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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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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죽음의 전야

예수의 수난사는 마르코복음 14장에서부터 시작된다. 14장은 첫 머리에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흉계를 꾸며 예수를 잡아죽일 방도를 찾고 있었습니다"(14, 1)로 시작되며, 그러나 그들은 "명절 동안에는 그 일을 하지 맙시다. 그랬다가는 백성들이 소동을 일으킬 것입니다라고 했다"(14, 2)는 것으로 그 집행을 주저한 이유를 반영하고 있다. 그 다음에 예수가 제자들과 더불어 나병환자의 집에서 식사를 할 때 한 여인이 예수의 몸에 기름을 부은 일이 전해진다. 제자들은 이 행위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 반해 예수는 그것이 그의 죽음과 장사를 전제한 고별행사로 받아들임으로써 예수가 죽음의 각오를 이미 확실히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뒤 제자들과 더불어 예수의 숨은 추종자의 집으로 보이는 어떤 집에서 고별만찬을 베푼다.

그 만찬 다음에 저 유명한 게쎄마니 동산에서 벌어진 얘기가 뒤따른다. 이상은 예수의 내적 고투의 표명이다. 그리고 그 상황은 저 지도층의 결정에 뒤이어 예수의 제자 중 하나인 가리옷 사람 유다가 배반하여 저들과 결탁하여 게쎄마니 동산을 덮칠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예수의 죽음의 각오와 그를 죽이려는 외적 여건이 맞붙는 셈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후만찬 전승과 체포 전승을 살펴보기로 하자.

최후만찬 전승은 해방절 만찬과 사랑의 최후만찬 얘기가 복합된 흔적이 뚜렷하다. 그 내용은 마르코복음 14장 12~25절까지인데, 12~21절은 해방절 만찬을 전제한 것인데 대해, 22~25절까지는 별도로 독립된 단문인 것이 뚜렷하며, 그중에 "식사할 때"라는 말이 두 번 나오는 것에서도 구분할 수 있다(18절과 22절). 그런데 전 단문은 해방절 양을 잡는 날이라고 명기했는데도 양고기를 먹었다는 말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단지 18절의 "그들이 앉아 식사할 때……"라는 말 속에 포함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 더욱 22절 이하의 내용은 해방절과 상관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나누는 음식에서 볼 수 있다. 분명히 이 두 전승은 다른 것인데, 형성과정에서 예수의 죽음과 해방절의 제물이 되는 양의 피나 죽음을 연관짓기 위해서, 좀더 구체적으로는 예수의 최후만찬에서 나눈 빵과 포도주의 의미를 해방절의 양의 살과 피와 연결시키기 위한 편집사적 해석의 노력에서 결합되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역사의 예수'의 죽음이 갖는 진실을 포함시키고 있다고 보여진다.

예수가 해방절을 그의 죽음의 때로 선택했다는 것을 부정할 근거는 없다. 그와 동시에 그가 제자들과 해방절에 최후만찬을 가졌으리라는 가능성도 충분히 엿보인다. 그럴 경우에 그것의 상징적인 의미는 깊다.

이스라엘민은 해방절의 기원을 에집트 탈출사건에 둔다. 구속과 압박의 상징인 에집트의 파로오는 거듭되는 재앙에서도 계속 약속을 번복하면서 히브리들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다가 마침내 항복하고 말았는데, 그것이 바로 히브리들이 양을 잡아먹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놓은 날 밤에 히브리를 빼고 에집트인의 장자들이 다 죽는 사건이 일어났던 때였다. 그때 이스라엘은 한 민족이라기보다 그 사회에서 억압받고 강제노동을 당하는 '히부르' 또는 '합비루'들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혹사를 참지 못해 집단탈출을 시도해 성공했는데, 그것을 가능케 한 최종적인 사건은 바로 양들의 희생이었다. 그러므로 양과 피는 제사의식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며 점차 그 본래의 의미를 상실 해버렸다. 본래의 뜻은 마술적인 속죄 작용이 아니라, 히브리들의 해방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기념이었다. 곧 저들(양)이 죽음으로써 히브리들의 탈출(삶)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 근원적 의미에서 볼 때 예수의 죽음과 해방절을 결부시킨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최후만찬의 장면에는 제의적 분위기는 없다. 그렇다고 양의 고기나 피도 부각되지 않는다. 그 대신 예수가 중심에 있고, 그는 떡과 술잔을 각 제자에게 주면서 바로 그것이 그의 살이며 피라고 하면서 그것을 기념하라고 한다. 이 그림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이 자리의 예수는 바로 해방절의 그 양을 대신하고 있으며, 거기 모인 사람들(제자)은 바로 박해받던 히브리들을 상징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한 유추로서 또 하나 중요한 암시가 있다. 그것은 예수가 잔을 주면서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것을 마실 그날까지 나는 포도 열매에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이다. 이것은 그의 죽음과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직결시킨 말씀이다. 이것을 해방절의 축제 그리고 그의 죽음과 해방절의 양과 결부시키면, 히브리들이 에집트의 압박에서 탈출해서 가나안이라는 약속의 땅으로 이동한 데 대해서 예수의 죽음은 바로 이 낡은 세계에서 해방시켜 하느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새 세계로의 탈출을 전제한 것이라는 사실을 읽어내게 한다.

