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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데왕가

로마가 이용하고 또 그 로마를 역으로 이용한 것은 헤로데 집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헤로데 가를 통해서 로마제국의 면모를 볼 수 있다. 나아가 헤로데 집안 자체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예수 당시의 민중운동을 아는 데도 중요하다.

히르카누스와 아리스토불 2세가 권력싸움에 혈안이 되어 있을 때 이두메 혈통의 반(半)유다인인 안티파터(Antipater)가 교묘히 등장했다. 안티파터는 히르카누스를 업고 로마세력을 끌어들인 장본인이다. 로마 강점 이후 10여 년간은 살벌한 암흑의 시기였다. 이 기간에는 봉기와 살육전이 계속되었다.16)J. Klausner, a.a.0., S. 183ff. 주전 49년부터 20여 년간 로마는 내란으로 혼란에 휩싸였다. 폼페이우스와 케사르 사이의 권력싸움 틈바구니에서 로마에 포로로 잡혀갔던 아리스토불과 그의 아들 알렉산더는 처형되었고, 폼페이우스는 전사했다(주전 48년).

로마의 앞잡이 안티파터는 히르카누스로 하여금 케사르를 지원하기 위해 이스라엘 군인 3천 명을 파견하게 했다. 그 공로로 안티파터는 일약 이스라엘민을 지배하는 총독으로 임명된다. 그는 아들 파자엘(Phazael)을 예루살렘 지역, 헤로데(Herodes)를 갈릴래아 지방의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민중은 봉기했다. 특히 갈릴래아의 민중을 이끈 사람은 에제키아다. 그런데 젊은 헤로데는 저들을 재판도 없이 무차별 학살했다. 이 만행에 예루살렘 민중이 분노해서 히르카누스에게 그를 처벌해줄 것을 요구했다. 히르카누스는 마지못해 산헤드린에 이 문제를 회부했는데, 헤로데가 군대를 거느리고 위협하는 통에 정식으로 거론할 수도 없었다.

주전 44년 줄리어스 케사르가 살해된 후 카시우스(Cassius) 등을 물리치고 안토니우스(Antonius)가 실력자가 되자(주전 41년) 유다 민중은 계속 그에게 대표를 보내서(주전 41년) 헤로데와 파자엘의 횡포를 탄핵했다. 헤로데에게 이미 뇌물을 받은 안토니우스가 이를 가볍게 거절함으로써 또다시 100여 명의 사신을 보내어 그들의 횡포를 고발했으나 그 결과는 오히려 두 형제의 지위를 높여주고 말았다. 이스라엘 민중은 또다시 천여 명의 대표를 보내어 그 뜻을 관철하려고 했다. 그러나 더 많은 뇌물을 받은 안토니우스는 이에 살육으로 응수하여 많은 희생자를 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주전 40년에 하스몬 가의 후예인 안티고누스(Mattathias Antigonus)는 숙적인 로마의 파터(Parther)가 시리아를 침범하는 때를 틈타 그들의 지원을 약속받고 제 땅으로 잠입했다. 많은 민중이 이에 호응하여 삽시간에 대세를 이루었다. 많은 유혈 끝에 결국 파자엘과 히르카누스는 체포되었고, 헤로데는 교묘히 로마로 탈출했다. 이로써 안티고누스(주전 40~37년 재위)는 하스몬왕가를 마지막으로 장식하는 왕으로 재기했다.17)Jos., Bell., 1, 13, 4~8.

그러나 로마로 도망간 헤로데는 로마에서 실력자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안(Oktabian)의 추천으로 로마의회에 의해 영토 없는 유다의 왕으로 임명되었다(주전 40년).18)Jos., Ant., 14, 15~5, 1; Bell., 1, 282~673. 이것은 예수시대와 직접 관계되는 큰 사건이다. 로마는 유다 민족성을 감안해서 괴뢰정권을 통해 통치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것이 바로 헤로데 가이다. 그러나 헤로데는 역으로 로마를 이용해서 엄청난 재량권을 가진 통치자가 되었다.

헤로데는 로마의 도움으로 37년 유다 땅에 잠입해서 3년간의 전투 끝에 하스몬 가의 마지막 영주 안티고누스를 이겨 그를 십자가형(刑)에 처하고 하스몬 가의 사제족인 사두가이파 45명을 처형하고, 망명 전에 약혼했던 하스몬 가의 마지막 공주 마리암네(Mariamne)와 강제로 정략결혼 함으로써 합법적인 팔레스틴의 주인이 되어 헤로데왕가 시대를 열었다. 헤로데가 이 자리를 차지하기까지 희생된 이스라엘민은 10만 명이 넘었을 것이라 한다.19)J. Klausner, a.a.O., S. 192.

헤로데 가의 정치적 방향은 헤로데 1세에 의해 구축되었다. 그런데 그의 정치적 업적은 다양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도 다양하다. 그의 정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자기 권좌를 확립하기 위하여 하스몬 가의 유족을 몰살하되 정략적으로 결혼한 아내 마리암네, 그녀와의 사이에서 난 자식들 그리고 장모까지 살해하였고, 저항세력은 비밀리에 투옥학살했으며, 예루살렘 성을 구축하고, 유다 민중의 증오를 감안하여 이방인 용병을 다수 채용하여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에 있는 평야에 외인부 대본부를 설치하였다.

