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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래아로!

"갈릴래아로!"라는 이 한마디가 예수의 소명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이제 우리는 예수와 갈릴래아의 관계를 알아보아야 하겠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에"(마르 1, 14a)라는 단서다. 이것은 마르코의 편집구35)이 어구의 고찰에 대해서는 앞의 논문, 158면 이하를 참조.인데, 위에서 싯다르타와 공자와 비교해보던 시도를 종결짓는 중요한 분수령이다. 예수는 수도(修道)의 어느 단계에 도달했거나 또는 정치적 계획을 확립하여 자신의 공생애의 첫발을 들여놓은 것이 아니라, 정치적 사건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즉 그의 동지인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 안티파스에 의해 체포된 바로 이 사건을 계기로 삼은 것은 갈릴래아에서의 자신의 소명의 성격을 규정한다.36)앞의 논문, 161면 이하를 참조.

그런데 갈릴래아는 바로 세례자 요한을 체포한 장본인의 통치지역이라는 사실이 예수의 결의를 더욱 뚜렷이한다. 그러면 이 갈릴래아에서의 그의 행태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 지역의 역사적 그리고 지정학적 상황을 보아야 할 것이다. 갈릴래아 지방의 역사는 바로 예수 당시의 그 지역 여건을 형성한 원인이며, 갈릴래아인들의 한과 희망의 뿌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지역의 기구한 역사를 잠깐이라도 훑어보고 그 당시의 사정을 이스라엘 전체 민중사와 중복되지 않는 범위에서 일별해보기로 한다.

창세기 49장 13~15절에는 즈불룬(스불론), 시돈 그리고 이싸갈 등의 지명이 나오는데 그것은 갈릴래아에 속한 지방들로서 바다에 연해 있으며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으로 표현되어 있다.37)마태 4, 12~16; H. Kreissig, Die Sozialen Zusammenhänge des jüdäischen Krieges, Berlin. 1970, S. 19. 또한 요세푸스는 갈릴래아 지방 전체가 비옥한 푸른 정원 같다고 격찬했는데38)Jos., Bell., 3, 42. 그것은 그 밖의 증언들과 상통한다. 히브리가 가나안에 정착할 때의 이야기 중에 갈릴래아 지역이 언급되는데(판관 1, 27 이하) 원주민이 강해서 정복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고, 처음에는 주로 산간지대에 정착했다가 점차 원주민이 합비루들과 연합하여 합비루의 신 야훼신앙으로 부족동맹(Amphiktyonie)을 결성했다.39)M. Noth, The History of Israel, New York and Evanston, 1960, Ch. II, p. 7과 A. H. J. Gunneweg, a.a.O., S. 53f/ 한역본 66면과 이에 대한 반증인 N. K. Gottwald, The Tribes of Yahweh, a.a.O., p. 345ff. 참조. 그러면서 가나안의 평지에 사는 성인(城人)들과 대치 또는 섞여 살게 되었다. 사무엘서에는 갈릴래아 지방을 "이스라엘의 어머니"(삼하 20, 19)라고 일컫는 말이 있다. 이것은 그 지역이 비옥한 곡창임을 뜻한다.

역사적으로 이 지역은 주전 733년에 아시리아에 점령당함으로써 므기또(Megiddo) 지방에 편입되어 본토 이스라엘과 분리되고, 그후 다른 민족의 통치와 문물에 적응하거나 아니면 싸워야 하는 한스러운 역사를 거듭하였다. 이미 사울왕 시대에 불레셋족의 진격으로 이 지방은 중부의 에브라임, 므나쎄, 베냐민 지파들과 단절되었다가 아시리아제국에 의해 다시 이스라엘 본토에 연결된 통치구역이 되었다(주전 733년). 이 지역에 여러 민족이 섞여 살므로40)A. H. J. Gunneweg, a.a.O., S.104/ 한역본 173면; M. Noth, a.a.O., p.261. 이때부터 벌써 "이방인의 갈릴래아"라는 낙인이 찍히고,41)마태 4, 15~16에는 "이방 사람들의 갈릴래아"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이사 9, 1에서 따온 것이다. 프톨레매오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주전 302년경) 팔레스틴을 여러 갈래로 찢어서 통치할 때 또다시 지역적으로 고립되어 본토에서 분단된 고아처럼 되었다가,42)프톨레매오는 페르샤처럼 팔레스틴을 여러 개의 소행정단위로 분할해서 통치하였다(A. H. J. Gunneweg, a.a.O., S. 143/ 한역본 238면). 하스몬왕가의 아리스토불 1세가 그의 판도를 갈릴래아까지 확대함으로써 다시 이어졌다.43)Bo Reicke, a.a.O., S. 52 / 한역본 81면 이하. 아리스토불 1세 이전에 갈릴래아에 영향력을 행사한 대사제는 하나도 없었다(Jos., Ant., 13, 322). 그때 이두메도 함께 점령하고 그 안에 사는 이방인들에게 강제로 할례를 실시하여 유다인화하고 또 유다인도 많이 이주시킴으로써 유다인들에게는 갈릴래아인들을 '잡종'으로 천시하는 결정적 계기를 가져왔다.44)이상의 내용에 대해서는, A. H. J. Gunneweg, a.a.O., S. 158 / 한역본 263면 이하; Bo Reicke, a.a.O., S. 52/ 한역본 82면; J. Klausner, a.a.O., S. 210을 참조. 이러한 통합은 이두메 출신의 헤로데가 스스로 유다인임을 주장하는 길을 터놓은 것이다. 그런대 헤로데가 죽을 때 또다시 이 땅을 찢어 셋으로 분할해서 그의 자식들에게 '분배'할 때 갈릴래아는 유다 지방과 갈라지고 베레아 지방과 합해져서 안티파스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45)Bo Reicke, a.a.O., S. 85f./한역본 129면.

