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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평범한 사람

우선 예수의 사회적 신분에 대해서 물어보기로 하자.

첫째, 그는 갈릴래아 사람이다. 마태오와 루가에는 예수의 공생애 이전의 이른바 전역사(前歷史)가 각기 다르게 수록되어 있다. 탄생 설화가 그것이다. 마태오에는 예수가 유다 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했는데,9)마태오복음에는 마리아 부부가 호적등록을 하기 위해 베들레헴에 갔다는 이야기가 없다(루가 2, 4 참조). 헤로데의 박해를 받아 에집트로 피신했다가 헤로데가 죽은 다음,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으로 와서 아주 정착한 것으로 되어 있다(마태 2, 1 이하). 이에 반해 루가는 그의 부모가 본래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에 살았는데, 로마총독의 인구조사령에 따라 호적에 등록하기 위해 유다 땅 베들레헴에 갔다가 거기서 예수를 낳은 후 다시 갈릴래아로 돌아온 것으로 되어 있다(루가 2, 4 이하).

이 두 전승, 마태오와 루가전승의 내용은 전혀 다르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의 고향을 유다 땅 베들레헴과 결부시키려 했다는 점이다. 물론 그 의도는 분명하다. 예수가 다윗의 후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베들레헴은 바로 다윗 왕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르코복음서에는 요한복음서와 함께 이러한 전역사가 없다. 따라서 베들레헴을 언급하는 일이 없으며,10)마르코복음에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가 두 번 나오는데(10, 4712, 35), 이것은 모두 제삼자가 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예수 자신은 물론 그의 제자들도 예수가 다윗의 후예라고 말하는 일이 없다.11)바울로는 예수를 "다윗의 후손"이라고 하는데(로마 1, 3), 그것은 바울로의 신념이 아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주변에서 형성된 전승을 그대로 반복한 것이다(E. Käsemann, An die Römer, Tübingen, 1980, S. 8 / 한국신학연구소 번역실 역, 『로마서』, [국제성서주석 34], 한국신학연구소, 1982, 28면). 마르코는 예수가 다윗의 후예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을 알고 있었다. 율법학자들이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예여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데 대해 "다윗 자신이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그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는 예수의 반문을 싣고 있는데(마르 12, 37)12)이런 전제에서 많은 학자들은 예수가 다윗의 자손임을 부정한다[E. Haenchen, Der Weg Jesu, Berlin, 1968, S. 416; C. Burger, Jesus als Davidssohn, Göittingen, 1970, S. 57; G. Schneider, Die Davidssohnfrage(Mk, 12, 3557), Bib 53(19, 72), 65~90; E. Hirch, Frühgeschichte des Evangeliums I: Das Werden des Markusevangelium, Tübingen, 1941, S. 138]. 이와 상관없이 헹겔도 같은 견해를 취한다(M. Hengel, Die Zeloten, Leiden/Kain, 1976, S. 305). 이것은 분명히 예수가 다윗의 후예라는 주장을 거부한 중요한 자료다.13)그러나 이것은 예수가 다윗의 후손이라는 주장이 이미 있었음을 시사한다(W. Schmithals, Das Evangelium nach Markus II, S. 547). 마르코에는 예루살렘 입성시 민중들이 호산나를 부르며 예수를 환영하는 장면에서 "우리의 조상 다윗의 나라여, 복이 있으라"고 되어 있는데, 마태오에는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21, 9)로 바꿔놓고 있다. 그러나 마르코는 예수가 갈릴래아 사람이라는 것을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1, 9).14)요한 1, 46 참조.

