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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나라

먼저 하느님 나라라고 할 때 그 시대 사람들에게 어떻게 반영되었을 것인지 물어봐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그 뜻의 역사적 맥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하느님의 나라란 바로 하느님의 주권을 뜻한다.5)나라를 뜻하는 헬라어 βασιλέια는 공간적인 왕국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통치권, 주권을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βασιλέια τοΰ θεοΰ)는 "하느님의 통치"로 번역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하느님의 주권을 철저하게 내세운 것은 히브리의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히브리의 출발은 에집트 군주국의 압제에서의 탈출로 시작된다. 에집트 제국은 신정제국(Theokratie)이었다. 파라오는 세계를 창조한 신 호루스가 인간이 된 살아 있는 신이다.6)이것이 에집트 국가신학의 중심이다. 왕은 신이며 신들의 영역에서 와서 신적인 통치기능을 행사한다("The Theology of Memphis, 1710", in : Ancient Near Eastern Texts Relating to the Old Testament, J. B. Pritschard ed., New Jersey, 1969, pp. 4~5). 이 파라오의 쇠사슬에서 탈출한 히브리는 오랜 유랑의 과정에서 동일민족의 기틀을 마련하고 가나안 땅에 정착한다. 그러나 그것은 무인도를 점령하는 것이 아니었다. 가나안은 여러 군주국이 웅거하고 있는 곳이기에, 저들의 정착은 가나안의 기득권자들에게는 침략이며 히브리 자체로 보면 생존권을 위한 투쟁이었다. 저들은 그곳에서 또다시 어떤 군주의 치하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유는 바로 그러한 군주국에서 탈출해 나왔기 때문이다. 많은 투쟁 끝에 저들은 현지에 있는 여러 군주 밑에서 혹사당하는 농노(합비루)들과 제휴하여 고대 이스라엘 부족동맹을 형성한다.7)가나안 정착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들이 있다. 크게 보면, 정복설(G. E. Wright 등), 이주설(M. Noth), 사회혁명설(G. E. Mendenhall, N. K. Gottwald) 등이 그것이다. 최근에는 이주설을 세련화한 공존설(Synbiosis­Hypothesis)도 제시되고 있다. 여기서는 몇 가지 유보조건을 전제하면서 사회혁명실을 따르기로 한다. 마틴 노트의 부족동맹설(Amphictyony-theory)은 그리스, 로마, 에투루리아 등지에 나타나는 도시국가들의 제의동맹을 이스라엘 제의공동체에 대입한 것인데(M. Noth, The History of Israel, p. 85ff.), 최근에는 이에 대한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 이 논란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N. K. Gottwald의 사회문화적 재부족화설이다. 열두 지파란 바로 그때 결속된 부족의 이름이었으리라.8)N. K. Gottwald, a.a.O., S. 407. 열두 지파의 사회조직형태에 대해서도 몇 가지 가설이 있다. 목축유목설(M. Weippert), 부족동맹설(M. Noth), 사회종교적 재부족화설(G. E. Mendenhall, N. K. Gottwald) 등이 그것이다. 이 새로운 공동체는 바로 인간의 주권이 침해당하는 데 대해 저항하면서 자주의 영역을 확보했다. 저들이 온갖 외세의 공세를 물리치고 결속하여 민권에 의한 공동체를 200년 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야훼만"이라는 기치 아래 뭉쳤기 때문이다. 즉 오직 하느님의 주권만을 용납한다는 것이다. 이 기치는 하느님이 직접 통치하는 나라의 민(民)이라는 신념에 의한 힘이 되기도 했지만 한걸음 나아가서 일체의 인간에 의한 어떤 지배도 거부한다는 정치적 결단의 선언이다.9)N. K. Gottwald, a.a.O., S. 273. 하느님의 주권의 확립은 인간의 군주국과 병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 도래의 선언은 인간의 권력 독점의 종언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같은 고대 이스라엘 공동체가 다윗에 의해 파괴되었다. 군주파들이 날로 득세하여 사무엘이 마지못해 사울을 왕으로 세우지만(삼상 8장). 그것은 본격적인 군주체제가 아니었는데10)G. Pixley, God’s Kingdom, 1981/ 정호진 역, 『하느님 나라』, 한국신학연구소, 1986, 61면. 존 브라이트는 사울에 의한 군주제는 블레셋의 위협과 고대 이스라엘 질서의 붕괴를 전제로 해서 성립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사울의 군주제는가나안이나 블레셋 도시국가들의 봉건체제에 따라 형성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독특하며, 사울의 리더십은 판관시대의 카리스마적 영웅의 그것과 유사했다고 한다(J. Bright, A History of Israel, London, 1966, pp. 164~166169). 반디트11)반디트(Bandit)란 용병, 강도떼 등을 뜻함.의 괴수였던 다윗(삼상 22, 1~227, 8)이 무력으로 유다 지파에 군림하여 왕이 되고(삼하 2, 3~411), 블레셋(Philister)의 침공에 탈진한 북이스라엘의 사울을 협공하여 이스라엘을 뺏고 그것을 유다와 병합하여 이스라엘 왕국을 수립한 것이다(삼하 5장). 이때부터 본격적인 다윗왕조가 시작된다. 그는 권력의 독점을 정당화하기 위해 야훼의 상징인 법궤를 예루살렘에 안치하고 다윗왕조의 수호신으로 삼았는데(삼하 6장), 그의 아들 솔로몬에 와서 그 위에 성전을 짓고 스스로 대사제를 겸하고 야훼가 성전에만 임재한다는 강제된 신학을 세우고, 야훼를 '감금'하여(열상 8, 12~13) 다윗왕조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삼은 것이다. 이렇게 세워진 다윗왕조는 민족통일을 이루지 못했고 그 다음 대에는 곧 남북으로 분단되었다(열왕상 12, 20 이하). 그후 연이은 외세의 침략 아래 분단상태에서 수난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재기불능의 약소민족이 되어 신흥제국의 속국으로 명맥을 유지했다. 그런 과정에서 하느님의 주권을 갈구하는 소리는 날로 높아갔는데 그것은 다음 세 가지로 표상되었다.

