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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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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권을 이양받은 자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전숙청을 감행했을 때 예루살렘의 종교귀족들은 "당신은 대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시오?"(마르 11, 28)라고 물었다. 무슨 권위란 공적인 직책을 가졌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특권이 구체적으로 제시될 때 인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이에 아무 대응도 하지 않았다. 저들이 예수에게 표징을 보여달라고 한 것은 이때 말고도 또 있었다(마르 8, 11 이하). 그때 예수는 그것을 거부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이 옥중에서 자기 제자를 보내어 "당신이 오실 그이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이 물음에 직접 가부를 말하는 대신 "맹인이 보고, 절뚝발이가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며, 귀머거리가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루가 7, 22a)고 대응했다. 이 대답에서 주목할 것은 그가 자신을 올 그이(ό έρχόμενος)로 내세우지 않고 그를 통해서 일어나는 사건(event)을 전달할 뿐이라는 사실이다. 이 내용은 루가에서 그의 공생애 선언으로 거의 그대로가 다시 인용되는데 그것은 그의 삶을 집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서 일어난 사건 자체가 중요하지, 메시아건 하느님의 아들이건 기존의 개념과 그를 일치시키는 것은 현실성도 없거니와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다. 그러므로 그가 메시아인가라는 물음에 매이지 말고 그의 행태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 이제, 그의 행태를 몇 가지로 구분해서 신격화 해보자.

1. 그를 따라오려는 사람은 인륜적 의무도 그리고 삶의 보장으로 여기던 것들도 모두 버려야 한다고 한다. 그는 자기를 따르기 전에, 죽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겠다는 아들의 도리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가족에게 출가의 작별인사를 하겠다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루가 9, 59~60). 그는 누구든지 내게 오는 사람은 아버지, 어머니, 아내, 자식, 형제, 자매를 모두 버려야 한다고 한다(루가 14, 26). 그뿐만 아니라 모든 소유권을 포기하도록 요구한다(마르 10, 17 이하; 10, 29 참조).

2. 그는 자신과의 연대관계를 확인하는 것이 장차 올 심판의 기준이 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하면 인자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하겠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사람은 나도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하겠다"(루가 12, 28~29). 나아가 예수 자신이 하는 말을 행위로 옮기는 문제는 그의 존재의 바탕을 구축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토로한다. "내 말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도 같다"(마태 7, 24 이하/병행).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예수가 그 자신과 자신의 말을 일치시킨다는 점이다.

3. 예수는 모세의 법을 포함한 이스라엘 조상들의 전통에 대해서 "옛사람은…… 그러나 나는……"이라는 형식으로 대립시킴으로써 어떤 것은 더욱 철저히 하는가 하면 어떤 것은 정면으로 파괴해 버린다. 가령 "옛사람은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지만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원수를 갚지 말고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라"(마태 6, 38~39). "모세는 이혼하면 이혼증서를 써주라고 했지만 나는 너희에게 명한다. 어떤 경우에도 이혼해서는 안 된다"(마태 6, 31~32).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예수의 '나'에 대한 의식이다. 그는 온 유다 전통과 맞선 '나'이다. 우리는 그 '나'를 존재론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다. 그 '나'는 역사의식이다. 어떠한 특수한 시점에서 있다는 역사의식, "때가 찼다"는 역사의식. 이 역사의식은 곧 낡은 것과 새 것의 분수령에서 있다는 자기의식과 결부된다.

4. 예수는 그 시대의 낙오자들, 당시 체제에서 거부된 자들과 무조건 어울렸을 뿐만 아니라 그들 편에 섰다. 이 행위는 강물 위에 비친 달에 미쳐 물을 의식하지 않고 달을 잡으려다가 물에 빠진 이태백과 같은 행위거나 아니면 의식적으로 체제에 도전하는 행위이다. 그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 17)고 당당하게 선언하였다. 이것은 그 시대 체제와의 갈등을 첨예화하는 행위이다. 여기에서도 예수의 자의식을 볼 수 있다. 기존체제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자의식, 그것은 낡은 세대는 지나가야 한다는 역사의식과 결부되어 있다.

5.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는 마치 자신이 악마와 하느님의 격전장에서 하느님 편에 선 야전사령관 같은 인식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는 "내가 하느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들을 쫓아내면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임했다"(루가 11, 20a)고 선언한다. 뿐만 아니라 귀신들린 자들을 만날 때마다 "사탄아, 물러가라"고 명령함으로써 사탄을 굴복시키고 있는데, 그것은 귀신 추방이 곧 낡은 세대인 악마가 지배하는 시대를 끝마치려는 전투적 행위라는 인식이다.

예수는 자신의 말이 장차의 심판을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고 인식할 뿐 아니라 그 말 속에는 현재적 상황에 대한 뚜렷한 반체제적 심판자 의식이 드러나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그의 가르침 속에 조용히 반영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하나는 바리사이파 사람이요, 하나는 세리였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서서 혼자서 이렇게 기도했다, '하느님, 나는 다른 사람들 같이 욕심이 많거나 불의하거나 간음하는 사람이 아닐 뿐더러 이 세리와 같은 사람도 아닌 것을 감사합니다. 나는 한 주간에 두 번씩 금식하고 있으며 내가 얻은 것의 십일조를 드립니다'. 그런데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볼 생각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루가 18, 10~13). 이 이야기 끝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 앞에 옳다 함을 받고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이 세리였고, 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었다"(18, 14)고 판정을 내린다. 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판정인가! 어떻게 당대에 국민의 지도층으로 도도히 부상해 자리를 굳히고 있는 바리사이파를 민족의 반역자 중에서 가장 멸시 받는 세리와 마주 세우며, 어떻게 세리를 의롭다고 판정할 수 있는가! 이것은 그 시대의 가치질서에 정면으로 맞서는 당돌한 선언일 뿐 아니라 당당한 하느님의 대리자와도 같은 선언이다.