예수시대에 '갈릴래아 사람'이라는 것은 결코 명예로운 일이 못 된다. 그것은 유다 지방 특히 예루살렘 중심적 시각에 의한 것이다. 예루살렘의 시각에서 갈릴래아는 '이방인의 땅' 즉 오랑캐들이 사는 땅으로 비하되었다.15)넷째 마당 '갈릴래아로' 참조. 그러므로 예수가 갈릴래아 사람이라는 주장은 결코 그리스도론적 발전과정에서 창안해낸 사실이라고 볼 수 없다. 갈릴래아인이라는 말의 사회사적 의미는 다음에 재론될 것이지만 우선 여기서 분명히 해둘 것은, 그가 예루살렘과 대조되는 비천한 지역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둘째, 예수의 직업은 목수였다. 이 사실은 마르코복음 6장 3절에 명기되어 있다.16)그닐카에 따르면, 마르 6, 3a에서 "목수"라는 낱말 앞에 정관사가 붙은 것으로 보아 예수가 나자렛에서 목수라는 칭호로 알려져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한다(J. Gnilka, Das Evangelium nach Markus(EKK, II / 1), Benzinger / Neukirchner Verlag, 1978, S. 231/ 한국신학연구소 번역실 역, 『마르코복음 I』, [국제성서주석 30. 1, ] 한국신학연구소, 1985, 295면]. 사람들 중에는 그 당시 목수는 수공업자로서 오늘날의 중산층과 같은 계층이라고 단정하면서 예수는 그렇게 가난한 집의 출생은 아니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17)헹겔은 예수가 날풍팔이 노동자나 토지 없는 농부 같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라 중산층이라고 한다(M. Hengel, Eigentum und Reichtum in der frühen Kirche, 1973, S. 34). 그랜드는 예수를 가난한 집 충신으로 볼 이유가 없다는 증거로 "목수"라는 말로 번역되는 τέκτων이 당시 건축가, 돌로 집 짓는 사람, 나무나 철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 등의 넓은 의미로 쓰였다고 한다(M. Grand, Jesus. An Historian’s Review of the Gospel, 1977, p. 69). 헤로데 왕가는 대규모의 건축사업을 벌였기 때문에 건축수공업자들의 일거리가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이들이 높은 수익을 보장받았다고 볼 수는 없다. 성전건축의 경우, "사람들은 짧은 모세 엘레에 따라 수공업자들과 계산을 하였고, 수공업자들은 긴 모세 엘레에 따라 상품을 공급해야 했다"(J. Jeremias, Jerusalem zur Zeit Jesu, Göttingen, 1962, S. 10f./한국신학연구소 번역실 역, 『예수시대의 예루살렘』, 한국신학연구소, 1987, 26면). 이것은 건축현장에서의 노동착취가 공공연했음을 뜻한다. 또한 건축사업이 중단되면 일거에 많은 실업자들이 양산되었다. 그러나 그 직업 자체는 결코 명예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마태오는 예수가 목수였다고 하지 않고 그의 아버지가 목수였다고 함으로써 그 직업의 불명예성을 노출하고 있으며, 마침내 루가에서는 예수의 직업을 불문에 부쳐버리고 있다. 또한 수공업자인 목수라면 으레 당시나 오늘날이나 중산층에 상응한다는 판단도 가당치 않다.18)수공업자들 가운데 작업장을 소유하고 있거나 임금에 의존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은 예외없이 중간계층에 속했지만(J. Jeremias, a.a.O., 115/ 한역본 140면) 고용된 수공업자들은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목수였다는 언급은 예수를 높이기 위해서거나 어떤 그리스도론적 동기에 의한 창안이라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사실에 근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마디로 그는 하찮은 집안의 하찮은 직업19)사람들은 "목수"(τέκτων)에게서 지혜(σοφια)를 구하지 않았다. 집회서 38, 24- 39, 11에서 τέκτων은 지혜의 이상을 가르치는 학자들(γαμματενς)과 엄격히 구별된다[Dieter Lührmann, Das Markus-evangelium(HNT, 3), Tübingen, 1987, S. 107].을 가졌던 사람이다. "이 사람은 목수로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며,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이 아닌가? 또 그의 누이들은 다 우리와 같이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마르 6, 3) 이것은 그의 집안이 대수롭지 않다는 구체적인 표현이다.20)마르 6, 3a의 본문전승은 불확실한데, 그닐카는 이 가운데 세 가지 변형구를 고려한다. "건축직공 마리아의 아들"(모든 대문자 사본과 많은 소문자 사본), "건축직공의 아들"(P45 13, 124), "건축직공과 마리아의 아들"(it, arm, Org. 33, 69). 이 가운데 그닐카는 첫번째 변형구가 본래적인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 변형구가 "가장 큰 거침돌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을 지칭하면서 어머니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은 그 당시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유다교 문헌들에 따르면, 이것은 그 사람이 사생아임을 암시한다고 한다(J. GniIka, Mk, I. S. 231 / 한역본 295면). 이렇게 보면 예수가 하찮은 집안 출신이라는 것이 더 분명해진다. 이 구절을 동정녀 탄생과 연결시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셋째, 예수는 정규교육을 받지 않았다. 그를 라삐라고 부른 기록이 있으나(마르 9, 511, 2114, 45; 마태 26, 2526, 49; 요한 1, 38), 정규교육을 받은 공인된 라삐가 아니라 우리말로 경어인 '선생님' 정도 이상의 의미는 없다.21)R. Bultmann, Das Evangelium des Johannes, Got tingen, 1968/ 허혁 역, 『요한복음서연구』, 성광문화사, 1979, 103면; Bo Reicke, Neutestamentliche Zeitgeschichte, Berlin, 1968, S. 112f./ 한국신학연구소 번역실 역, 『신약성서시대사』, 한국신학연구소, 1986, 165면. 그의 생활태도나 가르치는 방법 그리고 내용은 전혀 라삐적이지 않다.22)그의 설법 자체가 라삐적이지 않다. 그의 언어는 교조적인 것이 아니라 민중의 언어인 민담적인 것이었다. 그 당시 라삐들은 고고하여 여인이나 아이들은 가르침의 대상으로 하지 않았고,23)유다교에서 6세 이전의 어린이는 여인과 더불어 토라를 배울 수 없으며 토라를 모르는 한 소외되지 않을 수 없었다[Reiner Riesner, Jesus als Lehrer, WU NT, 2, Reihe 7, Tübingen, 1988, S. 186; J. Jeremias, Jerusalem., S. 409f./ 한역본 466면 : "딸에게 토라를 가르치는 사람은 딸에게 방종을 가르치는 것이다"(Sotam, 4)]. 