이후에 예수는 게쎄마니 동산에 오른다. 이때 그를 체포하러 온 자들은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이 체포를 주동했다고 말한다. 이들은 산헤드린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그 하수인은 그들 자신이 아니고 그들이 보낸 '무리'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성전지기들이었으리라. 이 점은 마태오도 같은데, 루가에는 "대제사장들과 성전 수위 대장들과 장로들"(22, 52)이 직접 온 것으로 되어 있어 차이를 보여 준다. '성전 수위대장들'이라는 말은 마르코에서 말한 그들이 보낸 무리들이 누구인지를 보충 설명해주는 셈이다. 이에 대해서 요한복음만은 대사제와 바리사이파들이 보낸 경비병과 함께 "한 때의 군인들"이 체포하러 왔다고 하는데 그 군인은 바로 로마 병사인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포함한 복음서들의 서술에 따르면, 예수를 처형으로까지 몰고 간 주동자는 유다 지도층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로마 병사가 체포에 참여했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만일 로마 병사가 참여했다면, 빌라도에게 직접 송환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그러나 안나스에게 끌고 간다. 이렇게 보면 유다 지도층이 예수 체포의 장본인이라고 보아야 하겠으나, 빌라도는 그렇게 주견 없는 위인이 아니었다. 로마제국의 이해에 관계없이 로마의 법정을 거쳐 처형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면 이 두 세력이 야합하여 체포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한데, 확실한 과정은 밝힐 길이 없다.

우리에게 큰 관심을 일으키는 것은 게쎄마니에서 체포되는 예수의 행태이다. 공관서는 한결같이 예수를 체포하려는 음모가 사람들에 의해 진행되는 것을 서술하면서 예수는 그런 현실과 상관없는 듯한 고투를 한 것으로 전한다. "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이 가능하십니다.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마르 14, 36). 이것은 마르코에 의한 것인데, 언어상 약간씩 다르긴 하나 내용상으로는 공관서가 모두 같다. 곧 예수가 상대하는 대상은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인 것이다. 예수는 그를 처형하기로 결정한 이가 바로 하느님 자신이라는 듯이 그와 '대결'하는 것이다.

이 내용은 사실(史實) 그대로를 전달하려 함이 아니라는 것은 그와 함께한 제자들마저 자고 있었음을 강조함으로써 목격자가 없다는 사실에 별 배려를 하지 않는 것에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해석과 관련되는 내용이라는 말이 된다. 그렇다고 그 해석에서 죽음 앞에 선 예수의 진실을 찾는 것을 단념할 필요는 없다. 이 '해석'은 먼저 예수는 죽음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 갔다는 것, 적어도 예루살렘의 예수는 그의 죽음을 예감하고도 도피하지 않고 결단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 점은 최후만찬석의 내용과 일치한다. 그렇다면 그의 체포는 피동적이 아니라 체포하게 한 것이다. 여기서 보이는 죽음에 대한 예수의 각오는 희랍의 영웅상에서 보는 초인성을 방불케한다. 영웅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써 자기 시위의 절정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은 영웅의 죽음은 아니라는 것이다. 영웅이면 그렇게 체포를 앞두고 고뇌에 빠진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 죽음 앞에서의 소크라테스와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죽음을 피하려고 몸부림친다. 이 모습은 영웅주의적 안목에서 보면 비겁하기만 하다.

또한 이 모습은 유다 메시아상 중 어느 것에도 부합되지 않는다. 유다 메시아상은 이같이 초라하지 않다. 이 점은 끝에서 다시 언급하겠다. 어쨌든 체포되어 죽기 전야의 모습에는 어디에도 패왕적인 데가 없다. 그것은 수난당하는 자의 전형적인 모습 이상이 아니다. 힘 없이 짓밟혀도 피할 길 없이 몸부림치는 한 수난자의 모습일 뿐이다.

그러나 예수의 전승자가 지적하려는 것은 이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단순한 수난자로서 비명만 올리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가해 자에 대한 분노에 떠는 것도 아니다. 오직 하느님의 뜻이라면 복종하겠다는 결의 그것이다. "내 뜻대로 말고 당신 뜻대로……"라는 것이 그의 삶 전부였음을 지금 과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를 체포한 이는 로마인도 유다인도 아니고 하느님 자신이라는 결론이 가능하다. 최소한 그 같은 운명을 결정한 이는 하느님이라는 것이며, 그런 경우 누구든 그를 체포하는 자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하수인 이상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너희가 강도를 잡듯이 검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러 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서 너희를 가르쳤는데 너희가 내게 손을 대지 않았다"는 예수의 응수는 위의 뜻을 충분히 반영한다. 곧 저들은 하느님의 요구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자진해서 체포된 것이지 체포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예수전승이 강조하려는 점이다.

이상의 해석에서 어떤 사실(史實)을 찾아낸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그의 예루살렘행은 죽음을 각오한 행차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폭력으로 투쟁하기 위해서도 아니요, 그렇다고 영웅임을 시위하자는 것도 아니며, 수난자의 길을 끝까지 관철하자는 것이다.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수난을 이사야 53장의 고난의 종의 상을 거울삼아 이해하고 해석하고 경탄해 마지 않는다. 이것은 다음에 계속 반영된다.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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