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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심문과 처형

예수를 체포한 자들이 그를 끌고 먼저 대사제의 집으로 갔다고 하는데, 그 자리에는 대사제 외에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이 모두 있었다"(마르 14, 53)는 것을 보아 산헤드린을 소집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밤중에, 그것도 유월절 기간에 산헤드린을 소집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 앞에서 여러 가지 고소할 근거를 찾아 증인을 내세우나, 예수는 끝까지 침묵한 것으로 되어 있다(마르 14, 61). 예수가 심문에 침묵했다는 것이 본래 전승이며 그것이 지금까지 보아온 그의 상(像)에 부합된다.

빌라도는 "너는 답변할 말이 없느냐? 네가 보는 대로 사람들이 저렇게 여러 가지로 너를 고소하고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빌라도가 이상히 여길 정도로 아무 대답도 하시지 않았다"(15, 4 참조, 마태 26, 62~6327, 14;루가 23, 9)고 한다. 그런데 오직 "그리스도냐"는 산헤드린에서의 질문과, "네가 유다 왕이냐"라는 빌라도의 질문에는 그렇다고 응수한다. 루가에서는 이 침묵의 예수의 모습은 사라지고 논쟁하는 예수로 등장하고, 요한복음은 더욱 그렇게 변모하는데, 이것들은 역사 전승으로는 후기의 것으로 포교적 목적에서 첨가된 것이라는 게 공인된 결론이다. 게쎄마니의 장면을 존중하면 그가 사람들 앞에 침묵했으리라는 것이 자연스러워 진다. 더욱이 그가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한 일이 없으며, 더욱이 유다의 왕이라는 것은 도저히 예수의 자의식에 비추어 신빙성이 없다.

예수의 죄명은 '유다인의 왕'(마르 15, 1826)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정치범이다. 유다 메시아 운동가는 유다 독립운동가들이었는데, 그의 죄명이 "유다의 왕"이라면 그는 유다 민중을 선동해서 반 로마 독립운동을 꾀했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예수를 체포하고 처형하는 주체는 로마제국이어야 한다. 로마제국은 점령지의 종교나 관습 등에 대해서는 너그러웠다고 하나, 로마의 주권에 도전하는 운동에 대해서는 잔인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예수가 '유다의 왕'이라는 죄명으로 처형되었으면 로마가 앞장선 것이다.

그런데 산헤드린에서의 고소 내용은 퍽 애매하게 보인다. 여러 거짓 증언 가운데 하나는 예수가 성전을 헐어버리겠다고 했다는데 뒤이어 "그 증언이 서로 맞지 않았다"고 하고 결국 그가 메시아냐라는 질문에 수긍한 것이 사형에 해당한 죄로 판단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유다 사회에서 메시아 주장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 같은 주장을 위험시한 것은 바로 로마제국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이라면, 유다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로마법에서 볼 때 그러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길밖에 없다.

이상의 고찰에서 결론을 내린다면, 유다 지도층들이 로마세력과 야합해서 예수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로마법에 의한 것이라면 정치범으로 사형받은 것이 틀림없다. 마르코에서는 빌라도가 유다인들의 압력을 받아 피동적으로 동의한 것처럼 되어 있고, 마태오에는 자기 책임이 아니라는 표로 손을 씻는 장면이 나오고, 루가에서는 빌라도가 그에게서 아무런 범법 내용을 찾을 수 없다고 거듭 말하는가 하면, 예수를 석방할 뜻을 반복했다는 식으로 점점 로마에 책임이 없다는 주장으로 기울어진다. 그러나 빌라도라는 위인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는 사적 증거도 있지만 로마제국을 대표하는 자가 그토록 피동적으로 자기 나라 법을 위반할 위치에 있었다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 점은 처형과정에서 더욱 확연해진다.