첫째, 고대 이스라엘, 즉 군주 없는 해방된 공동체가 바로 하느님의 주권(나라)으로 표상되었는데 역대 예언자들이 부패한 정권에 대해 이스라엘을 말할 때는 바로 그 모델을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12)이 대표적인 예언자는 아모스이다. 아모스의 사회비판은 고대 이스라엘의 회복을 전제한 것이고, 현존사회를 넘어서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M. Fendler, "Zur Sozialkritik des Amos. Versuch einer wirtschafte und sozialgeschichtlichen Interpretation alttestamentlicher Texte", EvTh, 1973년 1~2월, S. 52~53/ 김정준 역, 「아모스의 사회비판」, 『신학사상』 제21집, 1978년 여름호, 291면 이하). 둘째, 다윗왕조에 의해 세뇌된 지배층은 다윗왕조의 재건을 하느님의 주권 확립이라고 생각했다. 외세의 침범에 계속 시달린 작은 민족으로서 강대했던 다윗왕조의 재건,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주권 확립이라고 이상화한 것은 자연스런 변화일 수 있다. 이 소원은 마침내 다윗의 후예에서 메시아가 나오리라는 대망으로 이어졌다.13)이사 11, 1~5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 구절들에 이스라엘의 제왕 이데올로기와 고대 근동의 제왕 이데올로기가 반영되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A. Weiser, Isaja 1~12(ATD, 17), Göttingen, 1970, S. 127]. 셋째는 밖에서 유입된 묵시사상에 의해 변형된 하느님 나라 표상이다.14)묵시사상은 비이스라엘적인 온갖 사변들도 수용하고 또 이를 그 나름대로 수정하였다. 특히 페르샤와 헬레니즘 시대의 이원론적 세계관이 유다교 묵시사상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묵시사상은 안티오쿠스 4세 때와 같은 엄혹한 시대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헬레니즘의 정책이 추진되고 유다교의 전통적 신앙과 제의가 금지되는 상황에서 묵시사상은 유다인의 아이덴티티를 유지하는 방편이었다(H. Ringgren, "Jüdische Apokalyptik", RGG, Tübingen, 1957, Bd. I. S. 464). 위의 두 경우는 모두 정치적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반해 이 표상은 종교적 환상으로 사변화된다. 하느님의 나라와 세계의 종말을 결부시킨 것이다.15)부세는 유다교 묵시문학을 예언자적 종말론과 구별한 다음 그 특징을 세계관, 이 세대와 저 세대의 구별, 메시아적 고통과 세계 대변혁의 결합, 이원론의 경향, 인간화된 악마로서의 적그리스도, 대심판심판자로서의 신의 강조, 초월적 메시아상, 죽은 자들의 부활, 심판 이후의 불경자들과 경건자들의 상황, 세계의 갱신, 의인의 거주지와 불경자의 체류지 등 10항목으로 나누어 설명한다[W. Bousset, Die Religion des Judentum im späthellenistischen Zeitalter(HNT, 21), Tübingen, 1966, Kap. VIII]. 세계의 종말을 객관화하면 할수록 그 나라는 피안적 성격을 띠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표상 안에는 이스라엘의 민족주의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세계의 파국 이후 새세계의 담지자를 자신들로 환상하거나 다윗의 후예 가운데서 어떤 초인적 지도자가 나타나리라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여러 갈래의 조류가 있으나 하느님의 주권에 대한 갈구는 계속 줄기차게 연속되었다.

