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지배층은 불의한 외세 앞에 무력했거나 아니면 부패하여 권력과 야합하고 이권을 획득하기에 급급했다. 그 지배층은 예루살렘의 북서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 모데인(Modein)에서 안티오쿠스를 위한 축제를 준비하였다. 그 동리에는 예루살렘을 떠나 은둔생활을 하는 사제 출신인 노인 마따디아(Mattathias)가 아들 다섯 명과 함께 살면서 시리아의 횡포에 울분을 달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축제를 집행하는 관원이 한사코 그에게 개막예식을 주관하도록 강요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는 그가 존경받고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6)Jos., Ant., 12, 6, 1. 그의 반항정신을 꺾으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다. 그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는데, 한 유다인이 자발적으로 그를 대신해서 그 일을 하는 데 분격한 마따디아는 그를 쳐죽임과 동시에 이방 관원들도 쳐죽이고 "우리 조상들의 전통과 하느님을 경의하는 열의가 있는 자는 누구든 나를 따르라"고 외치며 아들들과 더불어 입산했는데 수많은 민중이 그를 따라 큰 부대를 이루게 되었다. 주전 166년 마따디아 사제의 아들 중 한 명인 마카베오라고 하는 유다(Judas)의 지휘하에 제2차 가나안 농민혁명을 일으켰고, 주전 164년 마침내 예루살렘을 탈환함과 동시에 제우스 신단으로 더럽혀진 성전을 8일간 정화하는 축제를 올렸다(마카상 4, 36~61). 이것이 수전절(Chanukka)의 시작이다.7)요한 10, 22 참조.
유다가 전사한 후 그 형제 중 마지막 생존자인 시몬(Simon)이 주전 142년에 이르러 비로소 사실상의 독립을 쟁취하게 되었다. 이로써 주전 579년 바빌론에 의해서 잃었던 나라를 되찾게 되었다. 시몬은 아시리아 때부터 170년간 부과된 세금의 멍에에서 이스라엘을 해방하고, 이스라엘민이 자유인임을 선포했으며,8)마카상 13, 39; Jos., Ant., 13, 6, 8. 새로운 연호를 설정하고,9)마카상 13, 42. 새 화폐를 만들고, 잃었던 국가와 종교와 언어를 재생시켰으며, 에피파네스가 세운 아크라를 제거해버렸다.10)마카상 13, 49~52.
그러나 마카베오 가는 기득권 유지와 판도 확대에 부심한 나머지 그들이 궐기할 때의 기본정신을 배반하기 시작했다. 유다가 전사한 후 그의 뒤를 이은 요나단(Jonathan)은 셀류커스와 적대관계에 있는 프톨레매오의 왕으로부터 대사제 제복과 왕을 상징하는 금관을 받았으며, 그 뒤를 이은 시몬은 자기의 권력구축에 혈안이 되어 대사제직과 군사령관직 그리고 통수권자의 지위를 굳힘으로써11)마카상 14, 25~49. 유다 전통에 배치되는, 권력과 사제직을 한 손에 쥐는 권력체제를 만들었다. 그리고 요나단의 아들 히르카누스 1세(Hyrkan I, 주전 134~105년 재위)는 계속 그 권력의 판도를 넓히기 위하여 신흥제국인 로마를 등에 업고 요르단 강 건너편 메드바(Medeba), 세겜(Shechem), 이두메(Idumäa)까지 강점하여 그 안의 이방인들에게 할례(割禮)를 강요했으며, 사마리아를 점령함과 동시에 그리짐 산의 신전을 파괴함으로써 예루살렘을 권력과 종교를 바탕으로 하는 중앙집권의 상징으로 삼으면서 하스몬 군주로 등장했다. 그러나 이 권력욕이 마침내 로마제국을 끌어들이는 결과를 초래하고야 만다.12)클라우스너는 하스몬왕가의 업적이 없었으면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토대도 마련되지 않았으리라고 할 정도로 그 업적을 중시한다(J. Klausner, Jesus von Nazareth, 1952, S. 179ff.). 이러한 평가는 유다인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요세푸스에 따르면, 아리스토불과 히르카누스가 세력장악을 위해서 로마에 경쟁적으로 아첨했으며, 아리스토불은 폼페이우스에게 뇌물을 전달하고(Jos., Ant., 14, 3), 히르카누스는 예루살렘 성문을 열어주었다고 한다(Ant., 14, 5, 2). 이를 본 민중은 마침내 이스라엘이 군주국으로 되는 것을 거부하고야 말았다(Ant. 14, 3,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