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집

전집은 OCR 스캔 잡업으로 진행되어 오탈자가 있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등록해 주시면 관리자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수정 요청을 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2. 본문을 읽는 중에 오탈자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앞뒤 텍스트와 함께 마우스로 선택합니다.
3. 그 상태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타나는 창에서 수정 후 [수정요청]을 클릭합니다.
4. 각주의 경우에는 각주 번호를 마우스오버하여 나타난 창을 클릭하면 수정요청 창이 열립니다.

※ 컴퓨터 브라우저에서만 가능합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에 대한 예수의 입장은 어떠했을까? 먼저 복음서들에 언급된 데서 각기의 입장부터 밝혀보기로 하자.

마르코복음서에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의 선구자로서 나타난다. 마르코는 맨 첫머리에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한 다음 곧바로 이사야를 인용해서 그를 "주의 길을 예비하고 주의 다니실 길을 곧게 하는 자"로 성격화한다. 그리고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 의해서 세례를 받는 장면을 서술한다(마르 1, 1~2).

마태오는 이 점을 더욱 강조한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의 선구자일뿐 아니라(마태 3, 13~15), 예수의 설교와 세례자 요한의 설교 내용을 동일시한다(3, 2). 마태오는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공격을 받고 있다"(11, 12)고 말함으로써 세례자 요한을 이미 새 시대의 인물로 간주한다.

이에 대해 루가는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 받은 것을 부차적인 서술법으로 그 의미를 후퇴시키고, "율법과 예언자의 시대는 요한까지다"(16, 16)라고 하여 세례자 요한을 전 세대의 인물로 못박아버린다.

어록자료에도 "여인이 낳은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미미한 자라도 그보다 크다"(마태 11, 11; 루가 7, 28)고 한 것을 보면, 처음 교회의 입장은 세례자 요한을 '전 세대'곧 낡은 세대의 마지막 사람으로 간주한 것 같다.

그런데 요한복음서는 여느 복음서보다 세례자 요한을 많이 취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더 격하시킨다. 그는 이미 예수의 선구자가 아니라 증인의 한 사람에 불과하다. 그는 자기 제자들에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로다"(요한 1, 36)하고 증거할 따름이다. 요한복음은 "그(예수)는 흥하여야 하고 나(세례자 요한)는 쇠하여야 한다"(3, 30)고 말한다. 이것은 요한에만 있는 유명한 말로서, 세례자 요한은 구원사적 의미에서 보아 이미 그 역할이 끝났다는 선언이다.

세례자 요한에 대한 복음서들의 입장이 이와 같은 데 대해서 예수 자신의 입장은 어떠했는가?

먼저,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는 세례자 요한의 운동에 공명한 면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다. 많은 학자들은 예수가 한동안 세례자 요한과 함께 지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18)J. Becker, Johannes der Täufer und Jesus von Nazareth, 1972, S. 68. 여기서 "예수가 세례자 요한의 운동에 공명했을 것"이라는 표현은 의도적이다. '운동'은 '사상'과 유리될 수는 없지만, 사상에 공명한다는 것은 사상의 세부적 내용까지 공명한다는 뜻이다. 예수가 세례자 요한의 운동에 동의했다면, 세례자 요한을 예수의 선구자로 본 마르코의 입장은 틀린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예수 역시 세례자 요한을 자신의 선구자로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마르코에서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가 갈릴래아로 가서"(1, 40)19)마태오(4, 12)도 동일한 내용이다. 단 루가에는 이 구절이 삭제되어 있다.라는 이 구절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예수는 그의 선구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공생애의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이미 앞서 밝힌 대로 세례자 요한은 정치적 동기에서 집권자 안티파스에게 체포되었다. 그렇다면 예수의 공생애는 정치적 상황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예수의 공생애로의 결단은 정치적인 현장에 그 동기가 있다. 그의 선구자가 이스라엘 전체의 '회개'운동을 전개하고, 특히 집권층의 죄악상을 폭로하고 거기에 도전 하다가 체포된 뒤에, 그가 그 현장에 나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그는 어떤 각오를 하고 나섰을까?

