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집

전집은 OCR 스캔 잡업으로 진행되어 오탈자가 있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등록해 주시면 관리자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수정 요청을 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2. 본문을 읽는 중에 오탈자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앞뒤 텍스트와 함께 마우스로 선택합니다.
3. 그 상태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타나는 창에서 수정 후 [수정요청]을 클릭합니다.
4. 각주의 경우에는 각주 번호를 마우스오버하여 나타난 창을 클릭하면 수정요청 창이 열립니다.

※ 컴퓨터 브라우저에서만 가능합니다.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이 기적 이야기들을 민중사건의 일환으로 볼 때 다음 사항들이 분명해진다.

첫째, 기적이야기는 민중언어라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언어는 곧 세계관이라 하는데 민중언어는 하나의 '관'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삶의 파악이며, 그것의 표현이라는 점이 분명해져야 할 것이다.18)기적은 신이나 신적 능력을 증명하는 것으로 여겨졌다기보다는 신을 전제하고 있는 저들에게는 생활의 일부였다(W. Schmithals, Das Evangelium nach Markus, ÖTKN, Bd. I, S. 304f. 참조). 그렇다면 거기에는 그들의 진실이 담겨 있다. 그들이 보고 경험한 바를 자신들의 언어로 표현한 것이 기적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차원의 척도로 그 전달 내용을 이해할 수도 없고 시비해서도 안 된다. 가령 제국주의 하에서 서방인들이 이른바 제3세계를 정복했을 때 정복자들은 그 안에 있는 문화를 볼 눈이 없었다. 자기들의 척도로 쟀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시각에서 그 지역의 언어 특히 종교적 표현을 미신으로 배제해버렸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바로 그 미신이라고 배제해버린 것들 속에 그들의 진실한 삶의 현실이 있음을 재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신화니 동화니 민담 등으로 분류해19)디벨리우스는 설교, 패러다임, 노벨레(단편소설), 전설, 신화 등으로 분류함으로써 그러한 양식규정의 성격에 매여 이야기에 담긴 본래의 역사성을 희석시 카고 만다(M. Dibelius, From Tradition to Gospel, New York, 1935, pp. 25, 70, 104, 241, 271). 그 역사성과 가치를 무시 내지 격하하는 입장은 지양되어야 한다.

둘째, 기적이야기에는 저들이 현실적으로 당하는 애환이 노출되어 있다. 그것은 역사적인 현실이다. 까닭은 그것이 삶과 직결되었기 때문이다. 억눌림, 가난, 패배 속에서 그것들과 무관하지 않은 생리적인 병으로 몸부림치는 구체적인 현장이 제시되었다.20)G. Theissen, "Synoptische Wundergeschichten im Licht unseres Sprachverständnis", Wissenschaft und Praxis in Kirche und Gesellschaft, 1967. 7/ 안병무역, 「공관서의 기적사화」, 『r신학사상』 제22집, 1978년 가을호, 527면.

셋째, 이것은 저들의 삶을 위한 투쟁의 의지와 실천을 드러낸다. 그 속에서 해방되려는 의지, 고통에서 풀려나고자 하는 투지, 체념 속에 그대로 매몰되지 않고 운명론을 거부하면서 일어나겠다는 투쟁 현실이 드러난다.

