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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정치

로마는 직접 통치하지 않고는 유다인이라 할 수 없는 로마의 충복 헤로데를 내세워 그 목적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었다. 이마 위에서 언급한 대로 헤로데가 죽자 그 대를 이은 아르켈라오의 실정에 저항하여 그의 통치를 거부한 것이 총독주재 정치의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총독정치를 개략적으로 집약함으로써 정치적 맥락만을 파악하도록하고, 그 구체적 사건은 저항사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우연히도 총독정치는 예수가 세상에 온 때와 같이 시작된다. 주전 4년, 즉 예수가 난 해31)예수의 탄생년도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논하겠음.에 헤로데가 죽자 도처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그중 갈릴래아 민중의 봉기는 극심했다. 로마는 그것을 진압하기 위해 당시의 시리아 주재 총독 바루스(주전 6~3년 재위)를 파견했다. 그는 헤로데의 재산을 차압하고 군대를 보내 이에 분노한 민중을 갈릴래아와 예루살렘에서 두 차례에 걸쳐 진압했다. 또한 그 부대는 성전의 보물을 약탈했는데 이는 400달란트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한다.32)Jos., Ant., 17, 16, 1~2; Bell., 2, 3, 1~2. 그리고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는데 그때 죽은 자가 2천을 헤아리며 십자가처형, 생매장 등 그 만행은 극에 이르렀다.33)Bo Reicke, a.a.O., S. 84/ 한역본126면. 갈릴래아 지방에 진격한 바루스는 저항자의 요새인 세포리스를 초토화하고, 이르는 곳마다 방화했으며 많은 사람을 체포, 처형 또는 로마로 압송했다. 그러한 폭력을 봉해 간신히 통치하는 동안 위에서 언급한 대로 아르켈라오를 거쳐 주후 6년부터 팔레스틴 주재 총독정치가 시작되었다.

총독의 권한은 막대했다. 사람들 중에는 로마의 식민정책이 관용적이었다고 하는 이가 있다. 그것은 그들의 이해와 상충하지 않는 한, 그 민족의 종교나 풍속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뜻이지만 정치경제적으로 보면 이런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34)K. Wengst, Pax Romana. Anspruch und Wirklichkeit, München, 1986, S. 14, 41ff. 로마의 앞잡이 헤로데와 예루살렘을 지배하던 아르켈라오가 자유자재로 대사제를 임명하고 파면한 것처럼35)헤로데가 임명, 파면한 대사제 명단에 대해서는 J. Klausner, a.a.O., S. 202를 참조. 총독도 그런 권한을 행사했을 뿐 아니라 군사권은 물론 사형권도 독점했으며, 경제권을 장악하여 화폐발행에도 철저히 관여했다.36)금화나 온화의 발행을 금지하고, 동화의 발행만을 허락한 것이 그상징적인 예이다(J. Klausner, a.a.O., S. 212). 한마디로 총독의 허락 없이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대사제는 헤로데왕가를 그대로 인정했으나 저들의 역할은 총독의 재량에 달렸으며 사실상 그의 수족이었다. 초대 팔레스틴 주재 총독은 코포누스(Coponus, 주후 6~9년 재위)이다. 팔레스틴 총독은 제도상으로 시리아 주재 로마총독 휘하에 있었다. 그가 곧 착수한 것은 시리아 주재 총독 퀴리노(Quirinius)의 지시에 따라 경제적 착취를 제도화하는 일이었다. 그것을 위해 호구조사에 착수했다. 이것은 경제만이 아니라 그 민족 전체를 얽어매어 통치하려는 기초작업이었다. 이스라엘은 이에 민감했다. 그들은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려다가 하느님에게 큰 재앙을 받았다는 전설을 알고 있는 민족이었다(삼하 24장). 그러므로 이에 저항하는 민중봉기는 불가피했으며, 그것이 저 유명한 겔롯당이 형성된 구체적인 원인이 되었다.