우리가 다시 주목할 것은 세례자 요한이 갈릴래아의 집권자 안티파스에게 체포되고 처형되었다는 점이다. 그가 요르단강 강변에서 세례를 주었다고 하는데, 그곳은 대체로 유다지방이라고 부르는 것이 학자들의 중론이다.20)E. Haenchen, Der Weg Jesu, S. 24 참조. 그렇다면 그는 어째서 갈릴래아 지방의 봉건영주였던 안티파스에게 체포되었을까? 그것은 그가 안티파스의 통치권에서 활동했다는 증거다. 그렇지 않았다면 안티파스가 직접 그를 체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은 처음부터 갈릴래아의 요르단강 지역에서 활동했거나 아니면 유다 지방에서 활동하다가 후에 그 무대를 갈릴래아 지방으로 옮겼을 수도 있다. 요세푸스는 요한에 대해 언급하면서,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 운동가로 체포되어, 아랍국과의 경계에 있는가장 큰 요새인 사해 동쪽 마카루스(Macharus) 성에 갇혔다고 말한다.21)Jos., Ant., 18, 5, 3. 마카루스 성은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유다 접경 베레아지역에 있다. 그렇다면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알 수가 없다. 안티파스가 처형까지 시킨 것이 사실이라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안티파스가 자기 처소인 티베리아 연회장에서 세례자 요한의 목을 가져오라고 명령해서 당장에 시행되었다면, 그 시간에 마카루스 성에까지 갔다 온다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의심은 마르코전승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때 있을 수 있는 것22)마르코의 서술은 전승된 자료를 그대로 옮겼을 뿐이다(R. Bultmann, Die Geschichte der synoptischen TI-adition, 1957, S. 328f.). J. Klausner도 보도의 사실성(史實性)을 의심한다(a.a.O., S. 331).이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세례자 요한이 갈릴래아 지방의 집권자 안티파스에게 체포되고 처형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그가 갈릴래아 지방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의 활동무대는 예수의 활동무대나 젤롯당의 활동무대와 정치적 여건에 있어서 동일한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그 이상 자세히 알 수 있는 자료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예수의 공생애의 출발을 세례자 요한이 체포된 때로 잡은 것은 많은 암시를 준다.

마르코 기자가 세례자 요한이 잡혔다고 했을 때 사용했던 이 동사 παραδίδωμι(deliver, betray, 넘기다의 뜻)를 예수의 수난예고를 말할 때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안티파스가 세례자 요한이 "두려워서" 그를 체포했다는데, 세례자 요한이 죽은 후에 활동한 예수도 "두려워했다"는 기사도 그 유사성을 암시한다.

마르코는 6장 14절 이하에서 헤로데 안티파스가 예수에 대해 여러 가지 소문―"죽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 또는 "엘리야다" 또는 "한 예언자다"―을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살아난 것이다"라고 단정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이어 세례자 요한의 처형기사를 싣고 있는데, 이것은 마르코적인 독특한 서술법으로서 세례자 요한의 운명과 예수의 운명이 동일하다는 것을 시사한 것으로 특기할 만하다.

그렇다면 정치범으로 체포처형된 세례자 요한의 바톤을 이어받은 듯이 출발한 예수는 어떤 길을 걸었을까? 예수의 운명은 세례자 요한의 그것처럼 너무나 자명한 것으로 전제되어 있다.

예수는 세례자 요한이 안티파스에게 정치범으로 체포되어 처형된 것처럼 똑같이 정치범으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다만 세례자 요한은 갈릴래아에서 당했지만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당했다는 차이뿐이다. 이 점에서 세례자 요한과 예수는 같은 운명의 길을 선택한 셈이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가 "갈릴래아로 갔다"(마르 1, 14)는 이 말 한마디가 이미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공동의 연대적 운명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생애와 세례자 요한의 생애를 비교할 때, 거기에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제시되어 있다. 이 점에 대해서 두 가지 자료가 주어져 있다.

첫째, 마태오복음 11장 18~1(루가 7, 33~34/ Q)이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니 사람들이 그를 귀신이 들렸다고 말하고, 인자는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 '보라, 저 사람은 먹기를 탐하고 술을 즐기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 하고 말한다." 이 구체적인 전승에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행태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본다.