이른바 죄인들과 단절된 생활을 자랑으로 삼은 데 비해 오히려 예수는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가르침의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율법주의적 근거에 의해서 어린이를 격리하려는 제자들을 나무라면서까지24)그닐카는 제자들이 화낸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한다. 이것은 교육의 사회사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은 소치이다. 그들을 환영했을 뿐 아니라 그들을 어른들이 돌이켜 보아야 할 표본으로 내세우고 있다(마르 10, 13~16). 마르코는 예수가 그의 고향에서 배척을 받은 사실을 전하면서 "이 사람이 어디서 이 모든 것을 얻었을까? 이런 지혜가 대체 어디서 났을까?"라는 고향사람들의 반응을 전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정규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요한복음은 구체적으로 "이 사람은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런 학식을 쌓았을까?"(7, 15)라고 전한다. 우리는 그 나름대로의 가르침에서 그가 구약에 대한 깊은 통찰과 자신의 독특한 해석을 갖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그가 그 당시 종교귀족들의 언어인 히브리어를 알았는지는 의심스럽다.25)루가 4, 16에 따르면, 예수는 안식일에 유다인 회당에 들어가 예언서 두루마리를 읽은 것으로 되어 있다. 보라이케에 따르면, 유다인 회당 예배에서는 히브리어 텍스트가 낭독되고 능숙한 통역자가 이를 아람어로 의해(意解)했다고 한다(Bo Reicke, a.a.O., S. 90 / 한역본 135면). 이렇게 보면 예수가 히브리어를 읽은 것처럼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샬에 따르면, 유다인 회당에서는 성서를 아람어로 돌아가며 읽기도 했다고 한다(I. H. Marshall, The Gospel of Luke, Exeter, 1978/ 강요섭 역, 『루가복음 I』[국제성서주석 31.1], 한국신학연구소, 1983, 232면).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비공식적으로 성서를 읽도록 요청할 수도 있었고(마샬, a.a.O., p. 223), 설교자가 자기가 좋아하는 성구를 낭송구절로 선택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Bo Reicke, a.a.O., S. 91/ 한역본 136면). 예수는 이사야의 뒷부분 본문(61, 1~258, 6)을 선택하여 읽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일은 유다인 회당 예배에서는 금지 되어 있었다(Bo Reicke, Loc. cit.). 따라서 루가 4, 16에 근거해 예수의 히브리어 사용에 대해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가 평소에 사용한 언어는 아람어였다.26)예수의 말씀전승(Q)이 종교적 언어인 히브리어로되어 있었는가, 민중언어인 아람어로 되어 있었는가를 놓고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가 민중을 상대로 선포했다는 것이다. 예레미아스는 예수의 모국어가 아람어였다고 단정한다(J. Jeremias, 허혁 역, 『예수의 비유』, 분도출판사, 1974, 9면). 예수가 직접 한 말인 "달리다 굼", "에바다", "엘로이 엘로이 라마 사박다니" 등은 모두 아람어이다(마르 5, 417, 3415, 34). 마태오는 "엘로이"를 히브리어 "엘리"로 바꾸었다(마태 27, 46). 갈릴래아 지방에는 헬레니즘 문화가 상당히 침두되어 있었기에 헬라어가 지식층의 언어로 통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가 헬라어를 알았다는 흔적은 없다.27)마르 7, 24 이하에 보도된 시로페니키아 여인과 예수의 만남에 관련해서, 예수의 헬라어 사용 여부를 판단할 필요가 있다. 마르 7, 26에 따르면 그 여인은 "헬라 사람"으로서 "시로페니키아 출생"이라고 한다. 이것은 이 여인이 헬라어를 사용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 여인과 대화를 나누었다고 해서 예수가 헬라어를 사용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 그 여인은 "시로페니키아 출생"으로 지칭되는데, 페니키아 사람들은 헬라어와 페니키아어를 동시에 사용하는 이중언어 습득자였다. 그리고 페니키아어와 아람어는 거의 구별되지 않는 같은 뿌리의 언어였다. 따라서 예수와 시로페니키아 출생의 헬라 여인 사이의 의사소통은 거의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게르트 타이센, 「시로페니키아 여인 이야기에 나타난 지역적 사회적 특성」, 『신학사상』 제51집, 1985년 겨울호, 82). 당시 헬레니즘의 본산은 도시인데28)젤롯당운동 이래 농촌과 도시 사이의 반목과 대립은 대단했다. 소유의 격차도 그 원인이었으나, 외래문화의 영향에서 비롯된 차이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G. Theissen, Studien zur Soziologie des Urchristentums, Tübingen, 1979, S. 147; M. Hengel, Die Zeloten, S. 147). 그가 도시로 간 기억이 없는 것은29)마르 7, 24에 따르면, 예수가 "띠로 지방"으로 여행하였다고 하는데, 이 경우에도 "띠로 지방"은 띠로 시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띠로를 둘러싸고 있는 시골풍의 도시근교 지역을 말한다. 이것은 3, 8의 "띠로와 시돈 근처"라는 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마르 5, 1에는 예수가 가이사리아 지방에 간 것으로 되어 있다. 가이사리아는 데카폴리스의 가장 대표적인 도시였다. 그닐카는 마태 8, 28을 원용하여 이 민담과 원래 연결되어 있었던 지명은 게르게사이지 가이사리아가 아니었다고 본다. 지명이 바뀐 것은 마르코의 편집적 관심사 때문이었다는 것이다(J. Gnilka, Mk, I, S. 201/ 한역본 257면 이하.). 타이센은 마르코복음에 나타난 이방 지역에 대한 언급은 마르코 자신의 이방 선교에 대한 관심이 반영된 것으로 본다("Lokalkoloritsforschung in den Evangelien", EvTh 45 Jrg., 1984. 6, S. 495/「복음서에 나타난 지방색 연구」, 『신학사상』 제66면, 1989년 가을호, 582~608면). 이 사실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그는 이른바 '지식층'은 아니었다.