제4대 그라투스(Valerius Gratus, 15~26년 재위)는 빌라도와 더불어 가장 오래 통치한 총독이다. 그에 관한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단지 그는 어느 총독보다도 대사제를 많이 갈아치운 것으로 유명한데37)탈무드에는 대사제가 12개월마다 바뀐다고 한다(b. Joma, 8a). 그중에서 적어도 네 명의 이름이 확인된다. 그 마지막 대사제가 예수와도 관계되는 가야파(Kaiaphas)38)J. Klausner, a.a.O., S. 216, 각주 100. 그의 이름은 본래 Hakajaph였다고 한다.이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그 교체가 뇌물수수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는 것39)당시 티베리우스 황제는 자신이 보내는 총독들을 피를 빨아먹는 굶주린 돼지에 비유했다고 한다(W. Förster, a.a.O., S. 146).인데, 그것이 로마 식민정책의 부패상의 단면적 표출이다.

그 뒤로 예수를 처형한 빌라도(Pontius Pilatus)가 등장한다. 근 10년이란 긴 세월 동안(26~36년) 유다를 지배했으며, 가장 많이 알려진 총독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는 빌라도에 대한 아그리빠 1세의 평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잔인하고 고집스러우며 동정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가 다스리던 때의 유다에는 뇌물과 폭행, 쟁탈, 압박, 능욕, 재판 없는 처형, 제한 없는 잔인성이 지배했다."40)Philo, Gesamtschaft an Cajus, S. 38. J. Klausner, a.a.O., S. 216에서 재인용. 비록 그 서술의 책략적 고발성을 감안하더라도 그에 대한 평가의 신빙성은 다른 여러 자료에서 입증된다.

유다교에서는 어떤 상을 만들거나 조각하는 따위는 금기로 되어 있다. 빌라도는 부임할 때 일부러 황제의 상이 그려진 군기를 앞세운 군대를 예루살렘에 입성시켰다. 의도적인 도전이었다. 이에 분노한 이스라엘 민중은 총독관저가 있는 가이사리아에 몰려가서 다섯 주야를 통곡으로 탄원했는데 엿새째 되는 날 그는 민중에게 칼을 뽑아들고 해산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저들이 하나같이 옷을 찢으며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겠다고 맞서므로 결국 그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41)Jos., Ant., 18, 31; Bell., 2, 9, 2~3.

