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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이 마당 처음에 하느님 나라는 예수의 말에 국한해서 파악할 수 없음을 지적했다. 예수의 선포의 핵심이 하느님 나라이며 그것이 예수의 사상의 핵을 이룬다면, 그의 삶 전체를 그 나라 도래를 위한 운동으로 보아야 정당하다. 세례자 요한의 체포와 함께 갈릴래아 민중에게로 간 그의 공생애 출발부터 예루살렘 시를 향한 진격까지의 이야기는 모두 그 나라를 위한 투쟁기록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에게 하느님 나라는 객체가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실천 속에서 실현되는 현실이다. 그러나 여러 단면을 따로따로 살필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 중에서 뚜렷하게 연관된 부분들만 예거함으로써 그 특징을 확인해보기로 한다.

루가에서 예수가 고향에서 한 공생애의 선언은(루가 4, 18~19) 70인역 이사야 61장 1~2절을 약간 변형한 것으로 다른 종파 문서에도 언급되는 유명한 것이다.37)H. Braun, Qumran und das Neue Testament, 1966, S. 146ff. 그 내용은 단적으로 해방운동이다. "주의 은혜의 해"란 결국 레위기(25장)에 나오는 희년을 의미하는 데, 루가는 마르코의 하느님의 나라를 이것으로 대치시켰다. 하느님 나라와 해방사건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런데 예수는 바로 이 일을 하기 위해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예수)가 오실 그이"(ό έρχόμενος)인가 하는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바로 그의 행동을 반영하는 것인데 그 내용은 별 차이가 없다.38)이사야서에는 포로된 자, 눌린 자의 해방이 언급되어 있는데, 예수의 대답에는 그것이 빠져 있다.

루가 자신도 이 내용이 바로 예수가 실천하고 있는 행위 자체임을 강조한다(21절). 이것은 바로 하느님 나라 운동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 나라 도래의 현실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제자들을 파견할 때 "모든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병을 고치게 하려고 했다"고 전한다(루가 9, 1~2).39)이 구절의 전승과정은 복잡하다. 마르코에는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지시한 내용은 있지만 위의 서두는 없고, 루가와 마태오복음에만이 서두가 있다. 따라서 이 본문은 마르코의 자료와 Q자료가 복합된 것이다. 루가와 마태오복음의 내용도 약간 다르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과제로 삼았다는 점에서는 서로 갈다. 이것은 올바른 전달이라고 본다. 이것은 그의 실천행위는 하느님 나라와 직결된 행위로 귀신추방, 병 고침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반영한다. 그는 그것을 운동으로 전개했다. 바로 그 운동의 전개를 위해 제자들을 파견한 것이다. 루가에는 그 외에 일흔 두 사람을 파견하는 이야기가 있는데(10, 1 이하), 그 지시내용도 같은 것이다.

사실상 예수의 치유행위는 하느님 나라 운동과 분리되지 않는다. 제자들이 파견되었다 돌아온 보고에서 "주님,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합니다"(루가 10, 17)고 할 때에 예수는 "나는 사탄이 번갯불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루가 10, 17~18)고 한다.40)Samuel Hollenwieder, "Ich sah den Satan wie einen Blitz vom Himmel fallen", (Lk, 10, 18), ZNW(1988/ 89), S. 198. 훌렌비더도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악마축출 행위가 서로 직결된다고 본다. 그런데 이와 별도로 "내가 하느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들을 쫓아낸다고 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임한 것이다"(루가 11, 20)라는 독립된 말이 전해진다.41)루가 11, 20은 마태 12, 28과 마찬가지로 원래 독립되어 있던 말이다. 왜냐하면 이 구절들은 바알제불의 힘을 빌려서냐 아니냐의 문제와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I. H. Marshall, a.a.O., 해당부문 참조/ 한역본 II, 126면). 하느님 나라 도래와 사탄추방이 직결되고 있다는 점에서 위의 경우와 같다. 이로써 우리는 예수가 귀신을 내쫓는 행위는 하느님 나라 운동의 일환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병 고치는 행위 일반도 이런 시각에서 이해해야 하는데 새로운 마당을 열어 이상의 내용과 더불어 상세히 검토하겠다.

둘째는 함께 나누는 공동연대감 형성운동이다. 예수에게 생산과 분배의 경제질서의 구체적 방안을 요구하는 것은 시대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에쎄네파와 같이 배타적이고 은둔적인 소집단을 만들고 공산체제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은 있으나 예수는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에 초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출발부터 배타적 엘리트운동이 될 수 없었다. 그는 금욕적이지도 않았으며 은둔적이지도 않았다. 그에게 급선무는 악마적 구조악의 파괴였다.

