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시대사를 알려면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B.C 324~323년) 때까지 소급해야 한다. 그는 헬라문화에 도취된 사람으로서 그것을 전세계에 퍼뜨리는 것을 사명으로 안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요절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시리아와 에집트를 장악했던 현지 사령관인 셀류커스와 프톨레매오가 왕국을 수립하는 계기를 가져다주었다. 그들은 번갈아가면서 팔레스틴의 지배세력으로 군림하여 중동과 유럽 일대에 큰 전환기를 가져오게 했다. 그중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정치적 대이변에 따른 문화적 변혁이었다. 헬라문화가 중동의 고대 종교와 접촉하여 일방적으로 자기관철을 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 영향을 받음으로써 제삼의 혼합적 문화현상인 헬레니즘이라는 문화권을 형성한 사실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주권 침해를 받은 것만이 아니라 헬레니즘이라는 문화적 공세를 받게 되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의 신앙(종교)에 커다란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셀류커스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일명 에피파네스) 때에 와서는 극에 달했다. 그는 10년간 팔레스틴을 완전 점령하고 있는 동안 유다인을 박해하는 데 온갖 악랄한 수법을 썼을 뿐 아니라, 유다교의 말살정책을 조직적으로 펴나갔는데, 그것은 바로 반유다교적인 풍물을 도입, 강요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도구로 사용된 것이 바로 헬레니즘 문물이었던 것이다.
이때를 배경으로 씌어진 책이 저 유명한 다니엘서이다. 이에 더 견 딜 수 없어 궐기한 것이 저 유명한 마카베오라는 일가를 중심으로 한 독립전쟁이며, 그 봉기가 성공해서 한때 독립국의 행복을 누렸으나 겨우 79년 만에 신흥 세계제국인 로마에 의해서 다시 속국의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B.C. 63년).
그후 여러 곡절을 거쳐 이두메 혈통인 헤로데가 로마의 앞잡이로 팔레스틴 전역의 통치권을 쥐게 된 주전 37~주후 4년의 통치기간은 이스라엘이 갖은 희롱을 당한 시기였다. 헤로데는 간교하고 권모술수에 능한 두 얼굴의 위인으로, 한편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신봉자로서 헬레니스트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가장 유다적인 양 이스라엘 고대의 성지를 찾아 재건하며 예루살렘 성전을 확대 보수했다. 그는 로마정부에 유다 지방, 특히 예루살렘 안에서의 종교적 전통과 관습을 존중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어 유다 종교귀족들의 환심을 사려 했으며, 도시 건설과 개간지를 확대하여 집단 이주시킴으로써 민생문제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중은 그를 언제나 증오했으며, 여러 차례 유혈 저항을 시도했으나 헤로데가 자기 아내와 자식들 그리고 장모까지 죽여버리는 잔인성에 어쩔 수 없이 정면충돌을 피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마태오복음에, 그가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두 살 이하의 어린이들을 다 죽이라고 지시했다는 전설은(마태 2, 16) 사실인지 입증할 수 없으나, 그의 잔인성과 일치되는 얘기다. 그가 죽었다는 오보로 유다 민중이 궐기했다가 또 한 번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체포된 일도 있었다. 그는 체포된 사람들을 그의 생전에는 죽이지 않고 죽는 순간 처형하여 그들의 가솔들이 통곡하게 함으로써 마치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 같은 장면을 기대했다는 전설은 그가 얼마나 악덕한 군주인지를 자신도 알고 있었고 또 세론이 그를 그러한 위인으로 단정한 증거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는 죽을 때 여러 아내에게서 난 자식 중 셋에게 그가 통치하던 지역을 분할해줄 것을 로마제국에 유언으로 남겼다. 로마제국은 그 유언을 대체로 시행했으나, 왕권 양도는 허락하지 않고 각기 봉건주로 임명했다. 아르켈라오(Archelaus, 주전 4~주후 6년)는 유다 지방, 헤로데 안티파스(Herod Antipas, 주전 4~주후 39년)는 갈릴래아와 페레아 지방, 그리고 필리푸스(Philippus, 주전 4~주후 34년)는 북요르단 지방을 분배받았다. 마태오에 따르면, 예수가 헤로데가 죽은 해에 났으니까 주전 4년이 성탄의 해가 된다. 그러나 루가에 따르면, 시리아 주재 로마총독 퀴리노(Quirinius)가 세금 징수를 위한 호구조사를 하던 해라고 했는데, 그에 따르면 주후 6년이 된다. 그러나 대체로 주전 4년설을 따르고 있다.
그렇게 보면, 예수는 안티파스가 봉건주가 된 해로부터 같은 지역에서 일생을 보낸 셈이다. 그 안티파스가 세례자 요한을 체포 처형한 장본인이다. 마르코에 의하면(마르 6, 17 이하) 세례자 요한이 안티파스의 불륜을 책한 탓에 그를 처형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유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민중을 선동하는 위험분자로 낙인 찍혀 체포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