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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일생을 통한 나의 관심은 신학이 아니라 '역사의 예수'였다. 아직 내가 신학을 모르는 상태에 있을 때에도 신학과 예수는 구별되어야 하겠다는 전제를 안고 있었다. 이 말은, 예수에게 집착한 것이 아카데믹한 관심에서가 아니라 예수의 삶을 묻고 거기에 참여하고 싶은 목적에서였다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순수한 학문적인 신학이라는 것을 거치지 않고 예수를 체험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중요한 몇 가지 위험이 있었다. 그 중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주관주의에 빠져드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마침내 성서(복음서)를 본격적으로 연구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그것이 불트만을 찾게 한 계기가 되었다. 나는 그가 『예수』라는 책을 썼으면서도 '역사의 예수'를 처음부터 거부한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찾은 것은 그가 19세기 이래의 서구 신학전통을 첨예화한 가장 대표적인 사람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케리그마적 예수'를 쓴 그가 어떻게 역사의 자료로서의 복음서를 분해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기 위해 그의 유명한 『공관복음전승사』정독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 연구는 텍스트의 객관화를 시도한 진지한 노력의 산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작업의 결과는 역사의 예수를 비록 단편적으로나마 밝힌 것이 아니라 케리그마화 된 그리스도상으로 예수상을 산산조각 낸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을 정독한 나의 결론은 이렇다. '왜 그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에게만 집착해야 하는가를 변호하기 위해서 이 작업을 했다.'.

그런데 '그리스도 케리그마'의 핵은 역시 '역사의 예수'가 아니겠는가?

'역사의 예수' 없이 '그리스도 케리그마'가 있을 수 있겠는가?

역사적 실체를 뺀 신앙은 결국 가현설(假顯說, Docetism)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이러한 문제 제기를 한 사람들이 다름 아닌 그의 제자들이었다. 내가 독일로 갔을 때는 이미 2년 전에(1954년) 그의 제자 에른스트 케제만이 그러한 문제 제기를 했으며, 그 뒤를 이어 그 역시 불트만의 제자였던 귄터 보른캄이 『나자렛 예수』라는 책을 냈다. 그리하여 소위 말하는 '역사의 예수'에 대한 관심이 다시 신약신학계에 대두되었으나, 모두 양식사의 테두리를 전제로 하고 동시에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를 전제로 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는 불트만을 넘어설 수 없었다.

양식사에 의해서 복음서 전체가 와해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노력은 편집사적 연구방법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들은 복음서 편자들을 각기 신학적 틀을 가진 편집자들로 보고 그들의 신학적 틀에서 예수를 보려고 한 것이다. 그것은 복음서들이 전체로서 재조명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치명적인 것은 저들이 복음서 저자(편자)들의 신학을 발견했으나 '역사의 예수'에 대해서는 오히려 점점 더 멀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이다. 아무튼 서구 신학 영역에서 예수를 추구하던 나의 노력의 결과는 '역사의 예수'에 대한 불가지론(不可知論)에 이른 것뿐이었다. 그러나 학문적인 불가지론과 예수에 대한 나의 집착은 별개의 것이었다. 학문적인 불가지론이 아무리 설득력 이 있어도 예수에 대한 나의 집착을 끊어버리지는 못했다.

불트만계에서 많은 것을 배웠는데 해석학적인 전제로서는 다음의 몇 가지가 나의 신학작업에 계속 유효했다. 첫째, 신학은 곧 인간학이다. 둘째, 역사의 해석자는 역사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에 대해서 객관적 위치를 취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역사 해석자는 동시에 자신의 해석을 배제할 수 없다. 셋째, 믿음은 이성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 말은 믿음은 이성을 제물로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넷째, 이것은 위의 것과 연관된 것인데, 믿음의 내용은 이해(Verstehen)를 수반해야 한다[그러므로 불트만의 논문집들은 『믿음과 이해』(Glauben und Verstehen)라는 제목을 붙였다]. 다섯째, 물음은 대답을 결정한다. 끝으로 이것은 불트만계에서 시작된 말이 아니고 양식사학자들에 의해서 제창된 개념인데 그것은 바로 '삶의 자리'(Sitz im Leben)이다. 이중에서 문제를 제기 해야 할 것은 서로 연관이 있는 마지막 두 전제들이다.

'삶의 자리'란 말은 종교사학파들(특히 H. Gunkel)에 의해서 사용된 개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자리라고 하면서 실상은 종교적 조건들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어떻게 삶을 종교라는 카테고리에 국한시킬 수 있을까? 신약에서 케리그마에 초점을 두는 것도 바로 이러한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비록 복음서는 물론 신약성서 전체가 교회라는 공동체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교회는 사회에서 고립된 특수한 게토(ghetto)가 될 수 없다.

복음서를 형성전승한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은 예외없이 그들의 사회적 여건에서 철저히 압박을 당한 계층이었다. 바로 그들이 예수의 공동체로 탈출해왔기 때문에 그들의 삶의 자리이기도 한 사회적 삶의 자리를 풀지 않고는 그들의 신앙도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복음서를 해석하는 입장은 이 복음서를 이른바 '두 나라 설'에 정착한 전통의 영향을 받아 정치, 경제, 사회 등의 문제는 배제하고 교회내의 삶이라는 전제가 거의 자명하게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인간학이라는 개념에서부터 역사이해 그리고 삶이라는 개념에 이르기까지 교회라는 게토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입장에서 제기한 물음과 이에 대한 대답이 저들의 신학이다.