사형선고를 받은 예수를 로마병사들이 사령부 뜰에서 왕복을 상징하는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희롱했다. 이것은 로마의 각본이지 유다인들의 각본일 수 없으며, 그렇게 무죄를 확신했다면 그런 모욕적인 박해를 주동할 이유가 없다. 십자가처형은 로마의 처형법이지 유다 전통에는 없다. 로마인은 가장 악한 죄수를 십자가 형에 처했는데, 자기 국내에서는 신전을 모독한 노예 같은 매우 죄질이 나쁜 범죄자에게나 어쩌다 실시했고, 점령지에서는 정치범에게 가했다는 기록이 얼마든지 있다. '유다인의 왕'이라는 죄명과 십자가형은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예수는 두 명의 다른 죄수와 함께 처형되었는데, 저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나를 규명하는 것은 예수가 처형된 동기를 밝히는 또 하나의 자료가 될 것이다. 마르코는 그들을 "강도"(마르 15, 27)라고 했다. 이미 다른 것과 관련하여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구체적으로는 "반란을 일으키고 사람을 죽이고 옥에 갇혀 있는 폭도"(15, 7)라고 했다. 이것은 개인의 어떤 욕심 때문에 폭력으로 물건을 빼앗는 도적과는 다르다. 요세푸스는 당시의 젤롯당을 통칭 강도(lestai)라고불렀다. 이것은 로마의 입장에서 본 규정이다. 젤롯당은 게릴라부대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생활양식이 남의 물건을 강요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런 규정이 근거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저들은 독립군이었다. 그러므로 '폭도'라고 번역한 staoiastes가 맞는 말이다. 그것은 봉기, 소요, 반란, 폭동 등의 뜻이다. 마태오는 그중의 하나인 바라빠를 "소문난 수감자"(구속자)라고 했는데, 예루살렘의 민중이 그의 석방을 요구한 것은 그런 사실을 입증한다. 마태오나 루가에는 그들과 예수를 같은 범주에 넣지 않으려 한 흔적이 있으나(루가 23, 32; 마태 27, 14), 로마의 입장에서는 같은 범주의 죄수들이었다. 로마는 같은 부류의 범죄자를 동시에 십자가에 처형한 예가 무수하다. 유다 전쟁 때 예루살렘공방전에서 매일 500명씩 십자가처형을 시행했는데, 그것을 위한 나무를 구하는 데 궁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써 예수가 처형된 이유는 한층 밝아진다. 곧 바라빠처럼 예수도 민중소요분자로 고발된 것이다.

사형선고와 더불어 십자가에 처형되는 과정은 로마 병사들이 능동적으로 담당하고 처형장에 대사제들과 율법사들이 참여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들은 구경꾼의 입장에서 조롱했을 뿐이다. 그들은 고발자였고 또 그들의 야욕이 성취되어 기뻐하는 입장에 있으나, 주최측에 끼이지 못할 뿐 아니라 자기 민족의 한 사람을 민족의 적의 손에 넘겨서 처형케 하는 추한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게쎄마니에서의 체포에서부터 재판, 처형 과정에서 크게 부각되는 예수는 철저히 버림받은 자이다. 그를 따르는 많은 민중도 간데 없고, 제자들은 모두 도망가고, 그중의 하나는 배신하고, 그리고 유다 민족 전체가 "예수를 십자가에!"를 절규하면서 배신했다. 로마제국이 이에 호응해서 그를 국형에 처함으로써 온 세상이 그를 버린 셈이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단지 갈릴래아에서부터 따라와서 멀리서 쳐다보는 힘없는 여인 몇을 빼면 그를 위해서, 그의 무죄를 위해서 싸우거나 그의 편을 들고 나서는 자는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어떻게 이렇게 서술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보다 근본적인 수수께끼가 있다. 그것은 예수가 그토록 의지하고 그의 뜻을 착실히 다짐하기 위해서 애타게 부르는 그의 하느님은 어떤 형태로도 응답한 흔적이 없다. 마르코 편자는 구경꾼들의 조롱, 특히 "그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리하면 우리가 보고 믿겠다"는 호기심과 조소를 반복 서술함으로써 아무런 반응이 없는 하느님, 무(無)와도 같은 침묵, 신 부재의 철저한 적막, 철저한 암흑 속에 외롭게 버림받아 고통받는 예수를 표출시킨다. 결국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마지막 말과 더불어 비명을 지르고 운명한다.

우리가 여기서 그것의 사실성(史實性)을 묻는 것은 덧없는 일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알리려고 이렇게 서술하였느냐는 것이다.