넷째, 예수가 가정을 이루었다는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예수의 고향사람들이 예수를 평가하기 위해서 그의 가족상황과 이름까지도 낱낱이 들고 있는데, 그의 형제들은 물론 심지어 누이들까지도 언급한다. 그러나 그의 아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예수가 독신이었다는 증거는 못 된다. 까닭은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가부장의 이름만 내세우고 그에 딸린 가족에 대해서는 무시 혹은 함구하는 일이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다. 복음서에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아내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 열두 사도들이 독신이었는지, 가정을 가졌는지도 전혀 알 길이 없다. 단지 베드로만이 가정을 가졌다는 증거가 있는데, 그것도 그의 장모가 등장함으로써 간접적으로만 알려졌을 뿐이다(마르 1, 30~31).30)바울로서신에서도 베드로가 그의 아내를 동반했다는 기록이 있다(고전 9, 5 참조). 그런데 예수가 결혼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몇 가지 점들이 있다.

먼저, 예수의 결혼관을 통해 상상해볼 수 있는 근거가 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으냐는 질문에 "하느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어서는 안 된다"(마르 10, 2~12)고 함으로써 이혼을 거부한다. 그는 창세기 1장 즉 사제자료에 거점을 두고 있다.31)여덟째 마당 '예수와 여인'을 참조. 이 말에 의거하면 예수는 결혼을 소중히 여긴 것 같다. 그러나 문맥으로 보면 이 대답의 초점은 다른 데 있다. 예수는 바리사이인들의 질문에 대해 모세의 계명에는 무엇이라고 되어 있느냐고 되묻는다. 모세의 법은 남자가 여자와 이혼하는 경우에 이혼증서를 써주는 것을 자명한 전제로 하고 있다(신명 24, 1). 그런데 당시 유다 사회에서는 일부다처제가 정당화되었다.32)J. Jeremias, Jerusalem., S. 406/ 한역본 462면. 가부장제도에서 일부 다처제는 노동력과 깊은 관계가 있다. 아내는 애정의 대상이기 이전에 노동력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내는 사람이기 이전에 재산이다. 남자는 여러 여자를 거느리면서도 여자의 이혼권을 허락하지 않았다.33)예레미아스에 따르면, 이혼할 권리는 오직 남편에게만 있었다고 한다(J. Jeremias, Jerusalem., S. 406f./ 한역본 463면). 극히 예외적으로 부인에게 이혼 청구권이 부여된 몇 가지 경우가 있었는데, 개똥 수거자, 구리 대장장이, 무두 장이 등 더러운 직업에 종사하는 남편들의 부인은 이혼을 요구하고, 결혼증서에 보증된 돈을 되돌려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J. Jeremias, a.a.O., S./한역본 388면 이하). 그러므로 남자가 아내와 인간관계가 전혀 없어도 그 아내가 다른 사람과 성관계를 갖는 것을 처벌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이혼증서를 써주라는 모세의 법이 있다는 것이 예수의 해석이다(마르 10, 5). 이런 상황에서 예수가 이혼을 단호히 반대한 것은 결혼 자체의 의미를 강조해서라기보다 여인들의 인간으로서의 권익을 남성들의 횡포로부터 지켜주려는 데 목적이 있다. "너희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이라는 말에서 '너희'는 바로 남성을 가리킨다. 이 같은 예수의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그 당시 남성들의 태도를 대변자처럼 잘 반영하고 있다. "아내에 대한 남자의 경우가 그렇다면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마태 19, 10). 이것은 일부다처제의 금지와 이혼반대에 대한 반응인데, 그럴 바에는 차라리 독신을 선택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이다. 이에 대한 예수의 말씀은 중요하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자진해서 독신으로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마태 19, 10~12). 이 예수의 대답은 결혼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나 결혼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나아가 예수의 운동이 하느님 나라 운동이라면 그가 독신이었으리라는 판단이 옳을 것이다.