말씀자료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데, 그가 강조했던 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한다는 사실보다 "진노의 심판이 임박했다"는 사실 자체에 있었다.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마태 3, 10/Q). "도끼로 찍어 버린다", "불로 살라 버린다"는 말은 진노의 심판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장차 올 이 '메시아'는 "쭉정이를 불에 태울 것이다"(마태 3, 12)라고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종말관을 뚜렷이 볼 수 있다. 그의 삶의 행태도 이것을 반영한다. 그가 고행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 그것을 잘 나타낸다. 그는 진노의 신을 알고 경험했다. 그는 이제 올 심판을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기다리면서 설교했다. 그는 우울한 예언자이기도 했고, 진노의 예언자, 불의에 항거한 예언자이기도 했다. 그는 세상이 불의로 망하리라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그가 죄를 회개하라고 외칠 때도 윤리적인 죄들을 전제했다.

예수는 이와 다르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회개하라"고 하지만, 그것은 구원의 기쁜 소식이라는 데 강조점이 있으며, 진노와 심판에 강조점을 두지 않는다. 그 때문에 예수의 삶과 모습과 행태도 다르다. 그는 결코 청중을 정죄하지 않았으며, 역사의 종말을 어두운 면에서 보며 살지 않았다. 그는 구원의 때를 축하하는 삶을 살았다. "세리도 죄인도 해방되었다. 우리는 이 해방의 때, 구원의 때를 축하하자"는 식의 삶이었다. 구원의 때, 해방의 때를 축하하는 이 점이 세례자 요한과 근본적으로 다른 면이다. 이 기쁜 구원의 때에 왜 고행하고 슬퍼해야 하는가? 어떤 사람들이 예수에게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는데 당신의 제자는 왜 금식하지 않습니까?"(마르 2, 18)하고 묻자, 예수는 "산랑의 친구들이 신랑과 같이 있는 동안에도 금식할 수 있느냐?"(마르 2, 19)고 반문한다. 이럴 수 있었던 것은 예수가 진노의 심판의 신이 아니고 새로운 가능성으로서 열린 현실인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새 것이 온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지 낡은 부대에 넣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점이 세례자 요한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둘째, 세례자 요한이 옥중에서 그의 제자들을 예수에게 보내 질문하는 기사가 있다(루가 7, 20).23)이것을 역사적 사실로 보는 학자는 없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또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오실 그이"라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 민중의 공통적인 대망의 대상이요, 민중의 '은어'다. 특히 안티오쿠스 4세의 폭정 이래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를 향해 여러 가지 형태로 지배자들의 억압과 착취에 대항했던 하시딤, 에쎄네 그리고 세례자 요한, 젤롯당이 기다리 던 "오실 그이!" 이것은 그들의 희망이 집약된 대상이요, 구체적 내용이었다. 어떤 권력층에 붙어 먹거나 축적한 재산보존에 혈안이 된 계층을 제외하고는 민중에게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묵시적 대상이었다.

복음서에서 세례자 요한이 사람을 예수에게 보내 이 말하나로 그 소원을 전달하는 것으로 곧 통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은 둘이 같은 범주에 속했다는 확신을 시사한다. "오실 그이"는 물론 메시아를 뜻한다. 이 물음에 대해 예수는 "옳다", "아니다" 대신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라. 맹인이 보고 절뚝발이가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루가 7, 22/ Q)고 말한다. 이것은 바로 예수가 실제로 했던 일, 곧 그의 행태를 집약한 말이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의미는 다른 제목의 마당(일곱째 마당 '사탄과의 투쟁')에서 말하겠지만, 여기에서는 세례자 요한과 관련시켜 한 두 가지 의미만을 밝혀두겠다. 세례자 요한이 "오실 그이"가 당신이냐고 했을 때 위에서 언급한 말씀자료(Q)에 의해서 파악한다면, 그것은 심판하러 오는 주님, 도끼를 들고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를 찍어버릴 분, 쭉정이를 불에 태워버릴 분으로 이해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오실 그이 "는 심판의 주로 생각됐을 것이다. 만일 예수가 이에 대해서 "예"라고 대답했다면 그는 심판의 주밖에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하는 일은 저주도 심판도 아니며, 악마에게 사로잡혀 고뇌하는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는 일이다. 어두움이 아니라 밝음, 죽음이 아니라 삶의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가 하고 있는 일은 세례자 요한이 기대한 것과는 다름을 사실로 보여준 셈이다.

