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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지금까지 계속 예수의 행태에서 그의 관심의 대상이 어떤 계층이었는지를 보아왔다. 그것은 바로 민중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기본입장은 그의 '언어'에서도 충분히 반영된다. 그의 가르침의 언어의 성격, 그리고 그의 언어의 소재를 살펴보면 그의 관심의 대상이 부각된다. 그의 관심의 대상은 바로 그의 행태에서 다 나타나지 않은 것까지 포괄적으로 나타낼 것이다.

예수의 언어는 이야기(narative)이다. 이 점은 바울로의 경우와 대조적이며, 헬레니즘에 물들기 이전의 구약의 전통과 상통한다. 이야기는, 논리라는 틀에 담은 것도 아니며, 어떤 개념을 설정하고 그로부터 다른 개념으로 넘어가면서 그 사이를 논리로 잇는 따위의 사변적 가공으로 현실과 유리할 수 있는 이른바 지성적 언어가 아니다. 이야기는 우선 구전 전승이 그 특징이다. 민중들이 문자를 사용하지 않고 또 문자화를 꾀하거나 공적(公的)인 공개를 전제하지도 않고 삶에서 우러나온 경험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 민중언어다. 그러므로 민중언어를 논리적으로 분석하면 그 생명을 잃는다. 그것은 모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삶이 반드시 합리적이 아니기 때문에 삶 그대로를 노출하다보면 그렇게 되어지는 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아무튼 민중언어로서의 이야기는 통째로 무엇인가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것을 알려면 머리만으로는 되지 않고 전체로서만 터득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런 삶을 살 때에만 이해되는 것이다.

예수의 언어 중 가장 특징적이며 핵심적인 것을 담은 것은 이른바 그의 비유들이다. 그런데 그것은 이야기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살리는 것은 그의 언어성과 그의 관심사를 아는데 아주 중요하다. 그 비유는 반드시 가공적으로 고안해낸 것이 아니라 대개의 경우 그때그때 민중 사이에서 얘기되던 것, 아니면 민중 사이에서 화제거리로 되어 있던 것, 그리고 그들의 일상생활에서 늘 경험하는 것들을 소재로 했다는데 특색이 있다. 그러므로 비유라고 해도 어떤 것은 실제로 목격한 경험을 얘기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비유라고 규정된 것 외에 경험담 같은 것도 주목해야 한다.

마르코 편자는 예수에 대해서 이야기로 출발해서 얘기로 끝낸다. 그러므로 바울로의 전개적 그리스도론과 범주를 달리한다. 요한복음을 뺀 다른 복음서들도 이 전통을 따랐다. 마르코가 처음 수집한 자료는 민중 사이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른바 구전전승자료(口傳傳承資料)라는 것이 상식이 되었다. 그만큼 그 내용은 생생하다. 그 얘기는 전개적이 아니고 짧고 간결하다. 때로는 그 주제로 출발하는 듯한 시작과 이야기의 내용이 다르다. 이렇게 다르다고 느끼는 것은 논리적 훈련을 받은 자의 눈에 비치는 것일 뿐, 민중은 그 안에서 모순을 보지 못한다. 예수의 언어도 그렇다.

가령 하느님 나라의 비유에서 "하느님 나라는 ……과 같다"고 하면서 한 농부가 뿌린 씨가 옥토와 자갈밭에 뿌려졌는데 그 결과 하나는 많은 열매를 맺고 다른 하나는 곧 말라 죽어버린다고 끝맺는 경우에 도대체 무엇이 하느님 나라와 같다는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없다. 분석에 익숙한 자들은 하느님 나라가 씨 자체냐, 아니면 옥토에 뿌린 씨냐, 아니면 농부 자신이냐 등을 따지려고 하나, 옳은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다. 아마 그렇게 말하는 예수에게 직접 물어도 설명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청중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전체로서만 알 수 있는데, 엄밀하게 말해서 농사를 지어본 민중이면 몸으로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또는 내 이웃이 누구냐는 질문에 "이웃이란……" 하고 정의를 내리는 대신 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에게 당한 사람을 구해주는 얘기를 하되 그대로 지나가버린 제사장, 한 레위인과 대조한 다음 누가 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고 질문한다. 이것이 개념을 논리로 꿰매는 지성적 언어와 다른 민중언어의 특색이다. 이것은 그의 삶의 현장을 엿보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우선 그의 언어는 그가 사는 풍토를 말해준다. 그는 결코 지식층을 상대한 것이 아니다. 헬레니즘에 물든 지식층은 물론 아니고, 이른바 율법학자도 아니다. 율법학자의 언어는 헬레니즘 지식층의 언어와는 다른 법률가적인 것인데, 예수의 언어에는 그런 것이 없다.