또 한 예를 보자. 사람들이 예수에게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축복해 주기를 원했을 때 그의 제자들은 그들을 꾸짖었다. 이에 대해서 예수는 "하느님 나라는 이런 어린이들의 것이다.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면 결코 거기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르 10, 14~15)고 판결한다. 이 또한 그 시대의 가치질서를 정면으로 무시한 판결이다. 그 당시 유다 사회에서 모든 것의 가치기준은 토라였다. 토라를 알고 그것을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에 따라 사람의 가치가 결정되었다. 여인과 어린아이들은 멸시의 대상이었다. 까닭은 여인들은 토라를 배울 기회를 박탈당했으며, 어린이는 물론 토라를 배우기 이전의 상태에 있기 때문이었다.66)여덟째 마당 '예수와 여인'을 참조. 예수의 심판은 토라를 무시한 것이다. 아니, 하느님 나라에 참여한다는 것은 토라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와 같은 대담한 선언을 할 때 그는 라삐들처럼 토라나 조상들의 이름을 들어 자신의 권위를 뒷받침 받으려 하지도 않았다. 마치 전권을 하느님에게서 양도받은 사람처럼. 푹스(E. Fuchs)는 "이와 같이 하느님의 자리에라도 있는 것처럼 행위하고 말하는 이는 누구인가"라고 질문한다.67)E. Fuchs, Zur Frage nach dem historischen Jesus, 1960, S. 154. 어떤 사람들은 그를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했다(마르 8, 28).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인물유형에 맞추려면 예수를 예언자 계열에 두어야 한다. 그것은 어떤 체제 내에서 주어진 자리도 없이 무관의 왕자 같은 위치에서 미래에 의하여 현재를 비판하고 회개를 촉진하는 데서 그렇다. 그러나 일반 예언자들과 전혀 다른 면들이 있다.

예언자들은 언제나 하느님 말씀의 전달자로 자처하고 자신은 그 말씀 뒤에 숨는 데 반해 예수는 '나', '나의 말'을 전면에 내세운다. 예언자는 말을 선포한 후 기다리거나 홀연히 사라지기도한다. 그러나 예수는 기다리지도 숨지도 않으며 전장 한복판에서 있는 지휘관처럼 행동한다. 예언자는 모세 율법의 테두리 안에서, 그리고 그 권위에 의존하여 그 뜻을 현재화한다는 의미에서의 개혁을 촉진한다. 그러나 예수는 모세의 율법까지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어떤 권위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럼 그는 누구인가? 메시아인가? 그런데 유다의 전통적 메시아 상에는 예수의 행태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은 면이 없다. 즉 기존의 메시아 상 어느 부분에도 예수를 맞출 수 없다. 유다의 메시아 상은 여러 가지이지만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그의 출처를 모른다. 둘째, 그는 어디까지나 유다 민족 중심의 메시아이다. 셋째, 그는 전권을 위임받은 왕적 심판자로 임한다. 그런데 예수는 그 어느 것에도 맞지 않다. 그의 초라한 행로를 메시아로 볼 수는 없다. 그래서 브레데는 마르코에는 '메시아의 비밀'이라는 베일이 씌워져 있다고 보았다.68)W. Wrede, Das Messiasgeheimnis in den Evangelien, Göttingen, 1965, S.145. 즉, 메시아지만 그것을 비밀에 부치기 위해 엉뚱한 삶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석하면 쉽게 가현설에 빠진다.

아니, 그의 삶은 어떤 기존의 상에도 맞지 않는다. 생동하는 삶이 어떻게 기존의 어떤 상에 들어맞겠는가! 예수는 예수지! 그를 기존 메시아 상에 일치시키려는 것은 그를 주조하는 행위다! 그러나 그가 누구냐를 설명하는 데서 메시아가 유다인에게 가장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전(前)이해이기 때문에 메시아라고 했다. 그 메시아란 말에서 가장 호소력이 있는 것은 지금까지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이, 와야 할 그이다. 나는 언젠가 이것을 한국에서는 '님'이라는 말로 표현하면 제일 적합하리라는 주장을 쓴 일이 있다. 가령 한용운의 '님'처럼 모두가 가슴 속에 기다리고 있는 그이.

이런 뜻에서 세례자 요한은 당신이 "오실 그이"냐고 했다. 메시아란 히브리어는 그리스도라는 헬라어로 번역되었다. 그것은 '기름 붓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것이 헬라문화권에서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ό χριστός가 그저 고유명사로서 Christus가 되고 말았다. 그뿐이 아니다. 예수는 이 역사에서 계속 소외되었다. 무엇보다도 교회에서 소외되었다. 저들은 역사의 예수를 거부했다. 왜? 그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기존질서가 파괴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속의 대심판관은 이 점을 잘 묘사했다. 그는 누구인가?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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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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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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