다음으로,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준 것은 마치 이제 임할 진노의 심판 통과를 허락하는 증명서와도 같았다. 이것은 그가 사제계열의 사람임을 상기시킨다. 그런데 예수는 세례를 준 일이 없다. 요한복음서에 그가 세례를 주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나 실제로는 그 자신은 주지 않았다.24)요한복음에는 예수가 세례자 요한과 같은 때에 유대 지방에 머물면서 세례를 주었다고 한다(3, 23). 4장 1절에도 예수가 세례를 많은 사람에게 준다는 소문을 전한다. 그러나 공관서에는 전혀 그런 언급이 없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는 "사실은 예수께서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 준 것이었다"를 첨가 삽입하고 있다. 요한 본문 분석은, M. Goguel, Das Leben Jesu, 1934, S. 166f. 참조. 예수가 세례를 받았다는 것, 그러나 그 자신이 세례자 요한이 잡히자 공생애를 출발했음에도 세례를 주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러한 행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처음에 나는 '사상'에 동의한다는 것과 '운동'에 동의하는 것을 구별해 보려고 했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예수는 도래하는 하느님 나라 앞에서의 회개운동에 동의하는 뜻에서 세례를 받았으나 요한의 세례의 제의적 의의에는 동의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25)H. Braun(Spät Judentum, II, S. 66)은 예수는 세례에 제의적 의미를 두고 동의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러한 소극적인 의미보다 좀더 적극적인 뜻이 있을 것이다. 예수전승은 그가 세례를 받고 광야로 나가서 40일간 시험을 받았다고 한다. 40일은 물론 상징적인 숫자이다. 이스라엘 청중은 광야와 40의 수를 연결지으면 출애굽의 광야 40년 방황의 이야기, 모세가 밤낮 40일 단식한 이야기 또는 엘리야가 밤낮 40일을 광야에서 헤맨 이야기를 연상했을 것이다. 그 어느 이야기든지 광야의 40일(년)은 새로운 출발을 향한 과거의 종지부인 동시에 교량의 뜻이 있다. 광야 40년의 이스라엘민의 방황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전 단계요, 모세의 40일은 야훼의 계명을 받는 전 단계, 엘리야의 40주야의 광야는 호렙 산에서의 새로운 계시를 받게 한 절망의 종지부이다. 그러므로 그 이상의 의미를 찾으려는 것은 무모한 사변일 뿐이다.26)시험설화 해석은 J. Gnilka, Das Evangelium nach Markus(EKK), 1978, S. 56f. 참조/ 한역본 66면 이하 참조.

마르코는 이러한 맥락에서 한 시대를 종결짓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길이라는 듯이 예수의 40일간의 시험을 극히 간단히 서술함으로써 갈릴래아로 향하는 전단문(前段文)으로 삼고 있다. 이로써 세례자 요한의 광야생활도 그리고 동시에 회개의 세례의 때도 끝났다. 그가 세례자 요한에게서 떠난 것은 광야에서 떠나는 일과 동시적인 것이며, 그것은 또한 낡은 때의 종지부이기도 하다. "율법과 예언자의 시대는 요한까지다"(루가 16, 16)라는 루가전승은 바로 이와 같은 판단을 분명히 한 것이고, 그것이 예수의 경우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는 그가 세례자 요한파를 포함한 유다교의 금식문제에 대해서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는 때라고 하고, "새 술을 새 부대에"(루가 5, 36~38)라고 한 데 대해 뚜렷한 입장이 설명되지 않으며, 예수의 하느님 나라 도래에 대한 이해의 근본적 차이가 설명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왜 예수가 세례자 요한이 체포되었고 그를 체포한 안티파스가 지배하는 갈릴래아로 갔는가? 그것은 세례자 요한의 체포, 죽음을 낡은 시대의 종말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이제 새 시대의 문턱을 넘어서야 한다는 각오에서였을 것이다. 그 새 시대란 하느님 나라 자체다.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
텍스트를 수정한 후 아래 [수정요청] 버튼을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