넷째, 그 이야기 속에는 민중의 희망이 생생하게 표출되어 있다. 앉은뱅이가 걸을 수 있다는 희망, 소경이 볼 수 있다는 희망, 아니 죽음마저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희망, 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바로 이런 희망이 저들을 살게 했으며, 이것은 동시에 저들의 저력인 것이다. 이것은 기층민중이나 절망 가운데 빠진 사람이 아니고는 가져볼 수도 없는 희망이다.21)W. Schmithals, Loc. cit.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이야기가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하는 관념적인 회의주의를 버리고 민중의 현장에 들어가 열린 마음으로 진실을 체험하려는 자세를 전제조건으로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하여 병 고침에 대한 예수의 행태를 일별해보자. 마르코복음 1장 21절 이하는 예수가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한 첫 행위인데 그 끝말은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래아는 물론 그 근방에 두루 퍼졌습니다"로 되어 있다. 다음으로 제자들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아 집에 들어가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쳤으며, 장모는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마르 1, 29~31). 그리고 날이 저물었다. 안식일이 지난 것이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사람들을 예수께 데려왔고, 그리고 온 동네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 들었다. 그는 온갖 병자들을 고치고 많은 귀신들을 쫓아내었다(1, 32~34a). 하루를 온통 치유에 바친 인상이다. 그 다음날에도 예수에게 병 고침을 받으려고 몰려 들었다(37절). 그날도 예수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며 여러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고 귀신을 쫓아냈다(39절)고 한다. 그 뒤를 이어 나병환자를 고친 이야기 다음에 많은 사람들이 사방에서 모여 들었다(45절)고 함으로써 그들 역시 병 치료를 받기 위한 민중임을 시사한다. 그것이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중풍병자 치유장면에서 드러난다. 밖에서 민중을 뚫고 예수에게 갈 수 없을 만큼 민중이 빽빽이 운집해 있었던 것이다(2, 4). 또는 각 지방에서 사람들이 운집해 와서 예수는 부득이 배에 오를 수밖에 없었는데, 그 무리들도 "그가 많은 사람을 고쳐주셨기 때문"(3, 10)에 그에게 온 것이다.

또 하나의 예를 보자. 그가 게네사렛 땅에 도착했을 때 또 군중이 운집했는데 그들 역시 예수가 치유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몰려 들었다는 것이다(6, 54~56). 이쯤 되면 예수의 민중운동에서 치유사건이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되었던 것인지 충분하게 전달된다. 이러한 종합적 서술말고도 위에서 언급한 대로 치유의 구체적 예가 복음서 전체를 통해서 그토록 많은데, 기적이야기를 모호하게 한다거나 제외하고서는 예수의 운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들의 역사성에 대해 관심이 많다. 그러므로 예수가 정말 그렇게 했느냐를 묻는 데 치중한다. 그러나 이미 서두에서 밝힌 대로 우리는 기적이야기를 민중운동의 일환으로 볼 것이다. 그것이 예수가 한 일이냐, 아니면 예수가 그렇게 했다고 믿음으로써 그들에게 그와 같은 기적이 일어났느냐, 그러므로 자신들의 경험을 예수에게로 돌렸느냐 하는 식의 구별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까닭은 그 어느 것이든 그 결과가 역사적 현실로 나타난 사실이 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예수의 기적사건은 일반적으로 자연기적과 치유기적으로 나뉜다. 치유기적은 만남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풀이될 수 있는데 반해서 자연기적은 마술적인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제외해 버리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기적이야기 자체는 전반적으로 이른바 역사적인 사건의 서술과 그것에 대한 풀이가 섞여 있어서 그것을 분명히 나눌 수 없는 부분이 있는데, 자연기적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자연기적은 '상징적인 의미'를 신화적인 언어로 표현했다고 단정할 만한 성격을 갖고 있다. 유태인 예수 연구가로 확실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클라우스너(J. Klausner)는 예수의 기적행위가 유다교 영역에서 벗어난 특별한 것이 아니며, 그것은 대부분 후대에 의해 산출된 것이라는 입장인데,22)J. Klausner, Jesus von Nazareth, S. 364f; R. H. Fuller, a.a.O., S. 65~68. 그가 예거하는 것은 거의 이른바 자연기적이다.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 이상을 나눠 먹인 이야기(마르 6, 30~44),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죽게 한 이야기(마르 11, 1420~21), 폭풍 진압(마르 4, 35~41), 바다 위로 걸어간 일 등을 유다 구약의 예언자들의 관계에서 산출했다고 보거나 합리적으로 해석하여 예수의 비유에서 유추해 만들어진 이야기로 처리한다. 그런 시각에서는 기적이야기의 역사성을 거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간과해서 안 될 것은 예수에게 투영한 민중의 열망이다. 성난 파도―그것은 저들이 당면한 험준한 문제들이다―를 잔잔하게할 수 있는 예수, 아무 결실 없는 정죄만 일삼는 유다 귀족들을 심판하는 예수, 부가 극소수에게 편중됨으로써 굶주린 민중들에게 먹을 것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예수를 믿는 마음은 바로 저들 자신의 염원과 결의를 나타낸 것이며, 동시에 저들에게 그럴 수 있는 힘을 제공하면서 역사적 사건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결코 가볍게 간과해 버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만남에서 이루어진 치유사건에 치중하여 그 성격을 규명해 보려고 한다.