2. 이른바 건설에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도시화작업, 예루살렘 성전의 개수 확대, 수로 건설, 극장 건설 외에 미개간지를 개간하여 땅 없는 사람들의 정착지를 마련하는 등이 그런 예다.

3. 유다인들이 성지로 알고 있는 족장들의 무덤을 크게 보수확대했고, 성전제물을 위한 짐승을 공급했으며, 유다 전통의 자율성의 폭을 최대한으로 살리고, 로마군대의 예루살렘 주둔을 피하게 했다. 또 유다 지방에서 통용하는 로마화폐에 카이사르의 상을 새기지 않도록 로마정부를 설득하여 실현시켰다.

4. 반면에, 사마리아에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를 위한 신전을 건축하는가 하면 새 도시를 건설하고 그 이름을 카이사르라 했으며, 아폴로 신전 건축을 위시하여 희랍식 건물을 많이 세우고 올림픽경기장을 확장했다. 또한 희랍 지식인들을 초청하여 철학, 문명, 역사 등을 가르치게 했다. 한마디로 그는 마카베오 봉기로 중단되었던 헬레니즘운동을 재개한 셈이다. 그는 지구(Orbis Terraum)의 중심이 로마라고 확신했으며, 그것을 정점으로 하는 평화의 세계(Pax Romana)가 올 것을 믿었고, 옥타비안 황제는 바로 그 일을 위해 보냄을 받은 자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유다인을 그 세계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믿었다.20)이에 대해서는 A. H. J. Gunneweg, Geschichte Israels bis Bar Kochba, Stuttgart, 1972, S. 169f./ 문희석 역, 『이스라엘 역사』, 한국신학연구소, 1975, 283면 이하를 참조.

유태인 학자인 쿨라우스너가 헤로데는 "여우같이 그의 왕좌를 훔치고 호랑이처럼 지배하다가 개처럼 죽었다"는 어떤 희랍역사가의 말을 인용하면서 하스몬 가에 의해 재건되었던 이스라엘을 헤로데 가가 철저히 망쳤다고 거듭 주장했는데, 그의 잔인한 폭정은 가히 광적이었으며,21)J. Klausner, a.a.O., S. 192ff. 특히 s. 202에는 헤로데 가문의 살육사가 서술되어 있다. 그는 마치 이스라엘을 망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자 같은 작태로 일관했다. 신약에서 그가 이스라엘의 어린이를 학살했다는 전설이 전해진 것은(마태 2, 16) 우연이 아니다.

주전 4년 그가 죽으면서 남긴 유서는 이스라엘을 셋으로 나누는 것이었다. 그는 여러 여인에게서 난 자식들 중 세 아들을 골랐는데, 그중 아르켈라오(Archelaus)에게 왕위계승과 더불어 유다와 이두메 지방을, 안티파스(Antipas)에게는 갈릴래아와 베레아를, 필리푸스(Philipus)에게는 북요르단 지방을 나누어주도록 했다. 당시의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안)는 이 광인의 유서를 그대로 집행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 이스라엘을 무력하게 만들어 통치를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단, 아르켈라오에게 왕 칭호는 주지 않았다.22)Bo Reicke, a.a.O., S. 84/ 한역본 127면. 그에게는 '분봉왕'(Ethnarch)이라는 칭호가 주어졌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인 아르켈라오는 10년간(주전 4~주후 6년 재위) 악정을 폈다. 헤로데의 사후 궐기한 이스라엘의 살육전에서 3천 명을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23)Jos., Ant., 17, 9, 5; Bell., 2, 2, 5. 마태 2, 22에서는 헤로데를 피해 에집트로 피신했던 예수의 부모가 아르켈라오를 두려워한 나머지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고 나자렛으로 갔다고 한다. 학정에 견디다 못한 이스라엘민은 8천 명이나 되는 대표단을 아우구스투스에게 보내 그를 제거해줄 것을 호소했는데, 로마가 이 일을 직접통치의 계기로 삼아 총독정치를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24)Bo Reicke, a.a.O., S. 99f./ 한역본 147면 이하.

