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집

전집은 OCR 스캔 잡업으로 진행되어 오탈자가 있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등록해 주시면 관리자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수정 요청을 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2. 본문을 읽는 중에 오탈자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앞뒤 텍스트와 함께 마우스로 선택합니다.
3. 그 상태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타나는 창에서 수정 후 [수정요청]을 클릭합니다.
4. 각주의 경우에는 각주 번호를 마우스오버하여 나타난 창을 클릭하면 수정요청 창이 열립니다.

※ 컴퓨터 브라우저에서만 가능합니다.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1) 하느님 나라의 선포

"때가 찼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르 1, 15).

이것은 예수 설교의 집약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예수의 설교는 그 나라의 도래를 전제로 한 것이다. 그 나라는 역사의 종말을 뜻한다. 그러므로 예수 설교의 모든 것은 종말적 성격을 띠었다. 그런데 이미 언급했듯이 예수는 단순히 그 나라의 도래를 선포한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도래를 앞당기려는 '거인'처럼 그것을 저지하려는 악마의 세력과 대결하는 전선에 나서서 싸운다는 확신을 가졌음을 역력히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단순한 '기대'라고 볼 수 없으며, 그 나라가 정적(靜的)인 것이 아니고 도래하는 현실(動的)인 것처럼 그의 선포는 그의 행동의 한 부분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그는 관조자가 아니라 그 나라의 도래를 위한 하나의 운동가인 것이다.

하느님 나라 도래의 선포는 예수에게서 발단된 것은 아니다. 이미 구약에도 그 흔적이 있고 유다교에서 계속 구체화되고 그 열망이 가속화되었는데, 묵시문학파에 와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런데 그 특색은 혼탁한 역사와 이에 따른 수난과 함수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묵시문학이 하나의 책으로 처음 나온 것은 다니엘서이다. 그것은 바로 위에서 언급한 에피파네스의 박해 때에 이루어진 것인데 그로부터 주후 1세기 중엽까지 묵시문학운동이 활발해졌다. 이 시기는 가장 비참한 고난의 기간이며 동시에 최후까지 이스라엘을 찾으려는 싸움이 계속되던 시기인데, 그때 나온 글 중 에녹서, 모세승천 기록, 4에즈라서, 바룩서 등이 있고 신약에는 묵시록이 있다. 이것은 모두 수난기의 글들인데, 상징적 언어로써 그들의 원한과 결의, 그리고 소원을 담고 있다. 그 내용은 단적으로 말하면 억압당한 약소민족의 사무친 한의 다양한 표현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정치적 차원에서의 복수심의 발로만이 아니다. 그것에는 '하느님만의 통치'를 갈구하는 이스라엘의 전통적 신앙이 뿌리박고 있다. 하느님만이 통치하는 현실, 하느님의 정의가 강같이 흐르는 현실에 대한 염원이 하느님 나라의 도래라는 구체적 염원으로 결정화(結晶化)된 것이다. 이처럼 그 나라는 수난과 함수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그 나라가 무엇인가를 묻기에 앞서서 어떤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그 나라를 갈구했는지를 살피는 것이 그 나라 성격의 단면이라도 알 수 있는 순서가 될 것이다.

크게 말하면 외세의 침범을 받은 약소민족 이스라엘 전체가 그 나라를 갈구했는데, 그것은 망국의 슬픔과 더불어 독립쟁취의 염원과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그때 이스라엘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세계 대제국 로마에 무력으로 대항해서 독립을 쟁취할 승산이 없었다. 일부에서 반(反)로마운동이 그치지 않았으나, 그것은 달걀로 바위 때리는 격이었다. 이런 마당에 그 민족 안에 현실주의자가 출현한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민족 안에 사상적 분열을 가져왔다.

현실주의자란 점령세력과 협상할 가능성을 가진 위치에 있는 계층이 되게 마련이다. 그것은 바로 이른바 지도층이다. 예루살렘은 다윗 이래로 정치적 수도일 뿐 아니라 종교의 중심지였다. 그곳은 바로 유다인을 대표한다고 자부하는 지도층이 모인 곳이었다. 따라서 예루살렘은 한 시(市)로서의 의미만이 아니라 유다인의 얼굴이며 심장과 같은 상징이며 실제적 중심지였다. 그렇기에 외세는 언제나 예루살렘을 상대했는데, 그것은 예루살렘이 한 지역적 의미를 넘어서 실권 그 자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예수 당시에 직접적 영향을 준 로마 치하의 예루살렘은 로마의 협상의 대상이었다. 이 말은 예루살렘만 잘 다스리면 이스라엘 전체를 장악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헤로데를 사이에 놓고 통치할 때나 총독을 두고 직접통치할 때나 언제나 예루살렘을 의식하고 '존중'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루살렘을 신성불가침의 성도(聖都)로 인정하여 역대의 통치자들은 무기를 가진 군사를 주둔시키지 않고 예루살렘 성전에 제물을 바치며, 세금의 10분의 1을 성전에 쓸 수 있는 특권을 인정하고, 또한 성전의 장(대사제)에게 군사와 경제 문제를 제외한 제반 권한을 주었으며, 국민회의의 장의 자리를 주어 이스라엘 민족의 대표로, 때때로 이스라엘 정부의 대표로 깍듯이 우대했다. 그리고 거기서 결정된 '종교적 규율'을 최대한 보장하였다. 물론 이러한 우대는 저들의 대(對)로마 충성심과 함수관계에 있다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다.