사람들 중에는 치유기적 이야기도 일반적인 병을 고치는 이야기와 귀신을 쫓는 이야기로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23)타이센은 일반 병과의 차이는 치료법에서 나타나므로 양자를 구별해야 한다고 본다(G. Theissen, Urchritliche Wundergeschichten, Gütersroh, 1974, S. 94f). 그 이외의 주장에 대해서는 G. Theissen a.a.O., S. 94의 각주 13을 참조. 그러나 P. W. Hollenbach("Jesus, Demoniacs and public Authorities", The Journal of the American Academy of Religion, XLIX/ 4, 1981. Dec)는 이러한 구별을 거부한다. 그것은 그 자체만의 현상을 관찰할 때에는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민중의 해방이라는 시각에서 볼 때 그 둘을 별개의 범주에 넣고 각기 다른 결론을 내리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런 구별없이 전체의 성격을 규명해 볼 것이다.

 

1. 병 고침을 받은 자들은 기층민중, 즉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이다. 치유받은 자들의 성분은 저들이 가난한 자일 수밖에 없다는 추측을 정당화한다.

첫째, 저들은 대부분 홀로 나타난다(마르 1, 231, 405, 25, 2510, 46). 그것은 저들이 이미 가족이나 그 부락과 절연되어 있었으리라는 상상을 가능케한다. 예나 오늘이나 불치의 병자는 그 사회에서 버림받게 마련이다. 그가 가난한 가정에 태어났을 경우에는 단순히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오랫동안 가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38년 동안 병을 앓고 있던 자가 베짜타 연못에 들어가서 치유받기를 그렇게도 원했으나 그를 그리로 데려다 주는 사람이 없어서 애타하는 이야기가 있는데(5, 1~9), 팔레스틴의 병자들 중에는가정에서 버림받아 홀로 유랑하는 환자들이 압도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치유받은 사람에게 집으로 돌아가라는 권고를 하고 있는 것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데(마르 2, 115, 195348, 2610, 52), 이것은 바로 이러한 병자의 현실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둘째, 예거된 병의 성격은 대부분 사회에서 배척하는 것들이다. 나병환자(마르 1, 40), 이른바 더러운 귀신 들린 자(마르 1, 235, 27, 269, 17), 혈루증 환자(마르 5, 25), 소경(마르 7, 2210, 36), 벙어리(마르 7, 2) 등 모두 반사회적인 병들이다. 이른바 병석에 누워 있는 일반 병은 거의 없다.24)마르코복음에서는 열병환자(마르 1, 30)와 중풍병자(마르 2, 3 이하)의 경우가 언급될 뿐이다. 이런 이들은 그 사회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는데, 사회질서를 위해서 성전종교의 정결법에 근거하여 또는 반사회적인 병은 하느님에게 저주받은 것이라는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의하여 그들을 배척한 것이다.25)나병의 경우가 대표적인데, 그처럼 배척하는 태도는 민수 12, 12; 레위 13, 45~46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나병환자를 죄인으로 규정하는 것은 라삐 시대에 강화되었다(1QS, 2, 3~4). 따라서 저들은 사람 사이에 섞일 수 없었으며,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권리와 의무에서도 제의 됨으로써 죄인 취급을 받게 된다. 결국 저들은 가난할 수밖에 없다. 예수를 따른 5천여 명이 사흘 밤낮을 굶었다고 함으로써 저들의 가난함을 드러내고 있는데(마르 8, 2), 예수를 찾아 운집하는 환자들이 바로 그런 부류에 속했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셋째, 병 고침을 받은 자 중에는 부유층이나 권력자가 없다. 보도된 대로라면 사회적 신분으로 볼 때 회당장이 가장 높으며(마르 8, 22~23), 그 외에는 단 한 사람도 그의 사회적 지위가 명시된 경우가 없다. 병 고침을 받은 자로서 예거된 사람은 여인들, 아이들, 거지, 종 등이다. 모두 다 무력한 군상이다. 예수의 기적행위를 과시하려면 다른 많은 종교민담에서 보듯이 권력자나 부자 따위를 치유함으로써 그 명성의 효과를 크게 부각시키려는 노력도 있음직한데, 그런 예는 일체 없다. 한마디로 그의 치유의 대상이 기층민중이었다는 것은 예수운동의 일환에서 볼 때 당연한 현상이라고 할 것이다.