예수의 시대를 알기 위해서는 안티파스(4~39년 재위)를 언급해야 한다. 그는 예수와 동시대인이며 또한 그의 활동무대인 갈릴래아 지방의 봉건영주이기 때문이다. 안티파스는 아르켈라오, 필리푸스와 더불어 로마에서 자랐다. 그것이 로마 식민정책의 단면이지만, 이로써 그들은 모두 로마의 앞잡이일 수 있다는 협의를 받은 셈이다. 안티파스는 헤로데가 죽었을 때 그 왕위를 노려 아르켈라오와 대결하여 로마의 상전에게 충성과 뇌물공세를 폈으나 패했다. 안티파스는 왕이 되려는 숙원을 성취하기 위해 아랍 왕 아레타스(Aretas)의 딸과 정략결혼을 했고, 로마에 살면서는 로마의 권력층과 교분이 두터운 그의 이복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기도 했다. 아랍 여인과 이혼한 것이 화근이 되어 아랍국과 충돌한 일도 있으며, 또 한번은 왕 칭호를 얻기 위해 계교를 꾸미다가 역으로 몰려 갈리엔(Gallien, 지금의 프랑스)으로 정배당해 거기서 최후를 맞았다. 그도 자기 아버지처럼 여우25)루가 13, 32.라 불릴 만큼 교활한 자였다. 그는 이스라엘민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었으며, 오로지 로마실권자의 관심을 사는 데 전력을 다했다.

갈릴래아는 이방인이 많고 유다교 주류에서 소외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전통을 위해 궐기하는 상징적 지방이 된 것은 큰 주목을 요한다. 간교한 안티파스는 바로 그것을 의식했으므로 취임과 더불어 로마의 시리아 주재 총독 바루스(Varus)에 의해 파괴된 세포리스(Sephoris) 시를 재건하였다. 그것은 갈릴래아 지방 유다인의 저항을 저지하는 요새로 삼기 위함이었다.26)J. Klausner, a.a.O., S. 220. 나아가 북요르단에 벳 하람타(Beth Haramta) 시를 건설하여 그 시에 처음에는 당시 황제인 아우구스투스 아내의 이름(Lirias)을, 뒤에는 그의 딸(Julias)의 이름 등을 붙였다.27)J. Klausner, a.a.O., S. 220. 그 뒤 티베리우스가 로마의 황제가 되자 티베리아 시로 바꾸었다. 세포리스 시는 복음서에 언급되는 도시로 원래 공동묘지 지역이어서 이방인과 거지떼 등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이들이 많이 거처하는 곳이었는데, 이 지역을 쓸어버리고 새 건물들을 세웠다. 이것은 유다 전통에 도전하는 행위였다. 그뿐 아니라 경기장과 궁성을 건설했는데, 유다 전통이 엄금하고 있는 짐승 조형을 만들었으며, 희랍의 도시행정제도를 도입했다. 이러한 반유다 전통적 행위와 더불어 이스라엘 민중에게 저지른 행태는 저항운동에서 언급할 것이나 여기서는 그가 세례자 요한을 처형한 장본인이라는 것만을 언급해둔다(마르 6, 14 이하).

헤로데 가의 마지막 사람은 아그리빠(Agrippas)이다. 그는 신약에 등장하여, 헤로데 가의 정치를 재확인하기 위해서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는 스데파노가 순교(주후 36년!)한 시대의 지배자이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를 처형했으며(62년), 베드로를 투옥한 장본인이다(사도 12, 1~19). 아그리빠는 헤로데 손자 중의 한 사람으로 로마를 거점으로 삼고 드나들던 자인데, 그의 조부 헤로데와 똑같이 로마에서 실력자 칼리굴라(Caligula)와 클라우디오(Claudius) 등과 친교를 맺고 있다가 필리푸스가 죽자 카이사르가 된 칼리굴라로부터 그 영역을 인수받았을 뿐 아니라(37년) 동시에 왕의 칭호도 받았고, 안티파스를 모함하여 쫓아내게 했으며, 그 지역도 그의 판도에 넣고(40년) 마침내 전 팔레스틴의 왕이 되어 44년까지 이스라엘을 우롱했다.

그는 조부처럼 두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기교면에서는 조부를 능가했다. 예루살렘의 유다 상류층에게는 진실한 신앙인이며 유다 전통의 수호자처럼 인정받을 수 있었다.28)요세푸스는 그가 진실한 유다인이었다고 격찬한다(Jos., Ant., 19, 7, 3; 사도 21, 23 이하 참조). 나아가 자신이 유다적임을 강조하기 위해 그리스도교. 박해에 나섰다.29)사도 12, 3. 그러나 그는 동시에 예루살렘 밖에서는 반유다적이며 철저한 헬레니스트의 길을 걸었다. 베리두스(Berythus)에 희랍식 극장과 경기장을 세우고 가이사리아와 사마리아에 그의 딸들의 동상을 세우는 등의 작태를 서슴지 않았다. 그의 칭호는 "아그리빠 대왕, 카이사르의 친구, 로마의 믿을 만한 친구"30)W. Förster, a.a.O., S. 71/ 한역본 139면.인데, 이것이 바로 헤로데 가의 체질을 집약한 것이다. 그는 그러한 헤로데 가의 본성을 마지막으로 과시하기 위해 나타났다가 사라진 사람처럼 보인다.

헤로데 가의 역사를 통해 드러난 로마정책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하면 철저히 반민중적이라는 사실이다. 어떤 경우에도 이스라엘 민중의 뜻을 고려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민의 뿌리가 없는 자들을 그 둘의 앞잡이로 골랐던 것이다. 그렇게 세워진 자들의 통치수단은 횡포밖에 다른 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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