야훼여, 당신의 온갖 피조물들이 감사노래 부르고
경건한 이들이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그들이 당신 나라의 영광을 들어 말하고
……
당신 나라의 찬란한 그 영광을 알리게 하소서.
당신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
당신만이 만세의 왕이십니다(시편 145, 10~13).

시편 145편은 그 나라를 간구하는 대표적인 것인데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 부족동맹 축제에서 낭송한 것으로 판단된다.16)A. Weiser, Die Psalmen(ATD, 1415), Göttingen, 1973, S. 571.

우리를 위하여 태어날 아기,
우리에게 주시는 아드님,
그 어깨에는 주권이 메어지겠고
그 이름은 탁월한 경륜가, 용사이신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 불릴 것입니다.
다윗의 왕좌에 앉아 주권을 행사하여
그 국권을 강대하게 하고 끝없는 평화를 이루며
그 나라를 법과 정의 위에 굳게 세우실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만군의 야훼께서 정열을 쏟으시어
이제부터 영원까지 이루실 일이옵니다(이사 9, 5~6).

이것은 주전 742년부터 40여 년간 유다에서 활동했던 이사야의 신탁으로 다윗왕조와 그 후예에 의한 하느님의 통치에 대한 염원이 뚜렷하다.17)O. Kaiser, Der Prophet Isaja(ATD, 18), Göttingen, 1976, S. 101f. 다윗의 후예에서 메시아가 나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한다는 것으로 이사야 11장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나온다"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유다가 바빌론에 함락되어 지도층이 바빌론 포로로 잡혀갔다가 일부가 석방되어 귀국하는 상황에서 익명의 예언자는 이렇게 노래한다.

반가워라, 기쁜 소식을 안고 산등성이를 달려오는
저 발길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희소식을 전하는구나.
구원이 이르렀다고 외치며
"너희 하느님께서 왕권을 잡으셨다"고
시온을 향해 이르는구나(이사 52, 7).

포로에서 다시 돌아와 세우게 될 새 나라, 그것을 하느님의 주권과 직결시킨다.18)이사야 40장 이하는 청중들이 팔레스틴에 있지 않고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음을 반영한다. 여기에는 새 나라 건설의 비전이 계속 나타난다. 페르샤의 왕 고레스(Kyrus, B.C. 539~529년 재위)를 하느님의 기름 부음 받은 패왕으로 기대하는 대목도 있지만(41, 2 이하), 49장부터는 고레스가 더 이상 언급되지 않고 수난의 종의 표상이 전면에 나오고, 오직 하느님의 주권에 매달리는 일이 강조된다. 그는 하느님의 주권은 하늘에서가 아니라 유다 역사 속에서 포로와 석방 등의 구체적 사건과정에서 세워질 것이라는 기대를 토로한 것이다.

하느님의 주권이 확립된 현실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이다. 이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기 위해 '산등성이'를 넘어다니는 사자(使者)들이 있었다. 그들이 전하는 내용은 "구원이 이르렀다", "하느님이 왕권을 잡으셨다"는 것으로 그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복음(기쁜 소식)이다.

둘째, '하느님의 나라'는 그러기에 정치적인 개념이다.19)이 점을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묵시문학에서 비롯된 종교적 색채가 가져다줄 수 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이 점은 강조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나라를 이제까지 종교적 개념으로 또는 정신적인 표상으로 추상화해 버리기 일쑤였는데, 그것은 세계 세력으로서 교회가 정권과의 공존을 꾀해 왜곡시킨 것이고, 성서의 그 나라는 어디까지나 정치적 현실과 직결된 것이다. 이 같은 신념은 다윗왕조 이전의 고대 이스라엘로 거슬러 올라가야 그 필연성을 알 수 있다.

고대 이스라엘은 히브리의 부족동맹인데 '야훼만'이라는 절대적 배타성은 종교간의 경쟁에서 온 것이 아니라 그들이 거부하고 탈출한 군주들의 절대주권을 대치한 것이다.20)N. K. Gottwald, a.a.O., S. 682.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하느님의 주권만이 군림하는 현실로서 일차적으로 땅 위의 온갖 군주적 권력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정치적 성격을 띨 수 밖에 없다. 물론 이스라엘은 이 뿌리에만 서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바탕을 깨고 군주국을 세운 다윗왕조가 쇠퇴하자 다윗왕조의 복귀와 하느님 나라 도래를 혼동한 흐름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역대의 예언자들처럼 전자와 맥을 같이한다.

이러한 하느님 나라를 희망한 데는 부정과 긍정의 측면이 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은 오늘을 지배하는 권력에 대한 철저한 배격을 의미하는 동시에 내일의 새 세계, 곧 하느님만이 다스리는 현실(세계)을 앞당기려는 갈망이다.