로마는 바로 예루살렘이라는 지역 자체와 그 안에 있는 성전을 절대시하는 유다 지도층의 감정을 역이용한 것이다. 그들은 그 하나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지상과제로 내세웠기 때문에 다른 것을 다 뺏기는 것을 볼 눈이 어두웠을 뿐 아니라 그 현실을 감수해야만 했던 것이다. 저들은 기존의 소유권을 지키기 위해 다른 큰 것들을 잃은 것이다. 이렇게 외세로부터 특권을 얻은 그들은 바로 예루살렘과 성전만 사수하면 된다는 욕심에 사로잡혀 마침내 하느님 나라의 도래마저 교리상으로만 인정할 뿐 사실상 무관심했다. 뿐만 아니라 그것과 직결된 메시아운동에 대해서도 경계하게 되었으며, 심지어 그 운동을 저지하는 적이 되기까지 했다.

이에 분개한 집단들이 탈(脫)예루살렘파로 결속했고 그들은 하나 같이 반(反)예루살렘적이었다. 그들은 일차 목표를 예루살렘의 어용 세력을 숙청하는데 두었는데,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바로 이들이 종말론과 함께 하느님 나라에 대한 대망을 품었을 것이고 일차적으로 주류에서 밀려나고 집권자와 타협할 수 없는 이들이 그 나라의 도래를 갈구했을 것이다.

유다 사회에는 유다 전쟁 발발 훨씬 이전부터 가난한 자나 억압당하는 계층에서 종말사상이 강했다는 많은 사료들을 볼 수 있다. 어떤 어록에는 "돌을 들어라. 그러면 너는 나를 발견하리라. 나무를 빠개라. 나는 거기 있으리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메시아와 노동하는 자의 관계를 표시한 내용이다. 탈예루살렘파의 에쎄네문서(쿰란)에는 "가난한 자들이 정의로 심판하여 왕과 권력자들에게 비웃음과 멸시가 있을 따름"이라는 하느님 나라와 관련한 예언이 있다. 이처럼 그 나라의 도래와 가난하거나 눌린 계층과 연결시킨 기록이 많은데, 메시아 대망과 하느님의 직접통치를 갈망하여 목숨을 내건 젤롯당원들이 거의 궁핍한 피압박계층이었다는 사실은 그러한 경향이 구체적 운동으로 응결되었다는 본보기이다.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가장 갈망한 계층이 바로 누구였냐는 것은 반드시 사료를 제시하지 않더라도 자명하다.

이런 현실에서 예수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했는데 그 장소가 예루살렘이 아니고 갈릴래아라는 것은 먼저 주목해야 할 사실이다. 그곳은 바로 젤롯당의 본거지요, 소외자들이 득실거리는 지역이며 따라서 그 나라에 대한 갈망이 팽배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 나라가 이제 올 것이라고 막연한 희망을 안겨주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 나라가 임박했다고 했다. 우리말로 '가까웠다'고 번역된 단어인 'enggiken'은 미래형이 아니라 '이미 왔다'는 뜻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으나, 여하간 예수는 막연한 장래 일을 말하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그는 제자들을 파견할 때 하느님 나라를 전파 하라고 하면서 몸에 걸친 의복 한 벌 외에 어떤 것도 자기 삶의 보장을 위해 지니지 말라(루가 9, 1~5)고 준엄한 지시를 내린 것은 일반적인 의미의 고행주의를 모르는 예수로서는 특이한 언행이다. 결국 그 나라의 도래가 이미 여유 없이 문전까지 도래했다는 표시로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나라의 도래를 시간적으로 측정하기는 불가능하다. 예수는 그 나라가 무엇인지는 말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나라가 현실화되었다고 해도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알 수 없으므로 '요때부터다'라고 점찍듯 하는 판단기준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 점이 바로 묵시문학과 상통하면서도 그것과 다른 점이다. 묵시문학에서는 그날의 도래의 때를 계산하고 그날이 올 때의 징조와 나아가서 그날이 왔을 때 세계에 일어날 이변과 그리고 그 나라에 대한 사변적 서술들을 많이 하고 있으나, 예수에게서는 그런 사변적 서술을 볼 수 없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말씀을 보면 그 특이성을 곧 발견하게 될 것이다.