 

2. 복음서는 예수가 병자들을 치유했다는 서술법을 쓴다. 그리하여 치유사건의 주체는 예수이고 병든 계층은 객체라고 이해해 버리기 쉽다. 그리스도론이 발전되면 될수록 치유사건은 그의 그리스도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처리되면서 그 사건 자체에서 쉽게 떠나 버릴 뿐 아니라 치유받은 민중의 존재 또한 쉽게 증발되고 만다. 그럼으로써 역사의 현장에서 일어난 사건이 관념화된다. 그러나 사건의 현장을 주시하면 그것과는 또 다른 면이 있다.

첫째, 먼저 유의할 것은 위에서 본 대로 예수는가는 곳마다 민중에게 포위되어 운신하기 어려울 정도였는데, 그들 중에 많은 수는 예수가 병을 고쳐줄 것을 열망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즉 예수는 병에서 해방시켜 달라는 민중의 열망 앞에서 수세에 몰리는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구체적인 치유장면에서 주목할 것은 역시 병자 자신 또는 그의 어머니나 아버지 아니면 가까운 사람들이 사건 유발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고 예수는 저들의 적극성에 '마지 못해' 응하는 수동적인 대응을 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26)단, 예외가 있다. 안식일 문제처럼 적대자와의 논쟁이 주제가 되는 경우가 그렇다. 예컨대, 한 손 오그라진 사람(마르 3, 1~6), 18년 된 병자(루가 13, 10~17), 수종병 앓는 사람(루가 14, 1~6). 가령 한 나병환자가 무릎을 꿇고 간청했는데(마르 1, 40, "예수를 보자 엎드려 구했다"; 루가 5, 12) 그 모습이 예수에게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일으키게 했다. 앓는 딸을 가진 한 회당장이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그 딸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마르 5, 23~34). 한 이방 여인이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어 주시기를 간청"했다(마르 7, 25~26; 루가에는 "큰소리를 질러 가로되"). 이에 대해 예수는 어떤 이유에서였든지 간에 그녀의 요청을 자녀가 먹는 떡을 개에게 줄 수 없다는 모멸스러운 말로 거부했는데, 이 여인은 "그러나 상 아래 있는 강아지들도 자녀들이 흘린 떡 부스러기는 주워 먹습니다"(28절)라고 말하여 스스로 개의 위치에 있어도 좋다고 애걸함으로써 마침내 예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한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는(마르 9, 14~27) 예수에게 "할 수 있으면" 그 아이를 구해달라고 한 데 대해서(22절) 예수는 "'할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무엇이든지 가능하다"(23절)고 힐책할 때 그는 큰소리로 "내가 믿습니다.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라고 함으로써 예수를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는 듯한 장면을 묘사한다. 바르티매오라는 맹인 거지는(마르 10, 46~52) 예수가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24절)라고 소리질렀다. 여러 사람이 그를 만류하는데도 그는 더욱 소리 높여 같은 절규를 반복함으로써 마침내 예수가 응할 수밖에 없게 하는 데 성공한다(48절). 이상과 같은 것이 대부분의 서술이다.

콘텍스트는 약간 다르지만 요한복음에만 전승된 라자로를 살리는 이야기는 이러한 상황을 잘 드러내고 있다. 마리아 자매의 오라비 라자로가 앓는다는 소식을 전달받은 예수는 이틀이 지난 후에야 길을 떠났다(요한 11, 6). 두 여인의 애걸과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의 슬픔이 마침내 그마저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예수께서 마리아도 울고 따라 온 유다 사람들도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충격을 받으시고 안타깝게 여기셔서 '그를 어디다 두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주님, 와 보십시오' 하고 그들이 대답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요한 11, 33~35). 이것은 분명히 그를 살려달라는 열망에 포위된 예수를 묘사한 것이다. 저들의 애절함이 없었던들 기적사건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혈루병자 치유 이야기(마르 5, 25~34)에서 예수는 자신의 참여에 의해서가 아니라 병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그 여인 자신의 열정과 신앙이 성취된 것이라고 말한다.