이런 과정을 보면 팔린 창기(娼妓)와도 같은 역사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지역의 주민들은 갈릴래아의 그 주민을 그토록 무시했다. 예루살렘의 유다인들은 갈릴래아인들이 이스라엘의 율법을 잘 지키지 않는다고 단정한 것이다. "갈릴래아야 너는 토라를 멸시한다"46)라삐 자카이의 아들 요하난의 저주(J. Scharb, 15d, 50).는 것이 라삐들의 갈릴래아에 대한 판정이며, 갈릴래아는 토라의 지역이 되어본 일이 없다는 것이 클라우스너의 판단이다.47)J. Klausner, a.a.O., S. 229. 분명히 갈릴래아의 풍토는 유다 지방의 그것과 달랐다. 그것은 원래 북이스라엘의 근원지로서 일찍부터 이방인들과 섞여 살면서 자기 정체를 살려가야 했다. 그러나 이로써 이 지역이 비이스라엘적이 되어버렸다고 판단하면 큰 오산이다.

놀라운 것은 갈릴래아의 농촌과 그 주민들이 너무나도 이스라엘적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외래문화에 물들지 않았다. 그 농촌은 헬레니즘에 포위된 섬 같았다. 해안지대에는 모두 헬레니즘 도시가 서고, 안티오쿠스 이래 특히 헤로데시대에 세워진 도시들은 헬레니즘화되었다.48)W. Förster, a.a.O., S. 98/ 한역본 195면. 그러나 농촌은 전혀 그것에 물들지 않았다.49)W. Förster, a.a.O., S. 99/ 한역본 196면. 동시에 저들이 갈망하는 것은 하느님의 주권만이 확립된 세상이었다. 그것은 젤롯당의 본거지가 갈릴래아였으며, 바로 저들이 그것을 위해 완전히 산화될 때까지 싸운 것을 회상하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유다 지방에서 호구조사를 실시했는데 해당지구가 아니었던 갈릴래아의 민중이 봉기에 앞장섰던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토라를 멸시하는 자들로 낙인 찍힌 것은 예루살렘파의 시각에서 볼 때 이유있는 것이다.

갈릴래아는 암 하 아레츠의 중심지라고 한다.50)H. Kreissig, a.a.O., S. 85. 바리사이파는 자신들이 세운 체제에 따르지 않는 자는 암 하 아레츠라고 하여 공동식탁도 거부했다. 그중에 특히 정결법에 저촉되는 자, 십일조를 내지 않는 자를 암 하 아레츠라고 했다.51)J. Jeremias, Jerusalem zur Zeit Jesu, S. 302f./ 한역본 340면. 그런데 예루살렘파들은 저들이 가난하기 때문이라는 측면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갈릴래아 자체는 비옥한 지역인데, 왜 그곳에 암 하 아레츠가 그렇게 모였는가? 어떤 사람은 유다 지방보다 교리(종교)상의 자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며, 다른 이는 사회계층상의 자유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 두 주장은 유리되지 않는다. 사회계층성은 경제적 조건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갈릴래아는 비옥한 땅이기 때문에 농업이 생업의 중심이다. 따라서 이 지역의 농산물은 유다 지방 특히 예루살렘의 생명선과도 같았다.52)H. Kreissig, a.a.O., S. 19. 유다 지방은 박토이며 기후관계로 식량자급이 불가능했다.53)H. Kreissig, a.a.O., S. 20f.; L. Goppelt, Christentum und Judentum in ersten und zweiten Jahrhundert, 1954, S. 58. 그런데 왜 갈릴래아에 암 하 아레츠가 그렇게 많았는가? 농사는 대부분 암 하 아레츠에 의해 경작되었다.54)H. Kreissig, a.a.O., S. 25f. 그럼에도 갈릴래아 지방에서는 절대빈곤의 소농과 땅 없는 소작인이 압도적이었다.55)S. Baron, a.a.O., Bd. I, p. 278; M. Hengel, Die Zeloten, S. 329f. 그것만이 아니다. 원칙적으로 노예가 있을 수 없는 이 사회에서 가난이 심화됨에 따라 자진해서 홀로 또는 모든 식구가 농노가 되는 일이 속출했으며, 그것마저 가능하지 않은 실업자들이 수없이 많았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상황이 젤롯당운동의 현장이었다.