이와 관련된 또 다른 대화가 있다. 어떤 사람이 예수에게 한 여인을 일곱 형제가 연속적으로 아내로 삼았는데 저들이 부활하면 그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이냐는 질문을 했다. 이에 대해 예수는 중요한 사실을 공포한다. "사람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고34)유다교 묵시문학에서도 여인은 죽었다가 부활해도 첫 남자에게 속한다고 되어 있다(Jos., Ant., 17, 339ff.; Bell., 1, 887ff.).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이 되는 것이다"(마르 12, 25).35)천사는 결혼하지 않는다는 것이 유다인의 상식이었다(Egyp Hen 15, S. 3ff.; Biller, I, S. 891). 이 말에 대한 설명으로 "하느님은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느님이시다"(마르 12, 27)라고 하는데, 이것을 위의 선언과 연결시켜보면 결혼은 죽은 자들이나 하는 것이고 산 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못 된다는 뜻이 된다.36)J. Gnilka, Mk, II, S. 161f./ 한역본 216면 이하 : Theophylakt, "Enarratio in evangelium Marci", S. 625, 628.

산 자란 바로 부활한 삶을 말한다. 루가는 그것을 이 세상과 저 세상이라고 바꿔 표현하고 있다(루가 20, 34~35). 이것은 새 세계에서의 삶에는 결혼제도 따위는 있을 수 없다는 선언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하느님의 나라를 현재로서 산 예수가 결혼했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다섯째, 예수는 아무런 소유도 없는 무명의 떠돌이 설교자였다. 사람들 중에는 마르코복음 2장 1절의 "예수께서 집에 계시다는 말이 퍼지자"라는 표현에서 예수에게 집이 있었다고 해석하는 이도 있으나,37)가파르나움에 있었다는 것인데, "다시", "집에" 등의 말이 자주 언급되는 것이 그 증거라고 한다. 그러나 그 집은 시몬 베드로의 집이라는 것이 정론이다(E. Haenchen, Der Weg Jesu, S. 99; M. Hengel, Eigentum…, S. 35). 이 구절은 단순히 집에 있었다는 것이지 그의 집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가 가파르나움에 들어갔다는 언급이 마르코복음 1장 21절에도 있는데 그것은 2장 1절과 더불어 문단 사이를 잇는 편집구에 불과하다.38)그닐카도 같은 견해이다(J. Gnilka, Mk, I, S. 98/ 한역본 123면). 그는 이 집을 1장 29절의 집과 연결시킨다. 그의 가족은 나자렛에 있었다는 기록이 여러 차례 나온다(마태 2, 23; 루가 4, 16). 그러나 그는 단 한 번 나자렛에 갔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보면 그는 출가(出家)한 사람이다. 가파르나움에 있는 집은 베드로의 집으로, 그것이 후에 교회가 되었으리라는 주장이 오히려 타당성을 갖는다.39)J. Gnilka, Mk, I, S. 98/ 한역본 123면. 예수는 제자들에게 "나와 내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릴 것(마르 10, 29)을 종용하고 있으며, 제자들을 파견할 때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 것을 언명하고 있다(마르 6, 8~9). 이러한 그가 자기의 집을 가졌으리라고 상상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이 예수를 따르겠다고 할때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루가 9, 58a)고 응대했는데, 이것은 그의 무소유의 삶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40)타이센은 예수와 그의 말을 전승한 사람들이 독신, 떠돌이, 무소유자의 특징을 보여줌을 사회학적으로 해명하면서 그것이 "편력의 라디칼리즘"(Wanderradikalismus)의 근거였음을 명확한 논리로 입증한다(G. Theissen, Studien zur Soziologie des Urchristentums, S. 92ff.).

여섯째, 예수의 인간관계는 극히 저급한 계층에 한정된다. 그가 상대한 이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이들은 중간을 훨씬 밑도는 민중들이었다. 마르코복음서에 따르면, 민중 이외에 예수와 접촉한 계층으로는 회당장(5, 22), 부자 청년(10, 17 이하) 정도일 뿐이다. 단 하나 특이한 예로 예수가 죽은 후에 산헤드린 의원인 아리마태아 요셉이라는 사람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요청했다(15, 43)는 기록이 있는데, 그는 예수의 생애 중에는 등장한 일이 없다. 이것은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역시 산헤드린 의원인 니고데모 등과 같이 유다교에도 예수를 이해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리는 상징적인 서술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41)마르코는 그가 "명망있는 의회 의원이며 하느님 나라를 열심히 기다리는 자"였다고 할 뿐(마르 15, 43) 예수와의 관계를 직접 언급하지 않은 데 반해, 마태오는 그가 부자요, 예수의 제자라고 한다(마태 27, 57). 루가에는 예수를 따르던 여인 중에 헤로데의 시종 쿠자의 아내 요안나를 다른 여인들과 함께 예수의 삶을 뒷받침한 사람으로 서술하고 있지만(루가 8, 3), 그를 귀신 들린 여인, 즉 정신병자들과 함께 나열한 것은 역사적인 것으로 신뢰하기 어렵다.42)여덟째 마당 '예수와 여인'을 참조.

