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식민지 정책은 관대했다는 평이 있다. 점령지의 종교나 풍습을 되도록 방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문화정책에 대한 일방적 평가일 뿐이다. 저들은 그 대신 경제 착취와 더불어 원주민의 상류층을 매수하여 어용화하며, 반(反)로마운동에 대해서는 잔인한 폭정을 실시했다.
유다인에게는 그들의 종교와 관습에 따르는 치리권이 비록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허용된 상부구조로서 산헤드린이라고 부르는 의회기관이 있었다. 산헤드린은 종교귀족인 사제계층, 지주계층, 씨족의 대표로 된 원로계층 그리고 율법을 연구하는 계층인 율사(서기관)들로 구성되었는데 그 수는 70인이며 그 장(長)은 대사제로 되어 있었다. 예수 당시에는 바리사이파가 득세하여 율사의 지명으로 의원으로 등용되었으며 세력도 컸다. 대사제는 동시에 예루살렘 성전의 장으로서 성전을 관장했다. 그 아래 사제장들로 구성된 소위원회가 있어 사제계층을 통솔하고 성전의 임무를 그대로 수행하게 했으며, 로마로부터 국민에게 성전세로 십일조를 받을 권리를 얻어냈다.
이러한 체제에서 대사제의 위치는 유다 민족 전체를 대표했다. 그러나 그가 로마의 어용으로서 임무를 수행하지 않고는 그 자리를 부지할 수 없었음은 자명하다. 임무는 그에게 한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산헤드린과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은 로마의 특혜 보호시이면서 동시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어용적 체질을 지니게 되었다. 예루살렘은 다윗의 왕도가 된 이래로 하나의 성도(聖都)로 간주되고 메시아사상마저 이 도시와 결부되었기 때문에 유다인에게는 심장이나 같았다. 유다인은 바로 그러한 자부심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예수가 "강도의 소굴"(마르 11, 15 이하)로 만들었다고 채찍을 든 것은 상징적인 말이 아니다.
예루살렘이 유다 집권층에 의해 부패된 것에 분개하여 탈(脫)예루살렘을 주장한 신앙 동지들이 있었다. 저들을 하시딤이라고 부른다. 저들은 외세를 추방하고 하느님의 주권만을 인정하는 마카베오 싸움에 가담하여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탈환한 마카베오 가(家)가 하스몬왕가로 변신하고 타락하기 시작했을 때 그 곳을 떠나 광야로 나간 것이다. 그 뒤에 두 계열이 생겼다. 하나는 예루살렘이요, 다른 하나는 탈(脫)예루살렘파다. 탈예루살렘파는 예루살렘 자체를 반대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권력이나 종교를 독점한 지배층을 부정ᆞ거부한 것이다. 이러한 분류를 예수 당시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다.
예루살렘파에는 집권한 사제계층, 산헤드린 의원들 그리고 바리사이파가 속했다. 사제계층에는 사두가이파가 잘 알려진 계보로 세력이 컸으며, 바리사이파는 본래 하스몬왕조 때부터 율법의 생활화라는 목표 아래 대중운동을 펴나갔는데 그 정신직 모체는 하시딤이었다. 저들은 하스몬왕조에게 박해를 받은 때도 있었으나, 결국 그들의 영향력이 인정되어 권력권에 수용됨과 더불어 당시 체제의 이념 구실을 했으며, 따라서 유다의 대중의 생활을 감시하며 죄인을 색출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 예루살렘파의 특징은 역시 어용적이고 현실주의가 지배했기 때문에 종말론이나 하느님 나라 도래에 대해서 교리상으로는 인정했으나 현실적으로는 거부했다.
이에 비해서 탈(脫)예루살렘파로서는 역시 하시딤의 정신을 이어 광야에서 고행적 공동체를 구성하고 내일을 위한 준비를 꾸준히 한 에쎄네파, 다분히 그 계열에 속했다고 생각되는 세례자 요한파가 있으며, 약간 성격은 다르나 대(對)예루살렘 자세에서 공통분모를 가진 젤롯당이라는 독립운동단체가 있었다(이 당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언급함). 이들의 특징은 모두 예루살렘을 등지고 광야로 나아 갔다는 것과 "하느님의 주권만"이라는 철저한 신앙, 그에 따르는 확고한 종말사상이다. 그리고 반로마적이라는 점에서도 공통되었다. 이 밖에 경제적 상황을 들어야 하겠으나, '갈릴래아'를 말할 때 언급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