 

(2) 하느님 나라 비유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은 비유형식이 압도적으로 많다. 공관서에 '……과 같다'라는 형식으로 직접 하느님의 나라를 설명한 것이 11개이며, 비유 다음에 그것이 하느님 나라의 비유임을 밝히는 것이 2개로서, 이를 합치면 13개나 된다. 또한 그 나라를 직접 언급하진 않았으나 심판, 심판자(인자)의 도래 등 그 나라의 도래와 직접 관련된 비유도 8개나 된다. 이것은 전체 비유 39개 중(J. 예레미아스의 계산에 따르면)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비록 그 나라를 '무엇과 같다'는 전제로 설명하고 있으나 그 나라 자체를 설명한 것은 하나도 없고, 그 나라의 도래라는 긴박한 상황에서의 인간의 행위를 폭로함과 동시에 인간이 가져야 할 자세를 지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의 비유를 대충 다음 네 가지로 분류해볼 수 있다.

첫째는, 자라나는 씨(마르 4, 26~29)와 누룩(루가 13, 20~21), 그리고 겨자씨의 비유(마르 4, 30~32)이다. 이 셋은 '자란다' 또는 '발전한다'는 내용을 함께 지니고 있다. 씨를 심으니 싹이 돋고 이삭이 되고 낟알을 맺는다. 겨자씨는 가장 작은 풀씨인데 풀 중에서 새들이 깃들일 만큼 가장 큰 풀이 된다. 작은 누룩을 많은 가루 속에 넣었더니 그것이 가루 전체를 부풀게 한다는 등 모두 자라고 확대된다는 내용이다.

학자들 중에는 이 셋은 모두 그 나라가 역사 안에서 성장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해석하는 이들과, 그 나라의 도래는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는 신비한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있다. 가령 겨자씨는 지극히 작은 씨인데 크면 새들이 깃들일 정도로 커진다는 그 대조에서 '놀라움'의 의미를 읽으려하고, 농부가 '그것(씨)이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한다'고 한 말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둘째 번 해석도 결코 처음 해석을 배제할 수는 없다. 비록 역사 안에서 자라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자라는지는 인간에게 가려 있는 것이라는 의미로 생각하면 반드시 상충되지는 않는다. '자란다'는 것에 역점을 두고 역사의 어떤 구체적 현상을 그 발전의 과정으로 일치시키거나 또는 역사를 분석해서 그 발전법칙을 찾아내듯할 수 있다는 주장은 잘못이다. 동시에 그 나라의 도래는 세계 역사의 변혁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단언도 옳지 않다.

둘째는 그 나라는 무조건 개방되었다는 것이다. 잔치 초대의 비유(루가 14, 16~24)와 포도원 일꾼의 비유(마태 20, 1~6)가 그 대표적인 것들이다. 어떤 사람이 성대한 만찬회를 마련하고 초청장을 많이 보냈다. 초청장을 받은 자들은 기득권자들이다. 그러나 저들은 각기 소유 때문에 그 초청에 응하지 않는다. 이들은 '나는 으레 그곳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고 자부하는 계층이다. 하지만 그 자부심이 저들에게 열린 길을 가로막은 것이다. 저들은 유다인일 수도 있고 바로 예수의 제자로 자부하며 '자명성'안에서 딴전을 피우는 자들일 수도 있다. 그 주인은 그때부터 잔치의 개방성을 확실히 한다. "어서 동네 큰 거리와 골목에 가서 가난한 사람들과 불구자들과 맹인들과 절뚝발이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너라", "큰길이나 울타리 밖에 나가서 억지로라도 사람들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도록 해라." 하느님의 나라는 개방되어 있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에 그것은 어떤 계층에게는 닫힌 것이 되고 어떤 계층에게는 열린 것이 된다.

가진 자는 누구에게나 열렸다는 것을 하찮게 여기고 자기 마음의 문을 닫는다. 그것에 응한 자들은 한결같이 버림받고 가난하고 불우한 자들이다. 저들은 다른 사람에게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계층이다. 저들은 소속도 없고 가진 것이 없으니 삶의 계획이 없다. 거리나 골목에서 배회하는 것은 무슨 할 일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거처가 없기 때문이고 일하고 싶어도 일할 것이 없어서이다. 그러니 삶의 계획이 있을 수 없고 하루하루 양식을 얻는 데 급급할 뿐이다. 더욱이 '울타리 밖'의 사람들을 부르라고 한 것은 바로 거지들을 말하는 것이다. 저들은 한 도시나 성전 또는 부자의 담장 밖에 모여서 드나드는 사람들이 던져주는 푼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포도원 농부와 일꾼 얘기도 이와 성격이 같다. 그 주인은 거리에 나가서 할 일 없이 서성거리는 사람들에게 일거리를 주고 그에 해당하는 삯을 주기로 한다. 게다가 하루 다섯 차례나 다른 시간에 나가서 일 없이 하루를 소비하는 사람들을 부른다. 맨 나중에는 일할 시간이 거의 없는 해질 무렵에 나가서 일꾼을 부른다. 그러고는 사람의 계산을 뒤엎고 맨 나중에 부른 사람에게나 아침 일찍 온 사람에게나 똑같이 하루의 생활비를 지불한다. 바로 여기에 그 나라의 개방성이 있다. 그것은 일한 성과에 매이지 않는 그 주인의 배려이다. 그리고 그가 배려한 대상들은 거리에서 헤매는 계층이다. 놀라운 것은 그 나라는 바로 세상에서 버림받고 배척당한 자들에게 환영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예수가 오신 목적으로 루가 편자가 인용한 선언(루가 4, 18~19)이나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답한 것으로 보도된 예수의 행태에서 반영되는 내용과 꼭 같다(루가 7, 22).