마르코는 고유한 문학유형을 창조했다고 한다. 그것은 개인 전기 문학도 아니요, 그렇다고 동화 같은 문학도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증언을 담은 단편들을 전기적으로 편집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그것은 한 이야기에서 다른 이야기로 끝내는데, 그런 것들을 일관성 있는 입장으로 꿰뚫었다. 그런데 그 의도한 바를 한마디로 하면 '설교자의 설교의 내용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하느님의 나라 선포자가 바로 메시아이며 하느님의 최후의 행위를 대행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것은 이른바 '종교서'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마르코에는 처음부터 하느님이 개입하며, 기적 얘기로 그득하며, 변화산상 얘기같이 너무도 종교적인 서술로 된 전권의식(全權意識)을 담은 서술법을 주저없이 사용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수난의 장면에서는 그러한 신의 개입으로 이루어지는 초자연적인 요소가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냉혹한 현실, 신 부재의 현실을 그대로 폭로 하는 이상 다른 것이 없기 때문에 그전의 것과는 완전히 면모를 달리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수난사가 처음부터 그렇게 응결된 것을 마르코 편자가 거의 그대로 전승한 것이라고 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그렇다고 마르코가 그런 자료를 그대로 전승하였을 이유는 없다. 그의 일반적 서술법처럼 종교적 색채를 띠면서도 일반적 내용을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가령 전권의식을 나타내기 위한 변화산상의 이야기처럼!

일찍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십자가처형을 하느님의 처벌로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온 인류의 죄값을 대신 걸머진 것이라는 교리로 발전했다. 바울로도 예수가 저주받았다고 하며, 나무에 달린 것이 그 증거라고 한다(갈라 2, 13). 그도 그것은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적극적 의미로서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 사람들에게 미치게 하려는 것이었으며, 그리하여 우리가 믿음으로 그 약속된 성령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 두 면은 소극적인 뜻과 적극적인 뜻이 있다. 그러나 그것을 통틀어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해방을 위해서라는 말 이상 정확한 말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 해석을 넘어선 신앙고백적 이해이다. 이 제사적 전통을 전제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말이다. 인류의 죄를 대신해 처형되는데 그렇게 '나약한' 그리고 우유부단한 모습으로 처형당한 것으로 서술해야 하는가? 최후의 만찬석에서의 예수의 말씀은 그의 수난이 그 같은 의식 속에서 '자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게쎄마니에서, 처형 현장에서의 그의 고투는 '누구를 위하여'라는 고차원적인 인상을 주지 않는다. 예수의 모습은 약한 자의 모습 그대로다. 그는 권력 없고 가난한 무명의 한 민중이 자기 인권 하나 수호할 능력 없이 바른 저항의 말 한마디 못하고 억울하게 죽어 가는 장면과 아무 차이가 없다. 그는 약한 인간의 모습 그대로를 드러냈다. 바울로는 분명하게 "사실 그는 약하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후 13, 4)고 한다. 이것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여 당장에 열두 군단 이상의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 아느냐……"(마태 26, 52. 마르나 루가는 없음)는 것과는 대조적인 것으로, 사실(史實)을 말한 것이다.

수난의 현장이 이사야 53장의 "수난의 종"과 관련된 것은 발견한 지 오래다. 그 노래에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없고……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다. 그는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피해갈 만큼 멸시만 당한 사람이었으므로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다." 이 같은 구절은 수난당하는 예수의 초라한 모습과 지나가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침을 뱉고 조롱하는 장면을 그대로 연상케한다.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한 번도 입을 열지 않고 참았다"는 것은 바로 예수의 침묵과 같으며, "그가 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는데 그의 운명을 걱정하는 자 누구냐?"고 한 것은 그의 재판과정과 완전히 버림받은 예수의 처지를 반영하며, "그가 죄인들과 함께 처형당하고……"는 젤롯당원과 함께 처형된 것을 반영한다. 이렇게까지 유사하기 때문에 사람들 중에는 수난사가 사실(史實)을 서술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사야의 "수난의 종"의 상을 앞세우고 그 틀 안에서 서술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런데 그 주장의 시비를 가리기에 앞서 주목할 것은, 어떻게 "수난의 종"의 상으로 예수의 수난을 해석하려고 했는가 하는 사실이다.

