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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 마당
사탄과의 투쟁
일곱째 마당
사탄과의 투쟁
치유

이미 다섯째 마당에서 밝힌 대로 예수의 선포의 초점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였다. 그러면 그는 무엇을 했나? 그가 십자가에 처형된 것이 그의 행동의 결과라고 볼 때 그 원인이 되는 행동은 그의 민중운동이다. 그런데 예수의 민중운동에서 가장 구체적이고 중요하게 전해지는 것은 기적행위이다. 복음서에는 그가 일으킨 기적이야기가 무려 29회(30회)나1)마르 12개, Q자료 47개, 루가 3개, 마태오 10개(R. H. Fuller, Interpreting the Miracles, 1980/ 진연섭역, 『이적』, 대한기독교서회, 1987, 47, 88면). 전해지는데,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의 기적행위만 따로 묶은 『표적』(σημεία)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2)R. Bultmann, Das Evangelium des Johannes, S. 115/ 허혁 역, 『요한복음서연구』, 115면. 요한 기자는 복음서 끝말에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들도 제자들 앞에서 행하셨습니다"(요한 20, 30)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전승된 이야기 외에도 많은 기적사화가 있었을 것이다. 특히 맨 처음에 씌어진 마르코복음에는 예수의 가르침보다 그의 행동으로서의 기적 행위가 물량면이나 그 비중에서 압도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면 이 기적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성서학이 발달되기 이전에는 그 이야기들을 아무런 비판없이 그대로 수용하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도리로 알아 왔다. 그것에 대한 과학적 질문 따위는 설 자리가 없었다. 전능한 하느님의 아들 예수가 한 행위라는 대전제 하에서 그런 기적의 가능성 여부 따위를 물을 생각도 없었으며, 그럴 엄두도 못 냈다. 그러나 성서를 주의 깊게 읽으면 기적이야기들이 사건 그대로를 객관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많은 편집과정을 거쳐 달라지고 있음을 곧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서학에서는 그 이야기들의 전승과정을 밝히는 데 주력해왔다. 따라서 그 이야기들의 전승단계들을 밝히고 있으며, 그 원형과 지금 전해진 이야기 사이의 차이를 규명하고 있다. 그것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몇 가지 예를 보자. 그것을 위해서는 마르코복음에 전승된 이야기와 그것을 전승한 마태오나 루가의 것과의 차이를 보면 된다.

 

나병환자 치유 이야기(마르 1, 40~45; 마태 8, 1~4; 루가 5, 12~16) : 치유받은 나병환자가 예수의 경고와는 달리 그 일을 모든 사람에게 공개하고 널리 퍼뜨렸는데 바로 이 일 때문에 예수는 그 동리에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마르 1, 45). 마르코에는 이 치유받은 사건 자체가 치유받은 자와 상관없이 퍼져나가서 많은 무리가 예수에게 몰려들어 그의 말씀을 듣고 병을 고쳐주기를 바랐다(1, 45)고 이야기되고 있지만, 바로 이 45절의 이야기가 마태오에는 삭제되어 있다. 루가는 예수의 소문이 널리 퍼져 말씀을 듣고 병을 고치기 위해 무리가 떼를 지어 몰려왔다는 이야기는 마르코와 같이하고 있지만(루가 5, 15), 예수가 그 동리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이야기는 마태오와 마찬가지로 삭제한다.

 

중풍병자 치유 이야기(마르 2, 1~12; 마태 9, 1~8; 루가 5, 7~26) : 예수가 민중에게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운신할 틈이 없어서 중풍병자를 데려온 네 사람이 지붕을 뚫고 그를 눕혀놓은 침상을 달아 내렸다고 했는데(마르 2, 4), 루가에는 표현의 차이는 있으나 이 부분이 그대로 수용되어 있다(루가 5, 19). 그러나 마태오에는 삭제되어 있다.