이 하느님의 나라의 관념은 바빌론의 고대종교와 접촉함으로써 이른바 묵시문학적인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낡은 세계에 대한 영원한 심판과 메시아 왕국을 거쳐서 마침내 하느님의 주권이 실현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묵시문학은 민중의 글이다. '에녹서', '모세의 묵시', '제4에즈라', '열두 족장의 유언' 등이 그렇다. 그것은 상징언어를 많이 쓰고,21)이를테면 꿈과 환상이 계시를 받는 형식으로 묘사된다. 그 환상들은 알레고리적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으며, 이방 민족들과 이방 왕국들 그리고 왕들이 동물, 산, 구름 동으로 등장한다. 숫자와 관련된 사변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3, 1/2, 4, 7, 70, 12 등의 수치가 그런 것이다. 묵시문학의 표현은 의도적인 불명료성으로 가득 차 있다. 여러 가지 상징언어들이 논리에 맞지 않게 결합 되는 경우도 흔하다(H. Ringgren, a.a.O., S. 465). 이 모든 것은 묵시문학의 전달과정이 공개적이지 않고 은밀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야기로 엮어져 있다. 이것은 바로 박해를 받으며 쓴 것이고 구전적 비어(輩語)의 성격을 띠는데, 이것이 민중언어의 특징이다.

묵시문학적인 글로서 유명한 다니엘서에는 "주는 영원히 왕위에 앉으시어 만대에 이르도록 다스릴 왕이시라"(3, 33; 4, 31)고 기술하고 있다. 다니엘은 시편 145편 3절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구체적으로 당시의 바빌론제국의 왕 느부갓네살의 멸망과 대조시킨 것이다.22)N. W. Porteous, Das Buch Daniel(ATD, 23), Göttingen, 1978, S. 58/ 박철우 역, 『다니엘』, [국제성서주석 24], 한국신학연구소, 1989, 67~68면. 바빌론은 망하고 주의 나라가 영원히 세워질 것이라는 기원으로 불행의 원인이 주님 아닌 이방 세력이 지배하기 때문이라는 확신에서 온 말이다.

너 느부갓네살은 들어라. 네 왕조는 끝장이 올 것이다. 너는 세상에서 쫓겨나 들짐승과 어울려 살며 소처럼 풀을 뜯어먹을 것이다. 그렇게 일곱 해를 지낸 뒤에야 너는 왕국을 다스리는 분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다니 4, 29~31).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주권은 자신들의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실현하는 것이지,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님을 뚜렷이 나타내 보이고 있다.

유다인 특히 갈릴래아인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라는 말이 어떻게 반영될까? 그들은 주전 63년 이래로 거의 100년 가까운 기간을 로마제국의 통치 밑에 신음하고 있다. 로마는 그 권력을 현지인에게 분배하여 하수인으로 삼아 이중 삼중의 착취를 자행한다. 그중에 갈릴래아인 특히 그 안의 민중들은 완전 체념하거나 아니면 혁명적인 역사 변혁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간구했을 수밖에 없다. 그러한 풍토에서 민중의 힘을 과시한 젤롯당운동은 필연적인 것인데 저들은 하느님의 나라 건설과 로마예루살렘 세력 타도를 동일시한 것이다.23)둘째 마당 '예수의 시대상'을 참조.