예수는 어부들 그리고 젤롯당에 속했던 사람들을 제자로 불렀는가 하면 젤롯당이 가장 대표적인 원수로 간주한 세리까지 제자로 삼았는데, 이렇듯 그가 관심을 갖는 대상은 거의 예의없이 가난한 자, 억눌린 자, 소외된 자, 병자 등 이른바 죄인들이다. 이 중에 창녀도 포함 되었다는 암시도 있다(마태 21, 31). 예수를 가리켜 죄인과 세리의 친구(마르 2, 15)라고 한 당시의 세평은 예수의 인간관계를 단적으로 나타내준다.

그는 이른바 고위층과는 아무런 접촉이 없었고, 다만 예루살렘의 세력을 대표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감시를 받았으며 저들과 충돌했을 뿐이다.

일곱째, 예수가 병을 고쳤다는 사실은 그의 생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 내용이나 의미에 관해서는 별도로 다른 마당(일곱째 마당 '사탄과의 투쟁')에서 설명하게 될 것이다. 특히 그가 귀신을 쫓았다는 이야기가 거듭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행위는 그가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 시대에는 어떤 신적인 존재나 특수한 사람만이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43)복음서의 보도들과 헬라어 마술 파피루스에는 많은 병행기사들이 있다. 스미스는 예수의 기적과 티아나의 이교도. 마술사인 아폴로니우스의 기적 사이의 병행기사들을 목록화하였는데(M. Smith, Jesus the Magician, New York/London, 1978, pp. 84-93), 이것도 필자의 견해를 뒷받침한다. 성서에는 다른 사람들(마르 9, 38)과 예수의 제자들 그리고 바울로도 이 같은 기적을 행하였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44)베드로는 성전 문 앞의 앉은뱅이(사도 3, 1 이하)와 애니아의 중풍병(사도 9, 32~34)을 고쳤고 도르가를 소생시켰다(사도 9, 36 이하). 바울로는 유티게를 소생시켰고(사도 20, 7 이하), 리스트라에서 앉은뱅이를 치료하고(사도 14, 8 이하), 보불리오 아버지의 이질을 치료했다(사도 28, 8). 시몬이라는 사람이 마술사로서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성서 기자는 조금도 이상히 여기지 않고 보도한다(사도 8, 10). 그는 이른바 치병의 카리스마를 가진 이라고 보면 된다.

여덟째, 예수의 공생애 기간은 아주 짧았다. 사람들은 흔히 예수가 3년 동안 활동했다는 정설을 따른다. 그런데 그것은 예수의 공생애 중 유월절이 두 번 지나갔다는 요한복음서의 기록에 기인한다.45)요한 2, 1313, 1. 그러나 맨 처음 씌어진 마태오나 루가복음서에 의하면 유월절은 바로 그의 생애 최후의 날로 단 한 번 있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공생애는 1년도 채 못 되는 극히 짧은 기간이다. 예수의 전승자들은 도대체 예수의 생애에 대한 연대적 관심이 별로 없었다. 마르코복음에는 예수의 탄생시기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으며, 그의 연령에 대한 언급도 전혀 없다. 마태오나 루가복음에 각각 태어난 해를 암시하는 것이 있는데, 그 차이는 무려 10년이나 된다. 마태오에는 헤로데가 죽은 해에 예수가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고(3, 19), 루가에는 로마제국이 유다의 인구조사를 실시한 때를 그가 태어난 해로 보는데(2, 1~3), 그것은 주후 6년에 실시된 것이다. 그의 나이에 대해서도 확실한 언급이 없다. 우리가 그의 공생애 시작을 30세로 잡는 것은 루가복음의 "약 서른 살쯤"(3, 23)이라는 말에 근거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마태오나 루가의 탄생설화를 액면대로 받아들인다면 예수의 생애는 주목의 초점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공생애 이전의 그의 생애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 루가가 언급하는 어린 시절의 에피소드(루가 3, 41~52)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내용이 못 된다. 우리의 상상력을 동원한다면, 목수인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 거의 언급이 없기에 일찍 타계한 것으로 볼 수 있고, 그런 상황에서 예수는 여러 동생들을 거느린 호주로서 한 집안을 짊어진 목수 즉 노동자로 살면서 구약성서를 열심히 읽었다는 사실, 나자렛이란 농촌에 살았으므로 농부들의 생활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고 가난한 자의 삶의 조건들을 세밀하게 관찰했으며 꽃 한 송이, 하늘을 나는 새 한 마리에도 무관심하지 않고 예민한 통찰력으로 분석하고 명상하는 삶을 살았다는 정도 이상으로 말할 것이 없다.