 

회당장의 딸을 살린 이야기(마르 5, 21~43; 마태 9, 18~26; 루가 8, 40~56) : 한 회당장이 예수에게 자기의 딸을 구해 주기를 간청했다. 그런데 마르코에는 "그의 딸이 죽게 되었다"(έσχάτως έχει)고 하고 있는데(23절), 루가는 어감은 다르나 이와 비슷하게 "죽어가고 있었다"(άπέθνησκεν)고 하고(42절). 마태오에서는 "죽었다"(έτελεύτησεν)고 한다. 또 마르코에서는 흔히 있는 경우처럼 일반인을 격리시키고 그 부모와 세 제자만이 있는 현장에서 그 아이를 살려 일으켰다고 한 데 대해서(37~40절), 루가에는 그들 이외에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을 내보냈다는 흔적은 없다. 그리고 마르코는 예수갸 한 말을 아람어 그대로 "탈리다 쿰"이라고 전한 데 대해(41절) 루가는 이 말을 번역한 반면(54절), 마태오는 그 명령 자체를 삭제하고 소녀의 손을 잡았다고 말한다(25절).

 

혈루증 환자 치유 이야기(마르 5, 25~34 :마태 9, 20~22 :루가 8, 43~48) : 마르코에는 혈루증 앓는 여인이 여러 의사에게 보이는 동안 고생을 많이 했고 자기 소유도 다 없앴으나 아무 효력이 없었을 뿐 아니라 도리어 병이 심해졌다는 전제를 갖고 있는데(26절), 마태오는 이 부분을 완전 삭제하고, 루가는 이 내용을 대담하게 축소한다(43절). 그리고 마태오는 마르코의 29~32절 내용을 아예 삭제했다.

 

벙어리 귀신 들린 아이 이야기(마르 9, 14~28 :마태 17, 14~20 :루가 9, 37~43a) : 이것은 분명히 마르코가 그 자료로 되어 있는데, 마르코가 벙어리 귀신이라 한 데 대해(17절) 마태오는 간질병(15절), 루가는 단순히 귀신들렸다(39절)고 한다. 그리고 병 증세에 대한 아버지의 설명이 마태오에서는 아주 다르고(15절), 루가에는 변형되어 있다(39절). 그리고 아버지의 "할 수만 있거든"이라는 말에 따른 믿음에 관한 논의가 있는데(마르 9, 22~23), 이것이 마태오와 루가에는 전부 삭제되어 있다.

 

위에서 우리는 같은 이야기가 전승과정에서 달라진 것을 분명히 보았다. 이것은 목격자가 그 사건을 보도했다고 해도 그것이 전승되는 과정에서 어떤 필요에 의해 변형되었음을 입증한다. 더 나은 문장을 만들기 위해서 또는 상호 모순되는 것을 시정하기 위해서만이 아니고, 그 청중을 의식하면서 그들에게 불필요하거나 오해를 일으킬 소지가 있는 것을 제거하는 경우도 있고, 거꾸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교회의 입장이 확고해짐에 따라 예수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서 첨가하는 부분도- 있다. 그러므로 성서학에서는 지금 우리 손에 전승된 이야기에서 원초적 형태를 찾으려고 노력해왔다. 그 작업에도 통일된 정론이 성립된 것은 아니나 그것을 분류하여 성격화하면 대체로 다음의 특성들이 드러난다.3)荒井 獻, 『イエス キリスト』, 講談社, 1979, 27~28면.