이러한 상황에 있는 예수의 청중들이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선포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만일 예수가 저들이 역사적 경험에서 가지게 된 그 나라의 표상과 다른 어떤 현실을 말하려 했다면 구구한 설명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가 그 나라에 대한 특별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민중의 염원을 자명하게 공통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전제한 것이며, 그들의 염원과 하느님 나라 도래가 일치한다는 것을 전제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하느님 나라는 역사지평에 온다. 예수는 하느님의 주권만이 인정되는 현실로서의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고 외쳤다(마르 1, 15). "나라가 임하소서 "는 예수가 가르친 기도의 처음 구절이다(루가 11, 2; 마태 6, 10). '임한다'는 그리스어 έρχομαι 영어로 come을 뜻한다. 또 έλθάτω는 '오게 한다'(let come)는 뜻이다. 이 말은 그 나라가 역사 한복판에 '온다'는 뜻이다. 신약에는 '천당'이라는 말에 해당되는 것이 없으며, 천당에 간다는 표현도 없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우리를 당혹하게 하는 것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έισέρχομαι)는 표현이다. 마태오복음서에서 이것을 볼 수 있는데(5, 20; 7, 21; 21, 31) 이것은 시편 24편이나 이사야 26장 2절 등에서 보는 것처럼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 계명을 지키라는 어법을 따른 관습적 표현에 불과하다.24)E. Schweitzer, Das Evangelium nach Matthäus, S. 65/ 한역본 115면. 이사야의 표현은 예루살렘 입성을 전제한 것인데, 시편 118, 19에도 똑같은 표현이 있다(O. Kaiser, a.a.O., Göttingen, 1976, S. 167). 성서의 본뜻은 그 나라가 오는 것이지 우리가 그리로 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를 우리는 이승(차안)에서 저승(피안)으로 '들어가는' 현실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25)놀랍게도 불트만은 그 나라의 피안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 표현이 세계와의 단절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R. Bultmann, Jesus, S. 35f.). 그 나라는 도래하는 현실임을 거듭 강조하는 불트만은 그 현실이 단지 기적적인 어떤 것으로, 인간의 역사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내림하리라고 한다. 그 나라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한복판에 온다. 이것은 글자 그대로 정치, 경제, 문화의 현장이며, 배고픈 자와 부요(富饒)에서 비인간화된 현장, 누르는 자와 눌리되 짐승같이 길들여져야하는 비리의 현장이다. 까닭에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정치적 사건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게 된다. 하느님 나라의 비유가 열둘이 있는데, 그중 넷은 심판에 관한 비유이다. 이 심판은 개인적이거나 심리적인 것으로가 아니라 역사적 사건으로 말한다. 역사의 끝을 맺는 사건이다. 심판의 대상으로는 모든 주권자를 위시해서 하느님의 주권을 가로챈 자들, 바로 '사람 위의 사람들'이 일차적으로 해당한다.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할 때 예수는 왕좌에 앉게 될 것이라는 전제에서 제자들이 서로 더 높은 자리를 탐하고 있을 때 예수는 이렇게 타일렀다.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사람들의 집권자로 알려진 사람들은 백성들을 강제로 지배하고 또 고관들은 세도를 부리고 있다. 그러나 너희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크게 되려고 하면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마르 10, 42~45).

이것은 예수가 당시의 정치체제를 비판함으로써 하느님의 나라는 이처럼 인간이 권력을 가지고 인간을 억압하고 짓밟는 체제와는 전혀 상반되는 현실임을 간접적으로 나타낸다. 이 세계는 하느님의 나라와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청중에게는 참복음이 되었을 것이며 권력자에게는 협박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나라는 이 현실 속에서 역사적인 실체로 현실화되고 구체화된다. '겨자씨 비유'(마르 4, 30~32), '자라나는 씨의 비유'(마르 4, 26~29) 그리고 '누룩의 비유'(마태 13, 33/ Q자료) 등이 그것을 잘 드러낸다. '겨자씨 비유'에서 '하느님 나라'의 실체를 지적한다면 겨자씨가 될 것이다. 씨 가운데 가장 작은 씨지만, 자라면 어떤 초목 보다도 더 크게 자라서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진 가지에 것들일 수 있을 만큼 무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라나는 씨의 비유'에서도 실체로서의 하느님 나라에 해당되는 것은 그 씨다. '누룩의 비유'에서는 "하느님 나라는 마치 누룩과 같다. 한 여인이 그것을 가져다가 가루 서 말 속에 넣었더니 마침내 온 덩이를 부풀게 했다"고 말한다.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이 비유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사회 발전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이 비유들을 하느님 나라의 성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려고 한다.26)C. H. Dodd, The Parables of the Kingdom, New York, 1961, p. 143. 도드 이외에 이 입장에서는 학자로는 H. G. Kümmel(Verheissung und Erfüllung, S. 119ff). 이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나라는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노력에 의해서 세워지는 것이라는 주장의 거점으로 삼는다. 현실 속에서 불의한 세력과 싸우고 피를 흘리는 것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것인데, 그러한 세계는 곧 하느님 나라의 구현으로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달성될 수 있는 것이며, 지금은 겨자씨만큼 미미할지 모르나 나중에는 크게 성장할 것이라는 신념과 기대가 새 세계와 '하느님의 나라'를 직결시키고 그 세계의 성장을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비유들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역할과 기능의 한계를 분명히 하고 있다. 사람이 할 일은 씨를 심고 물을 주는 것일 뿐, 그것을 자라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씨를 심은 사람이 밤에 자고 낮에 깨고하는 동안에 그 씨가 싹이 나고 자라지만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알지 못한다"(마르 4, 26~27). 또 여인이 누룩을 가루 속에 넣을 뿐, 그것을 성장시키는 것은 인간의 소관이 아니며, 인간은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여기에 비유의 강조점이 있다.

이렇게 보려는 성서학자들은 이 비유들의 근본의도는 하느님 나라의 성장성을 가리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 나라는 갑자기 주어지는 것, 그래서 그것은 경탄의 대상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해석은 가장 작은 것이 가장 큰 것이 된다는 대조(contrast)에 역점을 둔다.27)H. G. Kümmel, a.a.O., S. 123.

