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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클로스

복음서들은 이러한 '무리'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맨 처음의 복음서인 마르코복음서는 예수의 공생애를 말하면서 먼저 예수 주변에 모여든 '무리'에게 주목한다. 처음 1장에서는 '사람들' '모두' '많이'라는 말로 무리를 지시하다가 2장 4절에 이르러 비로소 이들의 정체를 밝히려는 듯, 그들을 일러 오클로스(ὄχλος)라고 한다.31)안병무, 「예수와 오클로스」를 참조.

그리스어에는 대중을 지칭하는 말로서 '라오스'(λαός)라는 말과 '오클로스'라는 말이 있다. 라오스는 흔히 '하느님의 백성' 또는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할 때 쓰는 말로 한 유기적인 집단에 종속된 다수를 가리키는데, 현대어로는 '국민'에 해당한다. 구약을 그리스 말로 번역한 70인역(LXX)에는 이른바 백성을 거의 라오스라는 말로 쓰고 있다. 이에 대해 오클로스라는 말은 아주 드물게 쓰고 있는데, '노예들'이나 '고용된 사병들'이나 '강제 징용자들'을 가리켜 오클로스라고 불렀다,32)E. MeyerF. Katz, "Art. ὄχλος", in : Theologisches Wörterbuch zum Neuen Testament, Bd. V, S. 583ff. 글자 그대로 '오합지졸'이란 의미이다. 우리말로 '무리'라고 번역되었는데 이것은 잘된 번역이다. 어떤 집단에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종속되지 않아 그 사회와 아무런 연대관계도 맺지 않는 자들이 바로 '무리'이다. 무리는 국민과 엄격히 구별된다. 국민은 그 민족사회에 소속되므로 권리와 의무가 있고 보호를 받는다. 그러나 '무리'에게는 그것이 없다.

그런데 마르코서의 편자는 이 두 말 중 오클로스라는 말만을 골라 사용하고 있다. 예수를 따랐던 사람들은 라오스가 아니고 오클로스라는 것이다. 그는 라오스라는 말을 몰라서 그랬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도 라오스라는 말을 두 번 쓰고 있는데 7장 6절은 구약을 인용한 것이고 14장 2절은 율법학자의 입으로 하는 말로 되어 있다. 여기에 비해 오클로스라는 말은 36번이나 사용하고 있다.

마태오나 루가의 경우는 이와 좀 다르다. 마태오에는 오클로스가 51번, 라오스가 13번, 루가복음서에는 오클로스가 40번, 라오스가 35번쯤 사용되었는데 이들의 기본입장은 마르코서에서 이어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 복음서들에서도 오클로스라는 말은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중 오클로스란 말을 라오스라는 말로 몇 번 바꾸어 쓰고 있는데 그것은 의미상 별로 다르지 않다.33)가령 마르 11, 32 : 12, 12 등에서도 예수의 적대자들이 '오클로스'를 두려워했다고 하는데, 루가가 이를 λαός로 바꾸었어도 의미상 변화는 없다. 단지 루가는 라오스라는 말을 그리스도의 구속 공동체의 일원이란 뜻에서 즐겨 쓰고 있다.34)그런 점에서 루가는 바라빠를 놓아달라는 사람들을 '오클로스'로 표현한 마르코(15, 1115, 15)와는 달리 이를 지시대명사로 바꾸었으나, 그 앞에 그들이 '라오스'임을 전제한다. 비록 오클로스를 라오스로 바꾸었으나 이들의 처지가 버림받은 자, 수난당하는 자로서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다는 점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오클로스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마르코복음 2장 13~17절의 문맥에서 파악할 수 있다. 13절에 "모든 무리(πάς ὄχλος)가 예수께 나온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예수를 따르겠다는 세리 레위 집에서 고별잔치가 벌어졌을 때 예수는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탁을 같이 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세리들과 죄인들"이 바로 오클로스임을 시사한다. 이러한 사람들이 예수를 많이 따랐다고 한다. 이에 대해 바리사이파의 율법학자들이 예수가 저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보고 "왜 예수는 세리와 죄인들과 같이 식사하시오?"(마르 2, 16)라고 항의했다. 저들은 함께 식사할 수 없는 '무리'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예수는,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았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 17)고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는 민중을 부르러 왔다"고 단언할 수가 있다. 세리, 죄인 같은 민중, 이들이 바로 오클로스이다.