첫째, 예수는 외부로부터 요청을 받는다. 거기에는 그리스도론적 칭호가 없다. 예수는 기적행위의 주도권을 갖지 않는다. 둘째, 기적 자체는 특별히 강조되지 않고 고침을 받는 자에 대한 관심이 마지막까지 지속된다.4)다만 요한복음은 치유사건 후에 모든 관심을 치유자 예수에게 집중시킨다(요한 4, 545, 13 ~149, 10~1111, 44b 등). 가족 또는 마을로 돌아가라는 지시가 바로 그런 것이다. 셋째, 고침을 받는 자에게 특별히 신앙이 전제되어 있지 않다. 넷째, 기적행위자로서의 예수의 위대성이 강조되어 있지 않다. 기적에 참여하는 자는 민중이다. 이러한 원형은 마르코복음 1장 40~45절, 8장 22~26절(단 22절 후반과 26절 후반은 제외), 루가복음 17장 11~19절(단 15절의 하느님 찬양, 16절 후반, 18절, 19절 후반 제외)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런 원형이 전승되는 과정에서 치유에서의 예수의 주도권이 확대되고, 병자들이 예수를 부를 때 그리스도론적 칭호가 첨가된다. 또한 기적에 대한 반응이 강조되고, 고침을 받은 자에 의한 선교 개시로 이야기가 진전되며, 나음을 받은 자의 신앙이 강조된다.5)荒井獻 앞의 책, 21면 이하.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기적이야기가 역사적 사건을 그대로 직접 전달한 것이라고 보려는 것은 맹목적이다. 기적 자체가 일어났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무엇을 말하려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기적전승을 냉정하게 분석해야 한다. 이에 반해 기적이야기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다른 사실을 말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입장이 있다. 근세 이후 성서학적 업적의 완성자로 볼 수 있는 불트만은 모든 기적이야기는 결국 요한복음 2장 30~31절의 내용을 목적으로 하며, 그런 의도에서 구성되었다고 한다.6)R. Bultmann, Das Evangelium des Johannes, S. 540f. 다시 말해 기적이야기는 모두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임을 입증하기 위해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서는 확대된 케리그마라는 그의 기본입장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이로써 기적이야기 자체는 그것이 말하려는 의미만을 채취하고 나면 불필요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런데 그의 입장은 결코 새롭게 돌출된 것이 아니라 서구신학의 주류를 집약한 것이다. 이미 그리스도교 교리사에서 결정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어거스틴은 기적이야기는 자연질서를 거스로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이해가 그것에 미치지 못했을 뿐이라고 본다.7)Augustin, De civitate Dei, XXI, p. 8. 이 말은 인간의 이해력이 발달하면 그런 것들은 기적이 아니라는 말이 되므로 결과적으로 기적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까닭은 성서에서 말하는 기적은 자연질서를 파괴하는 것으로 인간의 이성영역 밖에 있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신학적으로어거스틴의 영향을 결정적으로 받고 있는 루터는 기적 자체의 가능성 여부나 그 역사성을 물으려고 하지 않는다.8)M. Luther, WA, Bd. 38, S. 601; Bd. 35, 602. 루터는 그러한 외적 기적(miracle)에 관심이 없으며, 예수의 고난과 죽음으로 죄와 죽음이 극복되고, 믿는 자가 의롭게 되며, 죽음이 극복되는 기적을 사실상의 기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기적 자체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으로 이를 거부하려는 작업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운동은 근세에 와서 성서를 학문적으로 연구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예수 연구사를 총괄한 슈바이처는 라이마루스(H. S. Reimarus, 1694- 1768년)에서 출발한다. 그는 예수를 도그마의 갑옷에서 해방시키려고 처음으로 칼을 뺀 사람이라 할 수 있다.9)A. Schweitzer, Geschichte der Leben-Jesu-Forschung, Tübingen, 1951, S. 13~26. 또한 복음서의 기적이야기를 처음으로 합리적으로 풀이하려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 뒤를 이어 슈트라우스(D. F. Strauss, 1808~1874년)가 복음서의 기적을 신화라는 틀에서 보았다. 그런데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신화에 대한 이해이다. 신화는 사회적 산물로서 시대의 모든 관념이 신화화된 것이라 본다. 그러므로 그는 복음서의 이야기들은 처음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관념을 예수라는 인물로 구체화한 것이라 본다. 따라서 기적이야기도 그 시대의 관념을 신화적 언어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고 예수와는 상관없는 것이 된다.10)D. F. Strauss, Das Leben Jesu, kritisch bearbeitet von Dr. David Friedrich Strauss, Tübingen, 1835, Vorrede VI. 이 입장을 더욱 철저히 한 사람이 바우어다. 그는 마침내 예수가 그리스도교를 만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가 예수를 만들었다는 대담한 선언을 했다.11)B. Bauer, Kritik der Geschichte der Offenbarung, Berlin, 1838. 따라서 기적 이야기도 모두 후기에 예수의 이름을 빌려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바로 그와 대적해서 『예수전』을 쓴 사람이 르낭인데 역사의 예수를 그림처럼 아름답게 묘사했으나 역시 기적은 전적으로 배격했고, 예수의 윤리적인 면만을 강조했다. 그 뒤에 주목할 것은 포이어바흐의 입장이다. 포이어바흐의 유명한 테제는 하느님이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느님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그 신상은 인간의 희망과 소원이 부영된 것이기 때문에 그런 입장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기적 역시 이와 똑 같은 입장에서 풀이하고 있다.12)L. Feuerbach, Das Wesen des Christentums, Leipzig, 1841, S. 206. 그의 입장을 철저히 한 것이 마르크스주의자인 에른스트 블로흐이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신관에서 완성 될 인간성을 추구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적이야기도 인간의 미래성이 투영된 것이며 예수 자신이 행한 모든 것이 인간의 미래에 완성될 극점을 앞당겨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무신론적인 새로운 해석에 의해서 적극적으로 수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13)E. Bloch, Das Prinzip Hoffnung, Frankfurt am Main, 1959, S. 1522.