그러나 이것 역시 일방적인 해석이다. 땅에 씨를 뿌리는 것, 가루에 누룩을 섞는 것, 그것은 인간이 할 일이다. 그리고 씨를 심은 그 땅, 누룩을 받은 그 가루는 바로 역사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비록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역사 안에서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 나라는 어떤 형태로서든 실현되고 있으며 이 일에 사람의 참여를 전제한다. 어떻게 실현되는가는 뒤에서 기술하기로 한다.

다음으로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지역이나 민족이나 종교까지도 초월하는 세계적 실재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실을 가장 잘 드러낸 말이 마태오복음서 8장 11절(루가 13, 28~29)에 있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으로부터 와서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치에 참석하겠고……."

마태오는 동서라고 했는데 루가는 동서남북이라고 했다(루가 13, 29a). 위에 인용한 구절은 "유다인보다 오히려 이방인들이 먼저 하느님 나라에 참석할 것"이라는 맥락으로 편집되었는데, 이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세계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예수의 하느님 나라 사상에는 유다주의가 없다는 사실과 일치한다.28)그러나 이 말은 예수가 민족을 무시했다는 뜻은 아니다. 이스라엘이 예수의 일차적 대상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후론). 이것은 예수의 하느님 나라가 구약이나 묵시문학 영역의 모든 종파와 다른 점이다.

구약이나 유다교에서는 언제나 이스라엘을 중십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구상한다. 비록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에 회의를 느끼는 경우가 있고 그 나라의 세계성을 반영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들은 역시 이스라엘의 '남은 자'로 중추가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주권이 실현되는 세계를 기다렸다. 그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대부분 다윗과 예루살렘에 결부시킨 것은 그러한 민족주의적인 입장을 고집한 것이다. 위에서 본 대로 하시딤 이래로 젤롯당에 이르기까지 유다 종말사상에는 일관해서 유다 민족주의가 깔려 있는데 특히 민중신앙에서 강렬했다.29)S. W. Baron, A Social and Religious History of the Jesus, Philadelphia, 1937, Vol. II, p. 35 : L. Goppelt, Christentum und Judentum., S. 64; S. G. F. Brandon, The Fall of Jerusalem and the Christian Church, London, 1957, p. 156. 그것은 외세나 또는 그것과 야합하는 지배층을 제거하면 자동적으로 그 나라가 도래한다고 믿거나, 예루살렘이나 성전을 수복정화할 때와 동일시하거나, 다윗왕조 재건과 그 나라 도래를 일치시키는 등이 그러한 증거들이다. 그러나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다윗왕조나 예루살렘과 상관이 없다.

그러나 이 말은 예수가 세계주의자라는 뜻은 아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이스라엘 사람이었다. 선교의 대상은 먼저 이스라엘 민족이었다. 마태오에는 예수가 제자들을 파견할 때 "이방 사람들의 길로도 가지 말고 또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성에도 들어가지 마라. 다만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에게로 가라"(10, 5~6)30)'다만'으로 번역된 μάλλον은 '오히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같은 자료임에 틀림없는 마르코나 루가에는 이런 말이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유다인을 독자로 전제한 마태오에 의해 첨가된 것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다.31)FeineBöhrnKümmel, Einleitung in das Neue Testament, Heidelberg, 1969, S. 65. 슈바이처는 이 구절이 할례를 강조한 원시공동체의 일분파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고 본다(E. Schweitzer, a.a.O., S. 152/ 한역본 248면). 그런데 그렇게 간단히 처리되지 않는다.

마태오 10장 23절에도 이와 관련된 말이 있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도시를 다 다니기 전에 인자가 올 것이다"가 그것이다. 여기서는 "먼저 이스라엘"이라는 전제가 있으며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말이다. 정말 마태오가 첨가한 말일까? 그렇게만 보기에는 그때 상황이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마태오복음서를 쓸 때(90년경)는 이미 이방 선교가 본격화 되었을 때이며, 이스라엘이 초토화된 후이다. 이때 예수를 일부러 민족주의자로 만든 것인가? 오히려 이러한 역사적 현실 때문에 마르코나 루가가 그런 부분을 삭제했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은가?