이사야서 53장의 "수난의 종"은 어떤 개인이 아니라 집단개념이다. 그것은 수난당하는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수난의 종은 죄가 있어 수난당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들에 의해 박해를 받고 순사(殉死)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를 박해하는 악의 세력을 고발해야 한다. 그러나 이 노래에는 수난 속에 몰아넣은 악한 세력에 대한 복수심의 흔적이 전혀 없는데 그것은 그를 "때리고 찌른 이"는 야훼 자신이라는 신앙 때문이며,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라는 악순환을 초극할 수 있는 비결이었다. 바로 이러한 수난의 종의 모습을 예수에게서 본 것은 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예수의 수난은 결코 '나자렛 예수'라는 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 집단적 수난을 뜻한다. 그러므로 십자가에는 종교적 의미만이 아니라 사회사적 의미가 있다. 그의 죽음은 그의 민중의 수난과 절대로 무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에서 민중의 고난의 극치를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는 민중과 더불어 분노와 복수의 칼을 들고 싸우지 않고 죽음으로 악에 대항함으로써 그 악순환을 영원히 끊어버리려고 했다. 그러므로 그는 끝끝내 그를 직접 죽이는 '원수'를 보지 않고 하느님과만 대결하면서 복종한 것이다.

이러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병인 체념과 공포 속에 묻혀 있는 예수의 민중이 '부활'이라는 경험을 계기로 의기충천, 죽음의 공포도 잊는 용기와 담력을 갖추었는데도 그들의 스승을 억울하게 처형한 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한 것이 아니라, 갈릴래아로 그리고 유다교의 영역을 돌파하여 세계로 진격하면서 새 역사의 장을 연 것은 예수의 수난의 자세가 현실화된 것이라고 볼수 있다.

끝으로, 예수의 수난사를 바라보는 중요한 열쇠에 대해서 언급해야 한다. 그것은 예수의 최후의 비명과 같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절규다. 이것은 시편(22, 2)에서 볼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사람들 중에는 예수가 시편의 그 절규를 마지막 절규로 삼았다고 보는데, 영웅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예수가 절규한 것이 아니라 찬양으로 노래를 불렀다고 강변하기도 한다. 시편에 그 같은 표현이 있으니까 사실로 볼 수 없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으며, 또 그가 노래를 불렀다면 십자가의 고난의 의미는 송두리째 없어져버린다. 그것은 이미 수난의 민중이 된 이스라엘의 절규를 반복한 것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의 예수의 절규가 아니라 편자의 해석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느쪽이든 그 의미는 크다. 예수의 고뇌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그 의미가 크다는 말이다. 그것은 홀로의 운명을 원망하는 절규가 아니라 집단적 절규라는 사실을 제시했기에 의미가 크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 절규는 한 개인 예수의 것이 아니라, 신 부재의 상황에서 버림받은 자들의 절규로 역사를 꿰뚫고 있다는 데서 크게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절망적인 절규가 아니다.

그것은 확실히 신 부재의 절규이다. 사실 그가 끝까지 기댄 것은 하느님 한 분이다. 그러나 그 하느님은 끝까지 간여하지 않았다. 바꾸어, 수난자의 편에서 보면 그는 사람들에게만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게 한 이유인 그 하느님에게까지 버림받은 것이다. 그는 그 하느님에게 배신당한 것이다. 그에게 속은 것이다.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착각했다고 분통을 터뜨려야 할 너무도 억울한 처지에 놓였다. 바로 이것이 그를 따르는 민중의 현장이며 그들의 울분인 것이다. 시편의 그 민중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은 의롭고 공의를 심판한다고 믿어왔으나 사실은 그렇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버림받아 온 것이다. 예수의 처지가 바로 그렇다. 그런데 그런 극한상황에 놓인 예수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한 것이다. 버리셨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여전히 "나의 하느님"이라고 한다. 어째서 그래도 "나의 하느님"인가? 여기, 죽어도 죽지 않으며 버려도 버림받지 않는 강인한 삶이 있다. 버림을 받아도 "나의 하느님"이라고 하는 바로 거기에, 하느님은 그를 배반하는 듯하나 그는 끝끝내 하느님을 배신하지 않는다. 죽기까지! 여기서 역사는 민중을 배신하기를 거듭하나 그들은 역사를 배반하지 않는 모습을 본다. 그래서 바로 저들은 역사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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