우리는 현재까지 저들의 물음과 대답을 소화하고 전달하는 것이 신학자들의 과제인 줄로 알아왔다. 그러다가 우리의 역사적 계기에서 충격적으로 변하게 된 인식은 신학하는 우리에게 바로 '우리'가 빠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나라는 1960년대부터 군사정권의 횡포에 의해서 많은 비극적 사건이 일어났다. 이 고난 속에서 일어나는 절규는 교회적 또는 신학적 게토 안에 있는 우리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현대적 고난의 역사가 우리 사회와 그리스도교 사이를 가로막은 담을 헌 것이다. 그 고난자의 절규가 우리에게 도전(challenge)해왔다. 우리는 이 고난자들의 절규에 대답해야 할 책임을 느꼈다. 이러한 역사적 실존상황에서 재래의 케리그마적 신학은 전혀 대답이 될 수 없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신학적 정리를 안 한 채 수난자들의 고난에 참여했다. 그런데 이 민중과 제휴하는 일은 자동적으로 고난을 수반했다.

이러한 와중에서 우리의 질문은 전혀 달라졌다. 이 말은 우리의 시각이 전혀 달라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의 고난의 현장에서 뜻밖에도 복음서에 그려진 고난의 예수를 만나게 되었다. 이로써 복음서는 우리에게 서구성서학에서와 같은 문학적 관심의 대상을 넘어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새롭게 물음을 제기하게 하였다. 예수가 갈릴래아로 간 이유, 거기에서 민중과 더불어 산 하나하나의 이야기들이 단순한 학문적인 관심을 일으키는 일이거나 문학적 분석 소재로서의 대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당하고 있는 사실의 현장이 되어버렸다. 예수가 한 말들, 그와 여인들의 관계 그리고 죽음을 각오한 예루살렘 돌진, 마침내는 정치범으로 십자가에 처형된 사실들이 우리의 물음과 내용상 하나가 되어버리고, 동시에 갈릴래아 예수의 민중의 대답은 고난의 현장에서 이루어진 것으로서 우리와 피가 통하는 경험이 되었다.

그리고 예수의 민중은 '나'와 '예수'를 별개의 것으로 구분하지 않고 있음이 인식되었다. 예수를 묻는 데도 주객도식의 틀에 매여 있지 않았다. 저들은 예수의 관찰자가 아니라 예수사건의 참여자임을 인식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저들은 예수를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자(Nachfolge)였다. 예수를 본받는 자(imitatio Christi)이면서 그를 증언하는 자(martyr)였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역사의 예수를 한국의 현장에서 새롭게 만난 것이다. 민중신학은 바로 이런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기에 그것은 한마디로 민중발견과 예수발견의 일치에 의해서 형성된 신학이라고도 하겠다.

독자는 이 책을 읽어가면 발견할 수 있겠지만, 나는 예수라는 한 개인의 전기를 쓴 것이 아니다. 아니, 나자렛 예수를 기점으로 일어난 민중의 운동, 즉 예수의 민중운동이라는 시각에서 예수를 서술한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양식사학이나 편집사학에서 얻은 성과를 존중하면서도 공관서전승사 자체를 문학적 변천과정의 산물이라는 시각 대신 예수의 민중운동의 발전사로 보았다. 그러므로 전승의 문학적 층을 가려내는 양식사적 노력보다는 그 전승사의 일관성과 필연성을 중시했다. 그러므로 예수 자신의 행태와 그것에서 연유한 발전사인 전승사를 단철시켜서는 예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보게 되었다. 다른 말로 하면 전승사는 역사의 예수가 그의 민중 안에서 살아 움직인 산 증언이다.

이러한 전승사는 오늘까지 예수의 민중운동사로 계승되어 왔다. 우리는 세계사에서도 볼 수 있겠지만 한국의 역사, 특히 최근 직접 체험한 민중운동에서 그 예수민중의 맥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최대한으로 한국 민중의 물음에 대해 신학적 물음으로서 바탕에 깔고 예수에게서 그 대답을 찾을 것이다. 한국 민중의 물음은 그 상황이 특수하기 때문에 특수하다. 그러나 특수는 보편과 통한다. 그러므로 그 대답은 결코 한국에만 유용한 것이 아니라, 역사를 관통하여 세계성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원래 학문적 인정을 받기 위해 쓴 것은 아니다. 감옥에서 얻은 심장병에 시달리고 있을 때인 지난 1978년, 명동성당에서 '예수'에 관한 연속강좌를 요청받아 처음 만나는 가톨릭 청중들에게 10회에 걸친 강좌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후 대학에 복귀하여 '갈릴래아의 예수'라는 제목으로 한 학기 동안 강의를 할 때 약간의 성서학적 반성을 반영했고, 나아가 대학원 세미나 등에서 줄곧 제기된 문제들을 더불어 생각하면서 이것을 발전시켜왔다. 그러한 결과를 최근 미국의 버클리 신학대학원생들에게 강의하고(1989년) 이를 또다시 수정보완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을 내기로 하면서도 학문적 인정을 받기 위한 뒷받침에는 등한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처음부터 주를 다는 일은 최소화했다. 그런데 한국신학연구소의 강원돈 목사 수고로 주가 확대되었다. 그것이 독자에게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겠다. 그리고 이 책을 탈고하기까지 정서해 준 제자 박희진의 수고를 기억한다.

1990년 가을

안병무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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