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수수께끼는 그 다음부터이다. 예수가 난 해를 주전 4년으로 잡으면 그가 죽은 해는 주후 30년으로 추측된다.59)Jack Finegan, Handbook of Biblical Chronology. Principles of Time Reckoning in the Ancient World of Problems of Chronology in the Bible, 1964, p. 285ff. 세례자 요한이 처형된 것이 28년 후반기쯤이다. 그러므로 예수 공생애는 1년 남짓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는 모호한 재판을 통해 처형되었는데, 그것은 패배자의 모습 그 자체였다. 그의 체포와 더불어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도망침으로써 저들도 오합지졸이었음이 노출되었다. 그런데 이 오합지졸이 그렇게 빠른 시일 안에 다시 모여들어 "너희가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이를 하느님이 살려 일으켰다. 그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처형되었다가 다시 살아났다"(사도 2, 23~24)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그 예수는 이제 곧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함께 내림(來臨)할 것이라는 확신 속에 모든 재산을 공유하는 공동체를 이루고 그 대표자들은 거리에 나서서 심판의 때가 임박한 것을 설교하기도 했다.60)사도 2, 43 이하ᆞ4, 32 이하.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바울로는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 500명이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고전 15, 6). 루가는 예루살렘 공동체의 회원이 120명이었다고(사도 1, 15)하는가 하면, 하루에 3천 명이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사도 2, 41). 일찍이 헬레니즘계 그리스도인인 스데파노가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증언하다가 순교당하고, 예수의 제자 야고보가 42~43년에 순교당하는 등61)사도 8, 54~60. 급속한 일대전환의 사건이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바울로의 회심이다. 바울로는 히브리인으로 헬레니즘의 영역인 다르소에서 성장한 지식인이었다. 그의 고백대로 그는 유다교에 철저했으며, 혈통으로도 순수성을 보존했을 뿐 아니라62)물론 최근에는 바울로의 로마시민권 소유가 자명한 것이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슈테게만은 로마시민권의 내용, 그것의 취득양식, 유다인에게 로마시민권이 부여된 경우, 바울로의 로마시민권과 관련된 성서내의 직ᆞ간접적인 전거들을 세밀하게 검토한 후, "사도 바울로가 로마시민권을 가졌으리라는 것은 극히 개연성이 희박하다"고 말한다. 사도 바울로의 로마시민권 소지설은 사도행전 저자가 바울로의 로마 이송에 관한 자신의 보도들로부터 '추론'해낸 것이라고 한다(W. Stegemann, "War der Apostel Pauls ein römischer Burger?", ZNW, 78, 1987, S. 229/「사도 바울로는 로마시민이었는가?」, 『신학사상』 제6집, 1989년 여름호, 323면 이하). 로마시민권을 소지한 중류 이상의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런데 그가 예수에게로 전향한 것이 예수가 죽은 지 2~3년 내외였다63)바울로의 전향은 주후 32~33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입장이다(M. Hengel, "Chronologie und neutestamentliche Chronologie in NT und Geschichte", O. Cullmann zum 70 Geburtstag, 1972, S. 43ff.; R. Jewett, Paulus Chronologie. Ein Versuch, München, 1982, S. 56f.).는 것은 크게 주목해야 할 사건이다. 그는 율법을 지킴으로써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철저한 유다주의자였다. 그런 그가 그리스도인들의 케리그마를 들은 것이다. 이때 그 케리그마는 율법으로가 아니라 나자렛 예수와 그의 십자가의 의미를 믿음으로써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증언의 핵심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사건'이 '예수의 민중들에 의해서' '하느님의 사건'으로 재빨리 파악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예수에게 열광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의 민중들의 신념이 얼마나 확고했던지 그들은 그 주동자들의 사회적 신분이나 교육수준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바울로까지도 항복하게 한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다고 고백하는데(사도 22, 4) 그것은 벌써 예수운동이 그만큼 강력해졌음을 입증한다.64)전향」(轉向) IᆞII, 『살림』, 1988년 창간호, 1989년 1월호 참조. 바울로는 그의 편지에서 이미 그보다 이전에 형성된 그리스도에 관한 전승들을 인용하고 있다. 필립비서 2장 5~11절의 그리스도 찬가나 고린토전서 15장 3~4절의 예수의 부활에 관한 고백이 그것이다. 루가는 예루살렘의 오순절 축제에서 예수의 민중을 통해 일어난 한 사건을 극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세계에 흩어진 수많은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 운집했다. 그런대 예수의 민중들이 그들 한가운데서 예수사건을 증언했는데, 그것이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이해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루가는 성령의 내림사건으로 전한다.
이 서술에서 주목되는 것은 그 군중들이 예수의 민중을 갈릴래아 사람들이라고 거듭 지적한 점이다(사도 1, 11). 갈릴래아 사람이라는 것은 다분히 멸시하는 뜻으로 쓰이는 말인데, 저들이 일대 돌풍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 일어났다 주저앉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죽음까지 불사하는 저들의 행진은 팔레스틴 영역을 벗어나 그레꼬 로마의 영역으로 '전염병'처럼 퍼져나갔는데,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바울로가 바로 그 선두에 서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이러한 급전환을 가져왔을까? 사람들은 그것을 부활사건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부활사건은 무엇인가? 부활사건은 그 자체로서는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역사적 예수와의 만남과 회심의 사건을 경험한, 그리하여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된 사람들에게 국한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65)부활한 예수는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만 나타났다. 부활사건은 역사 안에서 살다 역사에 의해 처형된 예수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사건에서 예수운동의 거점을 찾을 것이 아니라 부활경험이라는 사건을 통해 역광적으로 예수의 삶을 새롭게 조명함으로써 이해된 그 근거를 찾아 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다시 다른 면, 즉 역사의 예수에게서 그럴 수 있는 근거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