오클로스의 특징은, 다음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예수가 가는 곳에는 그 어디에나 민중(오클로스)이 있다(마르 2, 42, 133, 93, 203, 324, 15, 21~318, 110, 1). 특히 민중을 빼고 갈릴래아의 예수를 생각할 수 없으며 복음서의 민중 역시 예수를 빼고 생각할 수 없다. 이 민중은 결코 예수가 누구냐를 부각시키기 위한 배경이 아니다. 그렇게 주객의 도식을 찾으려면 바꾸어볼 수도 있다. 즉 예수는 민중의 거울에 불과하다고! 복음서의 예수는, 그러므로 어떤 의미로나 단독자가 아니라 '더불어'의 존재이다. 예수이야기 따로 있고, 민중 이야기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 '우리'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그 이야기는 예수와 더불어 민중이 살아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복음서는 예수의 개인 전기가 아니라는 것35)복음서들이 예수의 전기를 쓸 의도가 없었다는 것을 확인하기까지 무수한 예수전이 나왔다. 그러나 복음서의 성격이 밝혀지면서 예수전을 집필하려는 움직임은 일시에 단철되었다, 복음서의 성격에 대해서는 G. Bornkamm, Jesus van Nazareth, Urbanbücher, 19, Stuttgart, 1956의 서문을 참조.을 수긍하는 대신 그것이 예수의 민중운동사임을 수긍해야 할 것이다. 복음서는 예수운동이 전개되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것이 바울로의 그리스도 표상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이 사실이 그의 형태를 조명하는 데 일관된 바탕이 된다.

둘째, 예수는 민중과 식탁을 함께 했다(마르 2, 13~17). 이러한 사실을 가장 확실하게 전하는 것은 어록자료인 루가 7장 33~34절이다. 즉 "세례자 요한은 와서 떡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으니 '그는 귀신이 들렸다'고 너희가 말하고 인자는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 '보라 저 사람은 먹기를 탐하고 술을 즐기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이 말에서 몇 가지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는 예수가 이른바 죄인(세리)들과 함께 먹고 마셨다는 것이고, 둘째 그것이 바로 예수가 그들의 '친구'임을 드러내는 구체적 행위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덧붙여 밝혀진 것은 그 점이 바로 세례자 요한과 대조되는 대표적인 예라는 사실이다. 세례자 요한도 민중을 대상으로 했으나 그들과 자신을 격리시켰다. 즉 민중은 그에게 설교의 대상일 뿐 '더불어'(communicate)의 대상이 아닌데 예수는 그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므로 그 사이에 아무런 간격이 없음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그것은 어떤 시위가 아니라 그대로 자연스러운 그의 삶이다. 이것으로 당시의 가치관, 즉 상층 구조를 깨버린다. 바로 저들을 억누르고 죄인으로 규정한 그 구조 말이다.

셋째, 오클로스를 '예루살렘파'와 대립시켜서 예루살렘파에 대립된 예수와 오클로스의 연대성을 드러내고 있다(마르 2, 4~63, 2~63, 22~357, 1~28, 1111, 1811, 27~33 등). 갈릴래아의 민중은 예수와 간격이 없이 밀착되어 있다. 이 점에서 르낭(E. Renan)의 표현대로 하면 갈릴래아의 봄이 지속된다. 갈릴래아의 민중은 그만큼 그와 일체감을 나타낸다. 그런데 간간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마르 7, 19) 바리사이파 또는 서기관들이 예수와 맞선다. 그 예루살렘은 바로 예수의 처형지이다. 우리는 여기서 예루살렘의 민중이 예수를 처형하라는 시위를 했다는 이유(마르 15, 13~14)로 반민중론을 펼 필요는 없다. 복음서는 갈릴래아의 민중을 미화한 적이 없다. 따라서 돈으로 오염된 민중의 행태를 구태여 변호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염이 되었어도 예루살렘파에 의한 것이요, 죄인으로 규정되어 인간대우를 못 받는 이유도 '예루살렘파'에 의한 것이다.