갈릴래아의 소작인들은 부재지주에 의해 착취당했다.56)H. Kreissig, a.a.O., S. 19. 그 부재지주는 도시에 있었을 뿐 아니라 시민의 절대다수가 농민의 착취자였다. 예루살렘의 시민이라고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대지주는 왕족이나 대사제의 집안 등 종교귀족이었음을 밝혔는데, 저들이 갈릴래아의 지주가 아닐 까닭이 없다.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사실은 바로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진입한 젤롯당들이 먼저 대사제 아나니아의 집, 헤로데 궁전 등을 소각함과 동시에 채무장부 등이 비치된 서고를 불질렀는데 요세푸스는 "가능한 대로 빨리 채무장부를 없애버림으로써 채무의 징수를 불가능하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또한 그 이유를 "그럼으로써 빚진 자들을 그들 편에 서게 하고 무산자들을 재산가들에 대항하도록 선동하기 위해서"57)Jos., Bell., 2, 478.라고 하는데 그런 이유도 있을 수 있으나, 역시 갈릴래아의 민중에 대한 채권장부를 없애는 것이 주목적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런 추측은 예루살렘에는 갈릴래아의 부재지주들이 많이 있었으리라는 전제에서 가능한 것이다.

하여간 갈릴래아는 '쌍놈들'의 소굴이었다. 이들은 거덜난 농부 출신을 위시해서, 젤롯당이 형성되기 전부터 거기로 몰릴 뿐 아니라 입산하여 도적떼를 형성하였다. 요세푸스는 젤롯당을 포함해서 갈릴래아의 봉기민중을 도적떼(λησταί)라고 했는데58)요세푸스가 저들을 λησταί로 규정한 문헌목록들은 M. Hengel, Die Zeloten, S. 42ff.에 수록되어 있다. 그것이 당시에 일반적인 호칭이었던 모양이어서 복음서에도 그렇게 부르고 있고,59)마르 15, 27. 그럴 만한 이유도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들이 단순한 도적이 아니라는 것은 예수를 처형할 때 등장하는 바라빠의 경우에서도 본다. 그도 도적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예루살렘 민중이 그를 석방할 것을 요구할 만큼 유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갈릴래아라고 하면 '반란 ', 갈릴래아 사람 하면 '반란자'와 동의어처럼 사용된 것은 반드시 젤롯당의 지도자 중 갈릴래아 출신이 여럿 있었기 때문만이라고 할 수 없고, 갈릴래아인들의 원한의 적이 예루살렘에 거점을 둔 기득권자들이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갈릴래아가 예루살렘 지배층의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60)H. Kreissig, a.a.O., S. 124f. 단순히 저들이 지배자들을 합법화하고 있는 유다 전통을 파괴하되 난폭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해관계상 상반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갈릴래아지역에서는 봉기가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갈릴래아 사람이라면 모두 젤롯당으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서 갈릴래아 사람 하면 무조건 '불순분자'로 몰렸던 것이다. 예수와 그 무리가 갈릴래아 사람들로 통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당신도 저 갈릴래아 사람 예수와 함께 다녔지요?"(마태 26, 19)라고 묻는 말, "당산이 갈릴래아 사람이니 틀림없이 예수와 한패일 거요"(마르 14, 70)하는 말 등이 모두 그런 흔적들이다. 갈릴래아의 정치경제사는 예수의 행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갈릴래아 사람들은 수없이 박해를 받아왔다.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의 피를 흘려 그 피를 그들의 희생제물에 섞었다"(루가 13, 1)는 이야기의 진상을 밝힐 수는 없지만,61)P. van Passen, Why Jesus died?, 1949, pp. 107~ 115. 반 파센은 그 희생자들이 예수민중과 로마군 사이의 결전에서 희생된 갈릴래아 사람들이라고 본다. 쿨만은 그들이 갈릴래아의 젤롯당이라고 본다(O. Cullmann, The State in the New Testament, 1957, p. 14). 그 이의의 다른 해석에 대해서는, I. H. Marshall, The Gospel of Luke(『루가복음 II』 [국제성서주석 31. 2], 235면) 참조. 갈릴래아 사람들이 어느 누구보다도 박해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는 민중의 유언비어가 그 진원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듣고 예수는 바로 이 갈릴래아로 갔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한마디가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앞의 마당에서 언급한 바 있다.