또 수리시설공사를 빙자하여 성전의 재산을 탈취한 데 대해 저항하는 군중을 학살하고,42)Jos., Bell., 2, 9, 4. 끝으로 메시아운동에 참여하여 사마리아의 그리짐 산에 운집한 민중을 무차별 학살했다.43)요세푸스는 그 민중이 무장했다고 한다(Jos., Ant., 18, 4, 1). 이에 분격한 사마리아 민중이 시리아 주재 총독을 통해 로마의 황제에게 집요하게 탄원 하므로 결국 소환되었는데, 그가 바로 예수를 처형한 장본인이다. 뒤에서도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같은 위인이 자신의 의사와는 아무런 상관 없이 단지 군중의 압력에 몰려 예수를 처형했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예수사건 이후 그리고 아그리빠 1세의 사후 파두스(Cuspius Fadus, 44~46년 재위)로부터 유다 전쟁을 촉발시킨 플로루스(Florus, 64~66년 재위)에 이르는 여러 총독이 신약에 직간접으로 반영된자들인데, 그들은 계속되는 민중봉기에 맞서서 무력으로 탄압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모르는 자들이었다. 빌라도 때까지 이스라엘 민족혼의 상징처럼 생각된 대사제복이 헤로데, 아르켈라오 그리고 총독들에 의해 보관되었다. 이것은 이스라엘민에게는 그들의 혼을 차압당한 것이나 다름없이 생각되었다.44)J. Jeremias, a.a.O., S. 168/ 한역본 198면. 빌라도가 추방되자 이 제복은 다시 이스라엘민의 손에 넘어갔는데 당시의 황제 클라우디오는 그의 통치권을 과시하기 위해 파두스에게 그것을 회수보관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반대하는 이스라엘민은 폭력보다 호소를 선택하여 클라우디오가 양보할 때까지 투쟁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이스라엘이 제 모습을 찾은 것은 아니다. 대사제의 임명권을 가진 로마는 민의에는 아랑곳없이 대사제를 임명했다.45)Bo Reicke, a.a.O., S. 107/ 한역본 158면. 이에 분노한 민중의 저항은 점차 메시아운동의 형태를 띠어갔다. 튜다스(Theudas)라는 무명의 인물이 여호수아시대에 그랬듯이 요르단 강을 가른다고 하면서 민중을 모아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로 진격하려고 했다. 파두스는 기병대를 동원해서 이를 쳐부수고 튜다스를 체포하여, 그 머리를 베어 예루살렘으로 가져왔다.46)요세푸스는 튜다스를 사기꾼으로 단정했다(Jos., Ant., 20, 5, 1). 그의 뒤를 이은 유다인 헬레니스트 알렉산더는 저 유명한 알렉산더 필로(Philo)의 조카였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로마의 앞잡이였다. 유다인으로서 유다인의 총독으로 부임한다는 것이 벌써 그 위인됨을 잘 말해준다. 그러므로 그의 업적으로 전해진 것은 유다 민족주의자들을 탄압한 것뿐이다. 그 대표적인 사건은 민중의 지도자이며 젤롯당운동의 선구자인 갈릴래아 유다의 두 아들 시몬과 야곱을 비롯한 많은 젤롯당을 십자가에 처형한 일이다.47)Jos., Ant., 20, 5, 2.

알렉산더의 뒤를 이은 쿠마누스(Cumanus) 때에는 그 자신의 부패함도 노출되었지만 로마사병들의 오만한 만행이 화근이 되었는데, 그것은 물론 로마제국 체질의 발로로 봐야 한다. 그가 취임했을 때는 바울로가 이방 선교에 혼신을 기울일 때이며, 이미 데살로니카에 보내는 편지가 공개되었을 때이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민족해방절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민은 온 세계에서 예루살렘으로 운집하여 하느님을 향한 축제를 드렸다. 그런데 로마의 군인들이 이를 모독하기 위해 민중 앞에 하체를 드러내고 그들을 희롱한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민에 대한 모독만이 아니라 저들의 신을 모독한 것이다. 이에 흥분한 민중이 일촉즉발하려는 순간에 출동한 쿠마누스는 그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하자 무차별 살육을 감행했다. 그때의 사상자가 3만을 헤아린다고 한다.48)Jos., Bell., 2, 12, 1. 이스라엘 민중은 이것을 잊을 수 없었다. 로마의 관원이 예루살렘 부근에서 피습당했다. 이는 위의 사건의 연속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쿠마누스는 군대를 동원해서 그 근방의 촌락을 모조리 불태우고 그 주변의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살육했다. 그에게는 점령군과 식민지인만이 있을 뿐 '인간'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로마의 군인이 모세의 율법 두루마리를 발견하자 그것을 사람들 앞에서 찢으며 조소했다. 민중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만일 쿠마누스가 재빨리 그 병정을 처형하지 않았던들 민중의 분노가 어떻게 번졌을 지는 아무도 상상 못했다.49)Jos., Ant., 20, 5, 3~4.

사마리아인과 유다인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사마리아인들이 축제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유다인들을 기습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들에게서 뇌물을 받은 쿠마누스가 정당한 판정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심한 참사를 빚게 되었다. 유다인과 사마리아인들이 모두 그에게 분노하여 마침내 그는 피신하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50)Jos., Ant., 20, 6, 1. 요세푸스는 젤롯당의 지도자 엘르아잘이 유다 편에 서서 싸웠다고 하는데, 그 부대는 여러 해 전부터 산에 거점을 두었던 "강도들"이었다고 한다.

