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마당에서는 '갈릴래아로'를 주제로 삼았는데, 이 마당은 그 다음을 잇는 것으로 예수의 중심주제인 하느님 나라 현실을 밝혀 볼 차례이다.
"때가 찼다.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르 1, 15). 성서학자들 사이에서 이것을 예수의 설교 전체의 요약으로 보고 중시하는 데는 이론이 없다.1)G. Bornkamm, Jesus von Nazareth, Urbanbücher, 19, Stuttgart, 1959, S. 58. 그런데 지금까지의 논의과정에서 기이한 현상을 본다. 이 문제에 관해서 많이 논의되었는데 그 중 가장 많은 정력을 쏟은 것은 그 나라 도래의 현재성과 미래성에 대한 논쟁이다. 우리말로 '가까웠다' 또는 '다가왔다' 등으로 번역하는 ήγγικεν을 현재적으로 읽어야 하느냐 아니면 미래적으로 보아야 하느냐를 밝히는 것이 그 나라의 현실을 파악할 수 있는 열쇠나 되는 듯이 초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그 나라의 현실에 대해서는 사실상 불가지론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2)R. Bultmann, Jesus, Tübingen, 1964, S. 36; H.G. Kümmel, Verheissung und Erfüllung, 1956. 큄멜은 이 책에서 이 문제에 관심을 집중하였지만 그 나라의 현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이제까지의 하느님 나라론은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G. Klein, Reich Gottes als biblischer Zentralbegriff im Gottesreich und Menschenrecih, Ihr Spannungsuerhältnis in Geschichte und Gegenwart, 1971, S. 7~50). 하나는 그 나라를 미래적인 것으로 보고 언젠가는 바깥에서부터 안으로 도래한다는 일반적인 견해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실존적 이해로서 예수는 그 나라를 가르치려하지 않고 도리어 그 나라의 도래를 선포함으로써 인간의 실존성을 나타냈다는 견해이며, 마지막 하나는 하느님 나라는 예수의 종말 선포인데 그것을 오늘의 세계상황, 즉 사회정치 속에서 기술적으로 조성하여 이데올로기화된 미래를 형성해야 한다는 견해로서 이른바 정치신학의 일부가 이 입장에 선다. 이상의 세 가지 유형에서 공통된 것은 예수의 하느님 나라의 핵을 놓치고 있다는 점이다. 저들은 하나같이 하느님 나라의 종말성을 강조한다. 하느님 나라를 종말론의 시각에서 볼 때 역사의 종말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는 인간이 간섭할 수 없는, 오직 신의 영역이라는 사실만을 강조함으로 사람은 그 현실 앞에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따라서 사람의 영역을 넘어서는 피안적인 것으로 삼아버린다. 그럼으로써 그것을 가장 중요한 내용이라고 하면서 실상은 그것에 접근하려고도 하지 않으며, 그러한 입장이 바로 성서적이라고 강변해왔다.3)이와 같은 입장에서 가장 정연한 논리를 펼친 사람이 불트만이다. "하느님 나라는 인간 역사 안에서 실현되는 어떤 것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의 정초, 건설 그리고 그 완성은 어디서도 언급되지 않는다. 오직 그 나라의 '가까이옴', '도래', '출현' 만이 언급될 뿐이다. 그것은 초자연적이고 비세상적인 어떤 것이다"(R. Bultmann, Jesus, S. 36).
그러한 강변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복음서에 '하느님 나라의 비유'가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하느님 나라의 내용에 관해서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것, 뿐만 아니라 어떤 비유에서는 그 나라는 사람에게 철저히 가려져 있다는 뜻으로 해석되어 있다는 사실을 내세운다.4)마르 4, 12는 이사 6, 9~10(LXX)을 인용하면서 비유로 말하는 까닭은 듣는 자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받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맹점이 있다. 하나는 '하느님 나라'라는 개념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 맥을 무시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예수에 와서 비로소 언급된 것이 아닌 다음에야 그것이 나타내는 뜻의 맥을 찾아야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와 그의 행태를 연관시키지 않고 그것 자체를 한 개념으로만 취급하고 있는 점이다. 그의 말은 그의 삶, 그의 행태와 결부시켜 볼 때 그 구체성이 드러난다. 행위는 발언(Aussage) 이상의 현실성을 드러낼 수 있다.
끝으로 또 하나 간과된 것은 그 시대상황과의 관련에서 규명하는 일을 소홀히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시대마다 주류가 있다. 그 시대 사람이면 그 주류에 어떤 형태로든 교류하고 있으며,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그것은 바로 그 시대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반성을 염두에 두면서 그 나라의 실상을 물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