둘째, 병이 치유된 사람들에게 한 예수의 말에도 주목할 것이 있다.27)J. Blank, "Zur Christologie ausgewählter Wundergeschichte", in : Schriftauslegung in Theorie und Praxis, München, 1969, S. 104ff.; R. Pesch, a.a.O., S. 25. 예를 들어 자신이 그의 병을 고쳤다는 말 대신에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마르 5, 3410, 52; 루가 17, 19) 또는 "네 믿음대로 되리라"(마태 8, 13)고 하는 경우가 많다. 만일 우리가 이런 선언을 그가 자신의 고향 나자렛에서 저들이 믿지 않으므로 기적을 행할 수 없었다(마르 6, 5)는 말과 연결시켜 생각하면 기적행위는 예수의 능력을 시위하는 사건이 아니라 병든 민중과 예수의 만남에서 이루어진 사건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확실히 예수는 그 당시 흔히 있었던 마술사처럼28)스미스는 복음서들 자체에 예수가 마술사였다는 증거가 내포되어 있다고 지적한다(M. Smith, Jesus the Magician, p. 31ff.). 그가 증거로 들고 있는 것은 마태 12, 28; 마르 3, 20~30 등이다. 그러나 샌더스는 예수가 마술사의 특질을 지니지 않았으리라고 말함으로써 스미스의 가설을 뒤집는다(E. P. Sanders, Jesus and Judaism, Philadelphia, 1985, p. 168). 계획적으로 치유행각을 했거나 치유능력을 과시함으로써 자신의 권위(έςουσία)를 입증하려고 하지 않았다.29)불트만은 이런 시위가 기적사화의 주요동기였다고 말한다(R. Bultmann, Die Geschichte der synoptischen Tradition, S. 234/ 한역본 273면 이하).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네 믿음"(마르 5, 3410, 52, 이와 같은 성격의 표현으로 마르 1, 409, 24)이라는 말에서 '믿음'의 성격이다. 어느 한 곳도 이른바 그리스도론적 의미에서의 신앙을 말하고 있지 않다. 즉 그가 그리스도니까 병을 낫게 할 수 있다는 전제는 없다. 단지 그가 내 병을 고쳐줄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주요한데, 그것은 그를 만난 나 자신이 병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믿음과 유리되어 있지 않다.30)R. Bultmann, a.a.O., S. 234f./ 한역본 273면 이하.

양식사학파들은 기적이야기들을 그 안에 있는 예수의 말을 살리기 위한 틀(형식)로 보면서 제거해버리는데,31)불트만은 이런 의미에서 기적사화가 아포프테그마의 문체와 유사하다는 결론을 내렸다(R. Bultmann, a.a.O., S. 235/ 한역본 274면). 그 형식에서는 치유된 이후의 마지막 장면을 감탄문이라고 명명한다.32)R. Bultmann, a.a.O., S. 241/ 한역본 281면 이하. 그것이 병이 나은 것에 대한 시위장면이다. 그런데 바로 그 시위장면에서 예수를 찬양하는 곳은 단 한 곳 이외에는 없고33)가파르나움에서 귀신들린 자를 고친 다음에(마르 1, 27). 오히려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이 대부분이다(마르 2, 12/ 공관; 마태 15, 31; 루가 18, 43). 바로 이것이 치유사건에서의 주객도식 즉 예수가 민중을 낫게 했다는 도식은 사라지고 예수와 민중의 만남에 의해서 치유사건이 일어났다는 이해를 정당화 한다.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이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3. 주목되는 것은 예수가 병든 사람을 치유한 다음에 그들을 자기가 소속한 집 또는 마을로 가라고 명령하는데, 어떤 경우에는 예수를 따르고자 원하는 사람에게까지도 그렇게 하고 있다(마르 5, 19). 이것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한 것과 상반된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마르코복음에서만 이런 경우가 다섯 번 나온다. 나병환자를 치료한 예수는 그로 하여금 제사장에게 그 병이 나은 것을 확인하게 하는데 그것은 나병 때문에 소외된 그 사회로 돌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마르 1, 43). 한 중풍병자의 경우에도 중풍병을 치료한 다음에 일어나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고 한다(2, 11). 귀신들린 자를 치유한 다음에 그가 예수와 함께 가기를 애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집으로 즉 가족에게로 가라고 한다(5, 18~19). 혈루증 앓았던 여인에게도(5, 34), 베싸이다의 맹인에게도(8, 26) 마찬가지이다. 일본 성서학자 아라이(荒井 獻)는 이 이야기들이 가족(사회)으로의 귀환명령이라는 사실과 그 이야기들이 모두 비교적 초기에 형성된 것에 주목한다.34)荒井 獻, 앞의 책, 85면. 집을 떠나 헤매는 환자에게 집으로 돌아가려는 욕구 이상 간절한 것은 없을 것이다. 이것은 범죄자에게 단순한 복권 그 이상의 해방사건일 수밖에 없다. 게라사의 광인이야기(마르 5, 1~2)를 제외하면 그 어느 것에도 케리그마적 요소가 없는, 전형적인 민중적 단순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이런 시각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이상에서 나열된 병인 나병과 정신병은 비단 유다 사회에서만이 아니라 어느 사회에서도 거부되는 상징적 병이라는 점이다. 혈루증은 성전종교의 정결법에 저촉되기 때문에 역시 소외된다. 문둥병환자는 사람들에게 접근해서는 안 된다. 중풍병자라는 것은 절뚝발이와 같은 의미로 쓰인다. 동맥경화중에 걸린 사람은 손발을 잘 쓸 수 없다. 이것은 정결법의 측면에서 보거나 윤리적인 측면에서 보아 반드시 소외될 병이 아니다. 그러나 유다 사회에서는 다윗왕조 이래로 사회에서 소외되어 왔다.