이런 의문과 관련해 주목할 항목이 있다. 그것은 이방 여인과의 대화에 반영되어 있다(마태 15, 21 이하). 자기 딸의 병을 고쳐달라는 이방 여인에게 예수는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을 위해서만 보내심을 받았다"32)직역하면,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이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이다.고 응수한다. 이것도 마르코 자료다(7, 24 이하). 여기에도 마르코에는 그런 한정시키는 말이 없다. 그러나 "자녀 들을 먼저 배부르게 해야 한다……"(마르 7, 27)라는 말에는 이스라엘 우선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사실상 예수는 어느 면으로 보나 이스라엘적이다. 그의 활동무대가 실제로 팔레스틴을 벗어난 일이 없으며, 헬레니즘에 관심을 가진 흔적도 없다.33)첫째 마당 '예수의 수수께끼'를 참조. 그렇다고 그가 유다주의자라는 것은 물론 아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탈유다적이다. 그의 시야에 이사야의 경우처럼(이사 2, 2 이하; 49, 6~7) 온 인류의 구원의 날이 있었음은 두말할 것 없다. 그러나 이 말은 그가 이사야처럼 이스라엘 중심적 구원론을 가졌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당면과제로 삼았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가 선 자리이다(그들의 구원을 빼고 세계 구원을 말하는 것은 이스라엘적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무책임하다. 더구나 그처럼 수난의 역사를 거듭하고 계속 여러 제국에 의해 억압받고 식민지로서 착취당한 민중적 민족에 있어서랴).

위에서 열거한 비유 가운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 비유들은 하나같이 하느님의 나라가 사람에게 어떤 현실을 가져오느냐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그 나라가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34)R. Bultmann, Theologie das neuen Testament, 1965, S. 3ff. 불트만은 『예수』에서도 오고 있는 하느님의 나라를 하느님의 뜻과 관련시켜 설명함으로써 사람의 결단을 강조할 뿐, 그 나라의 내용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R. Bultmann, Jesus, S. 104ff.). 이 사실에 주목한 실존적 이해는 그 내용을 묻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르 4, 3~8),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마태 13, 24~30), '달란트의 비유'(마태 25, 14~29) 등도 모두 하느님 나라의 비유들인데, 이 비유들도 한결같이 하느님 나라 앞에서 인간의 결단과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는 이 서술법(indicative)은 명령형(imperative)을 수반하고 있는 것으로 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나라를 표상하는 구체적인 표현은 없는가? 있다.

그 나라의 내용을 '기쁨'35)J. Schniewind, a.a.O., 8.173; G. Bornkamm, Jesus von Nazareth, S.77ff.이라고 한다. 마태오에 있는 세 가지 하느님 나라 비유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하늘나라는 마치 밭에 묻혀 있는 보물과 같이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면서 다시 묻어두고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13, 44~46). 여기서 중심을 바로 "기뻐하며"로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비록 하느님 나라 비유로 명기되어 있지 않지만 잃은 것들의 비유들, 즉 잃은 양의 비유(루가 15, 1~7; 마태 18, 12~14)에서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 잃은 은돈을 찾은 여인의 기쁨(루가 15, 8~10), 잃었던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기쁨(루가 15, 11 이하) 등을 들 수 있다. 이 같은 것들은 확실히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에 대한 가치를 나타낸다. 그런데 단순히 '기쁨'만을 내세우는 것은 이 비유를 추상화하는 것이다. 그 어느 것도 막연한 추상적 기쁨이 아니라 변혁된 조건 앞에서의 기쁨이다. 잃은 것을 찾았다거나 가진 모든 것과 바꿀 만한 새 것을 발견한 데 대한 기쁨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나눠 먹는 현실이다. 예수의 비유 중에 하느님의 나라를 밥상공동체로 표현한 것이 많다. 마태오복음 8장 11절에도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으로부터 와서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치에 참석하겠다"는 말이 있다. "참석하겠다"(άνακλίνω)는 본뜻이 '기댄다'는 말로서 식사하는 자세를 가리킨다. 그래서 "함께 먹으리니"로 번역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이 간단한 말에서 유다 민족주의를 넘어서서 세계가 하나 되는 큰 사건을 말하는데 이 자리에서 하느님께 예배를 드린다거나 새 나라를 논하는 따위가 아니라 더불어 먹는다고 한 것은 크게 주목할 일이다. 역대로 강대국의 식민지로 시달리고 지금 로마제국의 압제 밑에서 착취와 수모를 당하고 있는 현장에서 온 천하 사람들이 모여 밥상을 함께하는 현실이 바로 하느님 나라라는 묘사는 큰 의미를 제시한다.