그의 뒤를 이은 펠릭스(Felix, 52~60년 재위)는 그 다음의 페스도(Festus, 60~62년 재위)와 더불어 사도행전에 언급된 인물이다. 펠릭스는 바울로를 체포투옥했으며, 페스도는 그를 로마로 압송했다. 펠릭스는 로마의 노예 출신으로 자신의 과거를 분풀이하기 위한 사람처럼 잔인했고, 또 최대한 향락을 누렸다. 그의 세 번째 아내는 헤로데 아그리빠 1세의 딸로 유다인이었다(사도 25, 24~26). 그때 유다인의 저항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젤롯당은 몸에 칼을 지니고 다니며 자객행각을 하는 시카리(sikarii)로 변모해갔는데 그는 젤롯당의 지도자 엘르아잘(Eleazar)을 체포해 로마로 압송했으며, 많은 이스라엘민을 학살하고 십자가에 처형했다. 사도행전에 잠깐 언급되는, 에집트로 탈출한 한 유다인은 3만 명의 부하를 거느린 것으로 알려졌다.51)사도 21, 38.

이스라엘이 본격적으로 소요를 일으킨 것은 네로(Nero, 54~68년 재위)가 취임한 후부터이다. 네로의 광중은 극에 달해 스스로 아폴 로의 아들이라 자부하고 그렇게 자신을 경배하도록 강요했으며, 그것에 순복하지 않는 세력은 잔인하게 학살했다. 그 와중에 펠릭스의 지주였던 팔라스(Palas)를 해임함으로써 펠릭스가 무력해지고 로마는 파터와 싸우기 위해 식민지의 힘을 빌렸는데 헤로데 아그리빠에게도 지원을 요구해왔다. 이것이 로마의 일시적인 쇠되의 한 징조였는데 이와 더불어 이스라엘에서 저항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 때 총독은 사욕을 채우는 일과 자기방어를 위한 군사행동을 하는 데 바빴다. 한편 로마의 군율은 해이해지고 동시에 민중의 불만은 극에 다다랐다. 유다 전쟁을 일으키게 된 총독 플로루스의 행태를 보면 그 시대의 로마통치의 면모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요세푸스는 "플로루스는 민중에게 너무나 많은 만행을 즐겨 저질렀다. 그는 마치 범법자들의 처형수로 임명된 듯했으며, 모든 형태의 갈취와 잔인한 행위를 서슴없이 했다"52)Jos., Bell., 11, 14, 2.고 했는데, 구체적 경우를 몇 가지 보자.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모인 이스라엘 민중 300만은 의례적으로 예루살렘에 온 시리아 주재 로마총독에게 플로루스를 소환해줄 것을 탄원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역효과를 가져왔을 뿐이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풀로루스의 잔인성은 더욱더 노골화되었다. 가이사리아에 유다인의 회당이 있었는데 그 회당과 대지주 희랍인 사이에 분쟁이 있었다. 그 중재를 요청받은 플로루스는 뇌물을 요청해서 착복하고도 충돌을 바라기라도 하듯이 이유없이 다른 지방에 가 있었다. 이스라엘민의 대표가 그의 거처로 찾아가서 하소연하자 그는 그들을 투옥해버렸다. 이에 민중은 흥분했고 예루살렘은 소요했다. 그런데 타는 불에 기름을 끼얹듯, 바로 그때 플로루스는 황제의 요청이라면서 성전의 재산 17달란트를 갈취했다. 이에 이스라엘 민중은 폭거 대신 그를 모욕하는 전략을 썼다. 저들은 그의 면전에서 돈을 거두어 그에게 주었다. 불쌍한 거지라는 뜻에서! 이에 분격한 그는 기마병과 보병을 예루살렘으로 진격시켰다. 헤로데 궁전을 점령한 그는 사제를 위시한 지도층을 불러 그를 모욕한 자들을 색출해서 대령하라고 했다. 이에 불응하자 그의 군대는 무차별 학살을 감행하였고, 그 날만도 630명이 죽었다.53)Jos., Bell., 2, 14, 9. 분노한 민중의 폭발을 달래기 위해 대사제를 위시한 사제계층 등이 성전의 제기와 악기 등을 동원하여 제의를 집전함과 동시에 머리에 재를 쓰고 옷을 찢으면서 호소했다. 그러나 플로루스는 오히려 성전을 습격하고, 보물을 갈취하는 것으로 응수했을 따름이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유다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스라엘 민중은 사방에서 궐기했다. 특히 갈릴래아 지방이 격렬했다. 이에 출동한 시리아 주재 갈리스(Gallis) 군대가 민중들에게 격파당했다. 그만큼 맨주먹 민중의 분노는 극에 이른 것이다. 이에 네로는 로마에서 베스파시안(Vespasian)을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직접 군대를 진입시켰다. 그때가 66년 겨울이다. 그는 갈릴래아를 위시하여(67년) 베레아, 서요르단(68년) 등을 속속 토벌했다. 젤롯당은 예루살렘으로 몰려가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다. 바로 그때 네로가 죽음으로써 로마제국에 대이변이 일어났다. 도처에서 반로마세력이 들고일어났고 국내정세가 혼란했기 때문에 만 2년 이상 소강상태에 둘어갔다. 그러나 베스파시안이 카이사르가 되자(69년)그는 티투스(Titus)를 사령관으로 임명, 예루살렘을 글자 그대로 초토화시켰다. 그때가 70년인데 그후 마사다 요새 전투 그리고 끝으로 '별의 아들'(Bar Kochba)이란 별명을 가진 시몬이 이끄는 부대가 최후의 한 사람까지 장렬한 죽음으로 저항한 전투가 있었을 뿐, 이로써 사실상 전쟁은 끝나고 이스라엘 민족은 나라 없는 유랑민이 되었다.

