디까지가 역사적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신앙의 고백이냐하는 물음이었다. 그것은 남의 고백에만 의존해서가 아니라, 직접 예수의 역사적 모습을 알고 싶으며 그 앞에서 자율적 고백을 하고 싶은 바람에서였다. 이 같은 바람은 그리스도교가 발전하면서 그리스도론을 발전시켰는데, 그것이 지나치게 교리화되고 그 그리스도상은 이미 세력집단이 된 그리스도교의 지배이념이 되어버려서 참 예수의 정신을 사장해버렸을 뿐 아니라 그에 반역하는 것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성서를 과학적으로 연구한 결과 분명해진 것이 있다. 그것은 복음서는 예수라는 한 개인의 생애를 그대로 반영하는 전기가 아니라 예수에 대한 신앙적 고백서라는 사실이며, 그 고백은 어느 한 개인이 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의해서 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므로 복음서의 중심인물인 예수의 상에는 역사적 사실과 신앙적 고백이 응결되어 있는 것이다. 지난 백여 년 동안 사람들은 이 같은 성격의 복음서의 서술에서 역사의 예수의 원모습과 신앙의 대상이 된 그리스도론을 구별해내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거듭해왔다. 그 노력은 이 두 요소가 공동체에 의해서 계속 반복되는 동안에 응결되어 한 편의 설교처럼 섞여버린 사실을 발견했다. 이렇게 형성된 복음서에서 역사의 예수를 가려내는 일이 순수한 의미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어려운 과제임을 깨닫게 되자, 애당초 역사의 예수를 재현하는 일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성서의 성격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생겼다.
이 같은 난제를 놓고 연구가 진행됨으로써 성서(복음서) 본문 구성을 이른바 역사비판적으로 분석하면서 그 전승과정을 밝히고 그 문학적 표현양식 등을 드러내어 점차 달라진 과정을 밝혀냈다.
한편 고백된 예수상은 역사의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고백인 한, 그 안에는 엄연하게 역사의 예수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그 고백 안에 역사의 예수가 포함된 것이 틀림없으며, 그러한 역사의 예수를 찾으려는 노력을 포기해선 안 된다는 입장도 있다.
비록 고백된 예수가 그리스도이고 우리 신앙의 대상이 그리스도라고 해도 어떤 이, 어떤 생, 어떤 말씀을 하신 이를 그리스도라는 신앙의 대상으로 고백하게 되었는지를 묻는 것은 그 신앙의 내용을 아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우리의 신앙고백을 위해서도 절대 불가결한 과제라는 것이다.
예수는 우리가 사는 역사영역에서 생존했고 거기서 가르치고 거기서 죽었다. 즉, 우리의 인식영역에 들어온 분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소크라테스나 공자나 석가의 생을 재현할 수 있는 정도로 역사학적 방법으로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역사의 예수라는 이름이 크게 부각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