만찬의 비유(루가 14, 15~24/ Q자료)도 하느님 나라 비유다. 어떤 사람(마태오복음에는 왕)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청했다. 그러나 먼저 초청 받은 자들부터 불렀으나 모두 소유물 때문에 거절했다. 주인은 그들에게 노하는 반면 거리에 나가 가난한 자, 불구자, 맹인, 절뚝발이 등을 불러오라고 했다. 그런 후에도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불러서 내 집을 채우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 나라 도래에 대한 가진 자와 못 가지고 세상에서 소외된 자의 대조를 나타낸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 나라의 편파성을 말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위의 이야기와 같이 모든 자에게 개방된 현실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만찬 초대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초대 자체에는 사회적 계층성이 없다는 사실이며, 한걸음 나아가서 그 나라는 비록 개방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세상에서 소외된 자들이 주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은 바로 이 비유에서도 그 나라를, 더불어 먹는 밥상공동체 이상 다른 어떤 것으로 설명하지 않고 끝냈다는 사실에 있다.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주의 기도'에서도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는 기도 다음에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소원이 따른다. 하느님의 나라와 먹는 일, 더불어 먹는 일, 하느님의 나라와 물(物),36)안병무, 「예수운동과 物」, 『신학사상』 제62집, 1988년 가을호, 571~575면을 참조. 이 관계가 이처럼 밀착되어 있는데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러한 점이 왜 현재까지 무시되어왔을까! 도대체 어떻게 이들을 분리시킬 수 있을까! 적어도 예수의 말씀이나 행태를 엄숙히 받아들인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루가는 특히 가난한 자가 언급된 전승을 많이 전한다. 풍만한 곡식을 곳간에 쌓아두고 혼자만이 삶을 보장받을 것으로 아는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루가 12, 13~21)나 눈앞에 있는 굶주린 거지 따위(나자로)는 알 바 없이 홀로 먹고 즐기는 부자 이야기(루가 16, 19~31) 등 나눔과 새 세계의 관계를 모르는 군상들을 위시하여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은 예수의 참뜻을 담은 이야기로 볼 수밖에 없다.

마침내 우리는 예수에게 두 가지 대조되는 폭탄선언을 듣는다. 하나는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느님의 나라가 저희의 것이다"(루가 6, 20)와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이 쉬우리라"(마르 10, 25)가 그것이다. 가난함 자체가 미덕은 아니다. 부함 자체도 죄가 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어떻게 하느님의 나라가 더불어 먹는다는 사실과 밀착되었으며 반면에 가난한 자와 배부른 자를 갈라놓는 현실로 표출되었을까? 일반적으로 하느님의 나라라고 하면 에덴동산을 연상하거나 전쟁과 약탈에 시달린 이사야 같은 이가 꿈꾼 것과 같은 평화의 세계를 그린다.

늑대가 새끼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숫염소와 함께 됭굴며 새끼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으리니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친구가 되어 그 새끼들이 함께 뒹굴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리라. 젖먹이가 살모사의 굴에서 장난하고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겁없이 손을 넣으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를 가나 죄로 해치거나 죽이는 일이 다시는 없으리라. 바다에 물이 넘실거리듯 땅에는 야훼를 아는 지식이 차고 넘치리라(11, 6~965, 25 참조).

하느님의 나라 하면 일반적으로 이와 같은 비전을 그리는 것이 상정인데 이 점을 감안하면 그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마당에서 처음부터 지향하고 있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의 표상은 결코 돌연히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생겨났거나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영감을 받음으로써 일어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민족사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설명 가운데 "그 나라와 나누어 먹음"이 거듭 밀착된 것은 그 시대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묵시문학도 가난하고 눌린 자들에 의해서 형성되었듯이 하느님 나라의 표상도 가난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이것은 단적으로 그 당시 가난의 문제가 최대의 과제였으며, 경제적 분배가 극심한 불균형을 이룬 사회였음을 반영한다.

셋째 마당에서 지적했듯이 도시와 농촌, 유다 지방과 갈릴래아 지방 사이의 빈부격차도 컸거니와, 이에 따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격차는 농경사회로서는 극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나라와 먹을 것을 유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으며―이미 예수의 시험에서 보였듯이―소박한 민중들이 가진 자들의 부를 분배하는 것(나눠 먹는 것)과 하느님 나라 도래의 현실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동일시했을 것이라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앞에서 그 나라를 기쁨(χαρά)으로 성격화 해왔는데, 배고픈 자에게 가장 큰 기쁨은 먹는 일 이상의 것은 없을 것이다. 먹는 것과 기쁨을 연결시키는 것은 배곯은 사람만이 안다. 배고픈 자에게 평화롭고 행복한 사회는 나누어 먹는다는 것, 잔치이며, 그 이상은 없을 것이다.

예수가 말하는 하느님 나라가 먹는 일, 나누어 먹는 일을 빼고 생각된 것이라면 그것은 거짓이다. 민중의 현실과 유리된 하느님의 나라가 왔으면(현재) 무엇하며, 온다고(미래) 한들 저들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느님의 나라가 저희의 것이다"(루가 6, 20)라는 대담한 선포를 한 예수, 율법을 다 지켰다고 자부하면서 영생의 길을 묻는 청년에게 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는 예수의 명령(루가 18, 22)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위와 같은 그의 신념의 일단을 표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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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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