그러나 그는 민중과 더불어 나누는 일을 중요시했다. 나눈다는 것은 바로 더불어 먹는 일이다.42)안병무, 「예수운동과 물(物)」, 앞의 책, 562~579면 참조. 우리는 그런 장면을 여러 군데서 볼 수 있는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드러낸 것은 마르코복음 2장 15절 이하의 이야기다. 예수는 레위라는 세리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유다 지배층의 항의가 있었다. 까닭은 그가 세리들, 죄인들과 같이 식사하기 때문이었다. 전승사는 이런 자들이 많이 예수를 따르고 있었다는 설명을 달고 있다. 함께 식사하고 있는 식탁에 자리한 자들이 바로 그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이라는 사실이 문제였을 것이다. 그 장면의 서술은 극히 온건하다. 원래 모습은 그보다 험악했을 것이다. 적대자들이 그런 사실을, 그것도 예수의 제자들에게 간접적으로 지적하는 정도가 아니라 너희는 불온한 도당이라고 항의하거나 저주를 퍼부을 만하다.

물론 그 비판자들은 구경꾼으로 등장하지 그 자리에 동석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의 위계질서를 깨는 행위다. 위계질서에 대한 도전은 그 바탕 위에 선 기존사회에 대한 도전만이 아니라 그것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 역할을 하는 종교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이른바 세리와 죄인 같은 부류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행위를 거듭했다. 그러므로 그는 "보라 저 사람은 먹기를 탐하고 술을 즐기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세평을 들었으며, 그것을 알고 있었다(마태 11, 19/ 병행).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먹고 마시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죄인들과 나누는 행위가 문제다. 배고픈 자들과의 나눔에서 민중의 연대의식을 결속하며 그것을 그 나라 도래의 축제행위로 본 것이다. 그런 뜻에서 그는 금식하는 당시의 습성을 거부하면서 지금은 "신랑과 함께 있을 때"(마르 2, 19/ 병행)라고 단언했다. 그러므로 이 행위는 바로 더불어 나누어 먹는 새 시대를 이룰 민중운동의 일환이다.

이와 관련해서 또 하나 지적할 것이 있다. 그것은 그 나라는 더불어 먹는 현실임을 행동으로 제시한 최후만찬의 장면이다(마르 14, 22~25/ 병행).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해방절이다. 이때는 세계에 산재한 이스라엘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이므로 민중봉기의 기회로 자주 이용되었기 때문에 로마군이 이때만은 예루살렘의 안토니아(Antonia)에 주둔한다. 그런데 예수는 바로 이때에 갈릴래아의 민중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한다. 그것이 연례적인 유월절 참예행차라고 시사하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다. 물론 이른바 열두 제자에 국한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예수의 수난현장에 참여한 몇 명의 여인들의 이름도 알고 있거니와, 그의 사후 예루살렘 주변에 120명 가량이 모여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사도 1, 15) 그것은 갈릴래아 민중이었다. 예루살렘을 존중하는 루가마저도 거기 모인 사람들이 갈릴래아 사람들임을 명기하고 있다(사도 1, 11).

그가 최후만찬을 나눈 장소는 비밀장소였기에 제한된 제자만이 모인다. 그 자리는 유월절을 축하하는 장이 아니라43)시작은 유월절 음식준비로 되어 있는데, 식사 자체는 유월절 식사가 아니다. 여기에는 유월절 양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J. Gnilka, Mk, II, S. 240/ 한역본 317면). 마치 죽음의 거사를 앞두고 혈맹을 맺는 자리처럼 묘사되어 있다.44)포도주와 떡을, 피와 살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고 이를 나누는 것은 이 자리와 상관없이 이미 형성된 새크러먼트를 도입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으나(J. Gnilka, a.a.O., S. 242/ 한역본 319면 이하), 최후의 만찬이 나중에 새크러먼트화되어 그 알짬이 회석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 자리에서 배신자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은 그것이 단순한 해방절 축하의 장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키는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의 말이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 것을 마실 그날까지 나는 포도 열매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않을 것이다"(마르 14, 25/ 병행).

이 말에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이 명시되어 있다. 하나는 이 식사가 마지막 식사라는 것이고 하느님 나라는 함께 식사하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 두 식사를 끊어놓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정말 더불어 먹는 하느님 나라를 성립시키기 위한 투쟁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는 예루살렘으로 연례행사에 참여하러 간 것은 물론 아니고 그렇게 단순히 피동적으로 죽으러 간 것도 아니었다. 아니, 그는 그 나라의 도래를 위한 투쟁의 최후결전지로 선택한 것이다. 적어도 민중의 증언은 이러한 것이었으리라. 그런데 그것이 전승과정에서 새크러먼트화됨으로써 비역사화되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투쟁의 과정이나 실상을 파악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최후를 따로 밝혀보긴 하겠으나 이 같은 은폐과정에 의한 한계성을 벗어 날 도리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나라는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투쟁 속에서만 실현되는 현실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공격하는 자들이 하느님 나라를 점령한다"(마태 11, 12b)라는 말은45)슈바이처는 산상설교나 마태 11, 27~29에 입각해 이 말의 현실성을 의심하며 심지어 이것이 예수의 말이 아니라고 극구 부정한다(E. Schweitzer, a.a.O., S. 170/ 한역본 276면). 비록 난해하지만 위와 같은 시각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List of Arti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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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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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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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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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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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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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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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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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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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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