셋째 부류는 그 나라는 곧 심판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앞의 비유에서도 비록 그 나라는 모든 이에게 개방되었으나 그 나라에의 초대가 사람을 갈라놓는 결과를 가져온 것을 보았는데, 그것을 현재적 심판이라고 한다면 그 나라의 도래와 함께 최종적 심판이 따른다는 것이다. 그물에 걸린 물고기 이야기(마태 13, 47~48)와 가라지와 곡식의 비유(마태 13, 24~30)를 대표적인 것으로 들 수 있다. 그물을 들어울릴 때까지 쓸모 없는 고기가 다른 고기와 섞여 있다. 그런데 주인은 그물을 육지에 올리자 그 두 가지를 가려내어 쓸모 없는 것은 내버린다. 이처럼 추수 전까지는가라지가 곡식 사이에 끼여 있으나 추수 때가 되면 가라지는 골라서 아궁이에 던져버리게 된다. 이것은 묵시문학에서 볼 수 있는 심판의 사변적 서술이 아니고, 극히 단조로우나 그 나라의 도래와 심판은 불가분하게 연관되었음을 뚜렷하게 밝히고 있다.

넷째 부류는 셋째의 것과 상통하나 단순히 그 나라의 도래의 상황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라 지시(명령)가 주 내용으로 되어 있다. 달란트(루가 19, 12~27), 악한 종(마태 18, 23~35), 보물을 발견한 자(마태 13, 44)와 진주를 발견한 자(마태 13, 44)의 비유 등이 그런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마치 어떤 주인이 종들에게 각기 자본금을 주어 장사를 시키고 여행길에서 돌아와서 그 결과에 따라 상벌을 주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 비유는 어떤 귀족이 왕위를 받기 위해 먼 나라로 떠나면서 했다는 것으로 보아 그때 실제로 있었던 경우를 얘기한 것으로 보인다. 가령 헤로데 등이 로마로 가서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강제로 자기 왕권을 승인시킨 경우가 그런 예이다. 그 때 그가 그에게 불충했던 자들을 잔인하게 벌을 내린 것을 상기시키는데 사용했을 수 있다. 요는 사람에게 각기 주어진 임무와 그것을 해낼 만한 재능도 주어졌는데, 그 나라는 바로 그런 재능을 가지고 얼마나 최선을 다했느냐를 심판하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한 거부의 재무 담당자가 막대한 빚을 졌다. 주인은 준엄하게 다스리다가 무조건 용서한다. 그런데 용서받은 자는 자기에게 적은 빚을 진 자에게 자기가 용서받은 자세로 대하지 않고 옥에 처넣으므로 그는 다시 체포 투옥된다는 이야기는 결국 그 나라는 사람에게 무상으로 주어지며 바로 그러기에 이웃에 대한 행위가 이에 상응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보물이나 진주를 가질 마음이 있으면 자기의 소유들을 아낌없이 팔아버릴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 비유들은 그 나라 앞에서 자기가 지니고 있는 것들에 연연해하지 말고 과감히 포기해야 된다는 것으로 '희생'을 요구한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지금까지 본 비유들은 하느님 나라의 비유라고 하면서도 그 나라 자체에 대한 설명은 없고, 마지막 경우와 같이 모두 그 나라의 도래 앞에서 어떤 결단을 해야 할 것이냐로 일관되어 있다. 우리는 예수에게서 그 나라의 청사진을 얻고 싶은 본능이 있으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당연하다. 그 나라가 정말 '새로운 미래', '새로운 가능성'이라면 어떻게 낡은 질서를 설명하는 언어로 그 나라를 말할 수 있겠는가? 예수는 그 나라를 철저한 새 현실로 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낡은 언어로는 서술하기가 불가능하며, 동시에 어떤 측정도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
텍스트를 수정한 후 아래 [수정요청] 버튼을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