이러한 과정에서 이른바 방법론적으로 종교사학적 비판학이 발전되었다. 그것은 성서를 학문적으로 분해하는 데 많은 공헌을 했으며, 오늘날에도 유용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 업적을 성격화하면 예수에게서 일어난 이야기, 즉 기적이야기 등이 상대화된다. 저들은 성서의 기적이야기들을 헬레니즘 영역과 후기 유다교의 이야기들과 비교함으로써 그 유사성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거기서 영향을 받아 왔다는 결론에 이르렀다.14)종교사학파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H. Gressmann 등이 편집한 Die Schriften das Alten Testaments로, 1911년 이후 계속 발간되고 있다.

이상에서 일별한 예수 연구사에서 주목할 것은, 저들이 그리스도교의 도그마에서 예수를 해방시키려고 한 반면 저들에게는 사건보다 관념이 먼저라는 전제가 일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15)불트만을 위시하여 R. Pesch(Jesu ureigene Tuten?, Freiburg, 1970, S. 23)도 같은 입장을 취한다. 예수도, 기적 이야기도 관념의 산물이다. 불트만도 이 계보에서 벗어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그에게는 관념의 자리에 케리그마가 대치된다. 케리그마가 먼저 있고, 그것에서 기적이야기들이 산출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서 일관되게 기적이야기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똑같이 불트만도 사건 자체에서 의미(케리그마)만을 추출해 내면 기적이야기 자체는 아무 가치 없는 것이 되고 만다.16)R. Bultmann, Glaule und Verstehen, Bd. I, 1964.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고 불트만 자신도 인정하듯이 기적이야기(요한복음은 제외)에서 그가 말하는 케리그마를 찾아내기란 어렵다. 초기의 전승들로 소급할수록 더욱 그렇다.

"케리그마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먼저 있었다. 그러므로 케리그마의 배후를 물어야만 한다."

우리는 기적이야기들을 하느님 나라 운동의 일환으로 보았다.17)R. Pesch, a.a.O., S. 21. 그것은 바로 민중운동과 직결된다. 기적이야기는 바로 민중운동의 일환이다. 민중은 개인이 아니고 집단이다. 그러므로 그 기적사건이 예수 개인에게서 일어난 것인가 아니면 후기 예수의 민중운동에 의해 추가, 변형 또는 창출되었는가하는 물음은 별 의미가 없다. 의미가 있다면 민중운동사의 규명을 위해서일 것이다. 예수의 민중운동은 예수에게서 시작되어 그의 민중에게 계승되었으며, 그것은 하느님 나라 운동으로 이어진다. 그런 시각에서 우리는 기적이야기들을 성격화할 것이다.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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