예수의 언어에서 쓰이는 소재 중 많은 부분은 농경문화와 깊은 관계가 있다. 농사와 관계된 것을 소재로 삼은 이야기가 무수하다. 씨 뿌리는 비유(마르 4, 3~8), 자라는 씨의 비유(마르 4, 26~29), 겨자씨의 비유(마르 4, 30~32), 포도원 비유(마태 20, 1~16), 곡식과 가라지 비유(마태 13, 24~30), 잃어버린 양의 비유(루가 14, 4~7) 등등 그가 쓰는 단어에서는 새, 꽃, 추수, 열매, 밭, 장기, 누룩, 목동 등 모두 농경사회적 환경을 반영한다. 예수의 관심은 일차적으로 농촌의 농민이었다. 갈릴래아의 농민은 위에서 지적한 대로 수탈의 대상이었다. 적어도 마르코복음에 그가 예루살렘을 제외한 도시로 나들이한 기록이 없는 것은 우연이 아닌 듯하다. 그는 농촌에서 농촌으로 다니면서 저들에게 관심을 모았기에 그의 언어에도 저들의 일상 생활이 크게 부각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목숨을 위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마라"고 하고,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들에 백합을 보라, 저들이 아무것도 안해도 하느님이 먹이고 기르는데 하물며 너희야!" 하고,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마라. 내일 염려는 내일에 맡길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 것으로 넉넉하다"(마태 6, 26 이하)고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씀의 대상은 농민이다. 그 농민들은 그날 그날 먹고 입는 것 때문에 불안했으며 예수는 그 고통을 알고 있었다. 농민이 아니고는 하늘의 새, 들에 핀 백합의 생리로 위로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그의 시선은 가난과 외로움의 상징인 과부에도 멎는다. 한 과부가 자기가 가진 것을 몽땅 헌금으로 바치는 것을 주목한다. 그의 총재산인 그 렙톤이었다. 그것은 반 되 가량의 밀을 살 수 있는 아주 적은 돈이기에 부자들의 헌금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궤에 돈을 넣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구보다도 많이 넣었다"(마르 12, 43)고 선언한다. 그의 시선은 남들이 무관심한데 머물렀을 뿐 아니라, 그의 판결은 하느님이나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것은 그 과부의 행동을 보는 그의 사랑에서 나온 행위이다. 이 판결은 바리사이파를 공격하는 말씀 중에 "과부의 집을 삼킨다"(위 구절)는 책망과 결부시킬 때 더 입체적으로 들린다. 억울한 한(恨)이 맺혔으나 힘이 없어 하느님도 사람도 안중에 없는 악덕 재판관에게 집요하게 매달림으로써 그를 승복시키는 과부의 투지와 신념에서 하느님마저 움직이는 힘을 본다(루가 18, 1).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과부에게 아들을 살려주는 이야기도 과부에 대한 그의 관심의 표시이다(루가 7, 11 이하).

이른바 '성인을 위한 사회'라는 유다 사회에서 여인과 어린이는 사람 축에 못 들었다. 아이는 13세부터 율법을 아는 자로 비로소 사람으로 인정되었고, 여인은 남자의 재산목록의 일부였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여인과 어린이에게 관심을 쏟았으리라. 예수 주변에 여인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유다 사회에서는 결코 명예스러운 일이 못 되었다. 라삐는 여인을 제자로 삼는 것을 금지하는 판이었고, 여인이 자기 자식에게 토라를 가르치는 것까지 금하는 판이었으니까!

그러나 예수의 말씀에는 여인들이 자주 등장한다. 많은 병든 여인을 치유하는 이야기 중에 18년이나 병마에 신음하는 여인을 안식일이라고 해서 고쳐주는 것에 반항하는 자들에게 "너희 위선자들아, 너희 가운데 누가 안식일이라고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 끌고 나가 물을 먹이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인이 18년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있었으니 안식일에라도 그 매임을 풀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루가 13, 15~16)고 하였다. 이는 아브라함의 아들에 대해 '아브라함의 딸'이라는 것으로 똑같은 인간 대우를 천명하는 것이며, 그를 병마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안식일법을 범해도 좋다는 것으로, 당시의 유다 사회에서는 충격적인 선언이었다. 이러한 여인에 대한 관심은 푼돈을 잃고 찾는 여인(루가 15, 8 이하), 누룩을 가루에 넣고 반죽하는 여인(루가 13, 20~21) 그리고 사람으로서는 최고의 칭찬인, 온 세계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사람이 한 일이 전해져서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한 바로 그 사람도 여인이라는 사실이다(마르 14, 3 이하). 이러한 이야기들의 장면 하나하나가 얼마나 사실적(史實的)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예수가 여인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다면 복음서 편자들이나 예수의 말씀 전승자들이 그런 이야기를 창작해낼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와 더불어 어린이에 대한 예수의 시선을 도의시할 수 없다. 성서에는 사람들이 어린이를 예수께 데려왔다고 했는데 그는 그 아이의 어머니였을 것이다. 하여간 예수의 제자마저도 어린이를 멀리하는 풍토에서 예수는 어린이를 사람 앞에 내세워 어린이를 하느님 나라의 상징으로 쳐받들었다(마르 10, 13 이하; 마태 18, 1 이하).

예수가 온몸으로 관심을 기울인 대상은 음지에, 그리고 저 밑에서 신음하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맹인, 절뚝발이, 나병환자, 귀머거리, 가난한 자 등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대한 자기의 행태 보고의 말씀에도 있지만, 만찬회의 초대 비유에서도 같은 대상을 나열하며(루가 14, 21), 예수가 오신 목적을 선언하는 데서도 이와 비슷한 내용의 것을 인용한다(루가 4, 18). 이것이 사실상 그의 생애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우리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느님의 나라가 저희의 것이다. 지금 굶주린 사람들은 복이 있다. 지금 슬피 우는 자들은 복이 있다"로 시작되는 축복의 대상을 열거(루가 6, 20 이하)한 데에서 큰 충격을 받고 되도록 그런 과격한 언어를 부드럽게 하려고 마태의 서술(산상수훈)을 채택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루가의 것이 원래의 것임이 정론이다. 그보다 한걸음 나아가서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떠돌이) 되고 헐벗고 병들고 그리고 감옥에 간 무명의 존재들과 자신을 일치시킨 최후심판의 비유 속에(마태 25장) 담긴 그의 관심의 대상에 대한 심각성에서 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그의 시선의 초점은 언제나 세상의 무관심 속에 버려진 자들이 머물고 있는 음지, 저 낮은 곳에 있었다는 것이 그의 행태에서 뿐 아니라 그의 말씀 안에서도 충분히 반영된다는 것이다.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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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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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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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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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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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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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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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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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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