아홉째, 그러면 그가 그 짧은 기간에 비록 소수에게라도 절대적 영향을 끼쳤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그는 많은 민중 가운데 열두 제자를 뽑아 특수훈련을 한 것처럼 서술되어 있다. 열두 제자를 선택하여 저들을 무리들과 구별하고(마르 4, 36 이하), 그들을 파견하여 회개운동을 전개하였으며(마르 6, 7 이하), 최후만찬을 함께 한 것도 열두 제자라는 것을 지적한다. 중요한 장면에서는 그 중에서도 세 제자만 입회시켰다. 예를 들어 죽은 사람을 살릴 때(마르 5, 40), 그의 중대한 결단의 장으로 보이는 변화산상으로 오를 때(마르 9, 2), 예루살렘 성전 붕괴를 예고할 때(마르 13, 3), 그리고 게쎄마니 동산으로 오를 때 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제자훈련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 중 한 사람은 예수를 팔고, 베드로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정했으며(마르 14, 66 이하), 그가 체포될 때 제자들 모두가 도망쳤다(마르 14, 50). 그러므로 그의 십자가 처형 현장에 열두 제자는 결국 한 명도 있지 않았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젤롯당으로 간주되는 바라빠보다 못했다. 그러므로 대중은 예수보다 바라빠를 선택한 것이다(마르 15, 15). 끝까지 그의 죽음을 지켜본 것은 오직 막달라 마리아를 위시한 여인들 뿐이었다(마르 15, 40).

열 번째, 그는 예루살렘으로 진입하여 성전을 숙청한 후 예루살렘파와 로마의 야합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이러한 처형의 세력과 처형방식 그리고 그의 죄명 '유다인의 왕'은 그가 정치범으로 처형되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의 죄목과 그의 삶이 잘 접목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의 처형방식이 특별한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그를 전후해 여러 메시아운동이 일어났으며, 많은 독립투사들이 싸우다가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다음 마당 '예수의 시대상'에서 자세히 서술되겠지만 그러한 메시아운동의 상황을 간략히 일별해보자. 안티파터가 그의 아들 중의 하나인 헤로데를 갈릴래아 지방의 군사령관으로 임명했을 때, 이에 저항하여 싸운 갈릴래아 민중들 가운데 최소한 2천 명이 십자가에 처형당했으며,46)Bo Reicke, a.a.O., S. 124 / 한역본 126면; W. R. Farmer, "Judas Simon and Athronges", New Testament, Vol. N, 1958, pp. 147-155. 그들의 지도자인 에제키아도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주후 6년 로마제국은 시리아 주둔 로마총독을 통해서 유다 지방의 호구조사를 실시했는데, 그것은 세금을 거두기 위해서였다.47)Jos., Ant., 17, 355. 이에 대해서 특히 갈릴래아 민중들이 궐기했는데48)Bo Reicke, S. 88 / 한역본 132면. 가말라의 유다(일명 갈릴래아 사람, 사도 5, 37 참조 : 마태 26, 69)와 사독(Zadok)이라는 바리사이인이 그 선두에 나서서 싸우다 죽었다. 한편 유다의 두 아들 야곱과 시몬이 그에게서 지휘권을 물려받아 싸우다가 모두 처형되었으며,49)Bo Reicke, S. 101f./한역본 151면. 또 그의 아들 므나헴(Menahem)이 유다 전쟁 발발시에 예루살렘까지 진격하여 장렬하게 전사했다.50)Bo Reicke, S. 193/ 한역본 273면. 또 한편으로는 헤로데 사후에 일개 목자 출신인 아트롱게스(Athronges)가 유다 지방에서 민중을 규합, 궐기했으며 종 출신인 시몬은 헤로데에게 분노한 민중을 이끌고 무장봉기를 했다가 그들과 함께 처형되었다.51)Bo Reicke, S. 83/ 한역본 125면. 이렇게 수천, 수만의 이름없는 민중들이 싸우다가 죽었으며, 메시아적 바람을 일으키면서 저들을 진두지휘하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예수의 처형을 전후해서 무수하게 나타났다. 저들은 모두 자신들이 처형당하는 사실에 합당한 투쟁을 했다. 그러나 예수에게는 그들과 같은 무장해방투쟁의 뚜렷한 흔적이 없다. 그런데 왜 예수운동만이 세계로 번져 나갈 수 있었을까?