넷째, 이것은 셋째 범주에 포함시킬 것이나 구별하여 언급하는 것은 강조하기 위함인데, 그것은 오클로스는 집권자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이다(마르 11, 1811, 3212, 12). 왜 공포의 대상이었나? 저들이 불의를 자행했기 때문이지만 예수와 민중이 일치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로 뭉치면 무서운 힘이 된다. 그래서 사실상 물과 불이어야 할 바리사이파와 헤로데당36)헤로데당원에 대해서는 분명한 것을 말하기 어렵다. 민중 가운데 헤로데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은 아우구스무스가 마르쿠스 아그리빠를 예루살렘에 보냈을 때 헤로데가 황소 100마리를 성전에 제물로 바쳐 성전재산을 늘려 준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Bo Reicke, a.a.O., S. 78/ 한역본 118면). 이들은 헤로데 아그리빠 시절에도 헤로데당원으로 활약했다. 예수를 죽일 음모에 가담한 사람들도 바로 이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갈릴래아의 상류층으로서 친로마적 성향을 띠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J. Gnilka, Mk, I, S. 129/ 한역본 164면).이 초기부터 야합하여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몄고(마르 3, 6), 그를 처형하기까지 로마제국과 종교귀족이 그리고 헤로데가까지 야합해야 했다. 그러므로 반민중적 세력이 어느 쪽인지 폭로된 셈이다. 바로 그들이 민중의 적대자인데 그들이 야합해서 예수를 처형한 것이다.

다섯째, 예수는 오클로스를 '목자 없는 양'(마르 6, 34)처럼 보았다는 사실이다. '목자 없는 양'은 두 가지 표상으로 사용되었다. 하나는 타락한 국민으로서 처벌의 대상이다(즈가 13, 7). 또 하나는 타락한 지도자(층) 때문에 고통받는 민(民)이다.

자신의 왕권 때문에 민중을 강제 동원하여 전선에 보내려는 아합왕에게 미가야는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이 산 저 산으로 흩어지는데 마치 목자 없는 양떼 같았습니다…… 이것들을 돌볼 주인이 없으니 모두들 고이 집으로 돌려보내라"(열왕상 22, 17)고 말한다. 이것은 아합왕의 폭정을 비판한 말로 자칭 지배층이, 실은 양을 잡기 위해 추적하는 사냥꾼 같아서 양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상태를 말한다(에제34, 5). 예수가 오클로스를 목자 없는 양으로 불쌍히 여겼다는 사실은 간접적으로 그 시대 폭군들을 규탄한 것으로서 후자의 경우에 해당됨에 틀림없다. 헤로데도 바리사이파도 스스로 자신들의 업적을 "선한 목자"의 그것으로 생각했음에 틀림없는데, 이런 판정은 지도층을 규탄하고 그 밑에 깔려 신음하는 민중 편에 선 것을 뜻하며 현실적으로 예수는 어떤 종교 지도층이나 집권자들과 유리된 민중을 본 것이다.

여섯째, 예수는 이 오클로스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라고 선언한다(마르 3, 31~34). 그 민중에 대한 어떤 선별도 없이 내 어머니와 형제라고 한 것은 파격적이다. 이것은 혈연적 가족관계를 넘어서 새로운 연대관계를 최대한으로 과시한 것이다.37)안병무, 「예수와 오클로스」를 참조. 비록 3장 31절과의 관련에서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단순한 형제도 아니고 어머니라는 규정은 이례적인 것이다. 형제라는 것은 사상적으로나 또는 어떤 공동체의 일원일 경우(당시의 에쎄네나 바리사이파처럼)38)이들은 '동무'라는 뜻의 칭호를 사용했다(W. Bousset, a.a.O., S. 165, 187).에 부를 수 있는 말이고 종교적 고정관념을 넘어설 경우 민족주의의 표시로도 가능하나 어머니는 그렇지 않다. 이것은 애정을 최대한 반영한 비유로 후에 복음서 편자들도 소화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러기에 마태오는 제자에게 제한시켰고(마태 12, 49), 루가는 아예 이 구절을 삭제해 버렸다.