이미 62년 주의 형제 야고보의 순교를 전후하여 그리스도인은 팔레스틴을 떠나야 했는데 이제 전쟁과 더불어 많은 이스라엘민이 고향을 떠나 이방으로 정처없이 방황하게 되었으며, 디아스포라 유다인들도 박해에 못 이겨 살던 땅을 버리고 배회함으로써 제 땅이 없는 유랑민족이 되었다. 나아가 로마제국은 정책적으로 저들을 모두 추방하고 이 땅을 이스라엘의 오랜 숙적의 이름 필리스트(불레셋)의 이름을 붙여 팔레스틴이라고 부르게 하고 예루살렘 시도 그 이름을 바꾸었으며, 성전 자리는 주피터 신전이 되게 한 것이다.

이 무렵 맨 첫번째 복음서인 마르코복음이 씌어진다. 마르코복음에는 유다 전쟁 특히 예루살렘의 운명이 반영되어 있는데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예수와 더불어 몰려다니는 그 민중(ὄχλος)이 바로 그 시대 이스라엘민 전체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점이다.54)안병무, 「마가복음에서 본 역사의 주체」, 앞의 책, 156면. 이것이 유다 전쟁이 있기 전에 씌어진 바울로의 편지들(50~60년)과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이상에서 예수시대사를 집약했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지배자의 측면에서 본 것이다. 그 현실을 입체적으로 부각시키려면 피지배자인 이스라엘 민중의 시각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 사건을 진술할 때 반영하려고 한다. 또 하나의 특징은 예수시대를 반영하기 위한 정치적 상황인데 이스라엘이 로마제국에 의해서 파멸될 때까지의 정황을 일별했다. 까닭은 그렇게 함으로써 로마제국의 통치상황을 부각시키려는 목적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예수사건을 전승하여 마침내 문서화하기에 이른 예수의 민중의 삶의 현장을 반영하기 위해서였다.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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