열한 번째, 그는 자신을 메시아라고 생각했는가? 그때 당시에 많은 메시아운동이 일어났다.52)자세한 것은 넷째 마당 '갈릴래아로'를 참조. 위에서 말한 사람들 외에도 듀다스, 여호수아, 도시데우스 등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메시아임을 인식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예수는 그 자신을 메시아라고 내세운 일이 없다. 몇몇 학자들은 마르코복음 8장 26~27절 이하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에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한 베드로에 대하여 예수가 자신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다는 30절의 기록을 예수가 자신이 메시아임을 고백한 것이라고 이해한다. 마태오는 확실히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 근거를 주고 있다.53)마태 16, 17에는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네게 이것을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다……"가 삽입되어 있다. 그러나 똑같은 자료를 전승한 루가는 마르코복음서와 같은 시각을 갖고 있다. 예수는 그를 메시아라고 하는 베드로의 고백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들은 베드로가 표상하고 있는 메시아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베드로의 고백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예수는 뒤이어 그의 죽음과 부활을 말한다. 이것은 당시의 어떠한 메시아상에도 없는 내용이다.54)전통적인 메시아 이해에 대해서는 본서 45면 이하를 참조. 베드로가 제자를 대표해 예수에게 그런 일이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맞선 것은 분명 이 점을 나타낸다. 예수는 베드로나 그 제자들이 기대했던 그런 메시아는 아니다. 따라서 30절에, 자기에 대한 비밀을 지켜달라는 당부는 메시아라는 것을 비밀로 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의 내용, 즉 그가 죽음을 당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라는 이해가 타당하다.55)R. Bultmann, Die Geschichte der synoptischen Tradition, S. 278/ 한역본 322면.

또는 예수가 자신을 '인자'라고 한 것이 메시아를 뜻한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56)'인자'가 메시아 칭호로 사용된 것은 예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것을 메시아 칭호로 사용한 것은 후대에 와서이다. 그러나 헬레니즘화된 유다인 둘이 그렇게 사용하기 시작했는지 아니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그렇게 사용하기 시작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H. Lietzmann, Der Menschensohn. Ein Beitrag zur neutestamentlichen Theologie, 1896). '인자'라는 말은 아람어 brns의 헬라어 역어에서 비롯되었다. 리츠만의 입장을 따르는 예레미아스는 '인자'와 관련된 가장 오래 된 어록전승층을 분석하면서, 첫째 '인자'라는 칭호가 나오지 않는 어록들이 일차적이며, 둘째 본래 칭호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지 않았던 아람어 brns가 '인자'라는 칭호로 대치된 것은 "언어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J. Jeremias, "Die alteste Schicht der Menschensohn-Logien", ZNW, 58, 1957, S. 166ff.). 이러한 논의의 요점은 인자를 메시아 칭호로 보는 것은 예수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인자'를 '개인'을 나타내는 무성격의 불특정 표현으로 보는 리츠만 이래의 이해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필자는 '인자'를 집단개념으로 본다. 이에 대해서는 안병무, 「마가복음에서 본 역사의 주체」, KNCC 신학위원회 편, 『민중과 한국신학』, 한국신학연구소, 1982, 178면 이하. 각주 110을 참조. 복음서에는 인자에 대한 두 가지 사용법이 있다. 하나는 예수가 자신을 가리켜서 부르는 칭호이고 또 하나는 장차 올 심판자로서의 인자가 그것이다. 후자는 다니엘서 7장 13~14절에 나오는 그 인자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예수 자신에 대한 칭호로 사용되고 있는 인자는 결코 다니엘서의 그 인자가 아니고 에제키엘이 자신을 인자라고 했듯이(에제2, 1) 단순히 인간이라는 뜻을 넘어서지 않는 겸손한 표현이다.57)C. Colpe, Art. ό υίός του άνθρώπου,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 T., Vol. XIII, pp. 431~432. 만일 그것이 메시아의 칭호였다면 왜 제자들이 한 번도 예수를 그렇게 부르지 않았을까? 문제가 되는 것은 오직 마르코복음 14장 61~62절의 내용이다. 재판석상에서 대제사장이 던진 "당신이 찬양을 받으실 분의 아들 그리스도요?"라는 물음에 예수가 "내가 바로 그이다. 너희는 인자가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라고 답하는 구절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후대교회에 의한 고백이며 예수 자신에게 돌릴 수 없는 발언이다.58)R. Bultmann, Die Geschichte der synoptischen Tradition, S. 291/ 한역본 341면. 슈바이처는 마르 14, 62의 전승사를 해명하는 일이 어렵다고 전제하면서 이 구절은 구약성서의 관련구절들(예컨대 시편 110, 1 : 다니 7, 13)을 비교적 오랫동안 예수사건과 연결시켜 해석한 산물일 것이라 본다(E. Schweitzer, Das Evangelium nach Markus, NID, Göttingen, 1976, 177). 그닐카는 마르코가 인자의 도래(마르 13, 26 참조)와 시편 110, 1에 대한 그리스도론적 해석(마르 12, 35~37 참조)을 서로 결합된 형태로 받아들여 62절을 작성하였을지 모른다고 본다(J. Gnilka, Mk, II, S. 277/ 한역본 365 면). 뤼르만은 61절b, 62절은 마르코복음서 전체에 흐르는 그리스도론의 총괄이기 때문에 61절b, 62절은 마르코의 표현이라고 본다(Dieter Lührmann, a.a.O., S. 250). 까닭은 권력자들에게 재판을 받고 힘없이 죽음으로 향하는 그는 구름을 타고 오는 심판자로서의 인자상과 전혀 합치되지 않기 때문이다. 재판을 받거나 처형당하는 메시아로서의 인자는 다니엘서의 인자(다니 7, 13)와 전혀 상부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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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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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로데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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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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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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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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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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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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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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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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