일곱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수가 오클로스에 대해서 어떤 윤리적이거나 종교적인 평가도 내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미 언급한 대로 예수는 바리사이파를 위시한 소위 지도층에 대해 맹렬하게 비판하지만39)마태 23, 1~36 : 루가 12, 1~3. 이른바 죄인으로 규정된 오클로스에 대해서 비판이나 책망은 전혀 하지 않는다. 만남에서도 그리고 비유에서도 이른바 '죄 지은 자'에게 과거를 청산하거나 어떤 새로운 다짐을 요구하지도 않는다.40)루가 15, 11~3219, 1~10; 마르 2, 13~17 그는 오클로스를 무조건 영접할 뿐이다. 그렇다고 반대로 민중을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맞아들인다. 그저 자신을 개방한 그에게 자신들을 개방함으로써 만나게 된 것이 어머니요, 형제가 되는 계기가 된 것뿐이다.

이상은 마르코복음서를 중심으로 집약해본 예수의 민중이다. 그런데 루가나 마태오, 또는 어록자료에 반영된 모습에서도 근본적인 차이를 찾을 수 없다. 그가 온몸을 기울여 민중 편에 서는 모습은 어떤 원인에서든 지금 고난당하는 무리, 지금 배고프고, 지금 울고, 지금 목마르고, 지금 억눌린 자들에게 자신을 내던지는 자세이다. 고난의 원인이 정치권력의 횡포에 있든 부자들의 착취에 있든 또는 자신들의 나약함에 있든 그들의 무능함을 묻지 않는다. 적어도 그런 것이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이상으로 예수와 민중의 관계에 대한 고찰을 끝내면서 근본적인 문제를 다시 제기할 필요를 느낀다. 그것은 주객도식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쉽게 예수가 민중을 위해, 민중을 부르러 또는 저들의 병을 치료하며 해방하기 위해 민중에게로 갔다고 한다. 정말 그런가? 예수가 갈릴래아로 간 것 그리고 민중에게로 간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예수의 행태 일체를 예수는 주체요 민중은 단순한 객체라는 주객도식으로 갈라 보는 것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

먼저 예수가 있는 곳에 민중이 모여 있는데 예수가 저들을 불렀나, 아니면 민중이 예수를 자발적으로 찾아왔는가? 예수가 병 고친 이야기가 많은데 예수가 계획을 세워 병 고치는 것을 주도했나 아니면 병든 자 자신이나 그의 주변 사람들의 애절함이 주도하여 예수로 하여금 치유하게 했나? 이런 질문을 종합하면 예수가 있어 민중이 있었나 아니면 민중이 있어 예수가 있었나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형식의 질문 자체가 벌써 주객도식에 빠진 것이다. 복음서의 서술은 어느 누가 주동한 것인가를 부각시키지 않는다. 어디서나 예수와 민중이 어울릴 뿐이다. 병든 자가 바로 고통의 상태에 있으니까 예수를 찾고 또 치유해줄 것을 간청한다. 예수는 이에 응하고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고 한다. 그는 분명히 어떤 마술사와 같은 치유행각자로 나타나지 않는다. 4천 명이 운집한 그 한복판에 예수도 있다. 예수 자신이 스스로를 기적의 능력을 가진 자로 인식했다면 사흘씩이나 저들을 굶기지 않았을 것이며, 저들을 측은히 여길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예수의 민중들은, 그가 굶주린 자들과 마주함으로써 일어난 사건이 4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낳았다고 이해할 수 있는 서술법을 쓴다. 그가 홀로 한 것이 아니라는 뜻을 밝히기 위해서 한 사람이 내 놓은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를 기적사건의 바탕으로 내세운다(마르 6, 38).

복음서는 예수가 저들을 일방적으로 가르친 것 일변도로 서술하고 있는데, 정말 예수가 완결되고 정리된 논리를 폈을까, 아니면 침묵하는 민중의 염원을 대변했을까?

우리는 이 두 측면을 절대로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예수'와 '민중'이라고 일단 구별하여 논하나 실은 그렇게 구별되지 않는다. 예수가 민중을 인도한 면이 있다면 예수는 민중에게 포위되어 저들의 뜻에 따라 말하고 행동했을 뿐 아니라, 마침내 그의 운명까지도 결정지은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를 주체로하고 민중을 객체로 보는 입장을 극복할 때 예수의 민중운동을 제대로 파악할 것이다. 이런 노력은 다음에 계속될 것이다.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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