우리는 '갈릴래아'를 떼어놓고 예수를 생각할 수 없다. 복음서는 이 점을 어떻게 연관시키고 있는가? 마르코서는 처음부터 이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마르코는 예수를 처음부터 갈릴래아 사람이라고 못박았는데도 불구하고, 예수가 "갈릴래아로 가다"(마르 1, 14)라고 하여 갈릴래아를 뚜렷이 부각시키고 있는가 하면, 예수는 일생을 거의 갈릴래아를 무대로 활동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가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다가"(마르 1, 16) 또는 "갈릴래아에 오시어"(마르 1, 91, 14)라고 편집구를 연속하여 첨가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예수가 갈릴래아와 깊은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또한 마르코서가 예수의 말을 '갈릴래아'라는 장소와 연결시켜 소개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같은 말도 어디에서 했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상황을 떠난 언어는 추상화를 면치 못한다. 예수의 죽음의 유일한 증인이었던 여인들을 일컬어 "그들은 예수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 따르며 시중 들던 여인들"(마르 15, 41) 곧 "갈릴래아의 여인들"이라며 그들의 고향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제자들이 배신할 것을 예고한 다음 "내가 다시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겠다"(마르 14, 28)고 했는데, 빈 무덤을 보고 당황한 여인들에게 한 청년이 나타나, "그대들은 지금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가서 전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는 그들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것이니 거기서 그를 뵐 것이라고 전하라"(마르 16, 7)고 한다. 다시 만날 곳을 예루살렘이 아니라 바로 갈릴래아라고 한 사실은 예수의 소명이 무엇인가를 잘 반영하고 있다.

마태오도 대체로 마르코의 입장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예수가 갈릴래아로 가게 된 이 사실의 의미를, 이사야서를 인용함으로써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마태 4, 12~17).

즈불룬과 납달리 땅 호수로 가는 길,
요르단 강 건너편, 이방 사람들의 갈릴래아.
갈릴래아로
어두움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겠고
죽음의 그늘진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리라.(마태 4, 15~16)

예수가 갈릴래아로 간 것은 "어두움에 앉아 있는 백성"과 "죽음의 그늘진 땅에 앉은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함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문맥에서 원문 이사야서를 읽어보면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당신께서는 그들이 짊어진 멍에와
어깨에 멘 장대를 부러뜨리시고
혹사하는 자의 채찍을 꺾으실 것입니다.
……
마구 짓밟던 군화, 피투성이 된 군복은
불에 타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태어날 한 아기
우리에게 주시는 아드님
그 어깨에는 주권이 메어지겠고(이사 9, 3~6).

마태오 편자는 분명히 예수가 갈릴래아로 간 것은 폭정으로부터 민중을 해방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는 예수를 민중을 해방하는 메시아로 여겼다. 마태오 편자는 마르코서를 따르면서도 이 점을 첨가한 것이다. 그는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사람들이 "이 사람은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온 예언자 예수요"(마태 21, 11)라고 하여 갈릴래아라는 지명을 당당히 첨가했고, 또 예수가 처음 갈릴래아의 어느 산에서 산상설교를 했듯이 갈릴래아의 어느 산에서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태 28, 16~20)는 장엄한 유언을 내린 것으로 말한다. 마태오 편자는 예수가 세계로 대진격하라는 명령을 "갈릴래아의 어느 산에서" 내렸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루가복음서는 갈릴래아에 온 예수가 그의 고향 나자렛에 가서 처음 선언한 소명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주의 영이 내게 임하셨도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심은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심이라.
주께서 나를 보내심은
포로된 자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자들에게 눈뜨임을 선포하고
눌린 자들을 놓아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심이라(루가 4, 18).

루가의 편자는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과 같은 이 말로 '갈릴래아의 예수'의 소명을 잘 드러내고 있다.

예수는 눌린 자, 포로된 자들에게로 갔다. 바로 이 민중을 해방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예수는 젤롯당과 서로 통한다고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 과연 그럴까? 이것은 다음 마당에서 밝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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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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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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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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