그 중에서도 제일 흥미있는 것은 맹인의 경우이다. 유다 사회에서 맹인은 무능함의 상징이었기(신명 18; 이사 59, 9~12) 때문에 소경에 대한 보호법까지 설정되었다(레위 19, 14; 신명 27, 18).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괴한 것은 맹인들이 사제의 시각에서 정결법과 관련 됨으로써 소외되었다는 것이다. 왜 연민의 대상이 되어야 할 소경이 이렇게 소외되어야만 했을까. 이것은 어쩌면 다윗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변칙에서 온 것일 수 있다. 다윗이 여부스인들의 성인 예루살렘을 침공하려 할 때 여부스인들이 다윗을 멸시하여 "소경이나 절름발이도 너쯤은 쫓아낼 수 있다"고 했는데, 그는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후에 바로 이 모욕적인 말에 대한 복수로 소경과 절름발이를 소외시키도록 규제했다(삼하 5, 6~8). 그것이 후기 유다교에 와서 그들의 죄 때문에 하느님께 벌을 받은 것으로 규정하기에 이른다.35)Biller. II, S. 193. 이런 유다교의 시각에서 보면 위의 모든 병들이 그런 부류에 속한다.

사회에서 철저히 소외된 바로 이들을 제가 속했던 대로 복귀시키는 것은 그들에게 권리회복이며 해방운동이다. 그러나 민중운동의 차원에서 볼 때 이것은 단순히 옛 상태로 환원하는 사건에 머물 수 없다. 그들은 예수를 통해 해방의 경험을 한 것이다. 옛 모습을 다시 찾는 데 그친 것이 아니고 새로운 삶을 얻은 것이며, 그 새로운 삶은 민중운동의 일환 속에서 얻어진 것이다. 가령 나병환자의 경우를 보자. 예수는 치유된 그 사람에게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사람들에게 증거를 삼으라고 했는데, 그는 더 나아가 모든 이야기를 공개하고 널리 또한 멀리 퍼뜨렸기 때문에 예수가 그 동리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마르 1, 45). 이 나병환자는 이미 이전의 사람이 아니다. 그는 새 사실을 체험한 자로서 소명을 실천한다. 그것은 자신이 직접 예수중심의 민중운동을 일으켰거나 아니면 그가 치유된 사실 자체가 예수의 민중운동의 실세를 입증함으로써 그 동리 사람들이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서 예수를 거부하는 결과를 가져왔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가 그 동리로 들어갈 수 없었다는 말이 설명되지 않는다. 이것은 게라사에서 일어난 사건의 서술과 부합된다. 예수는 정상으로 돌아온 귀신들렸던 사람에게 하느님이 "네게 행하신 큰 일과 큰 자비를 이야기하라"(마르 5, 19)고 했지만 그는 더 나아가 예수가 자기에게 행한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두루 알렸다고 하는데(마르 5, 20), 이 사실과 그 동리 사람들이 예수를 배척한 것은 이러한 상상을 가능케한다(후론). 비록 그러한 후문의 언급이 없는 이야기들이라도 그것이 어떻게 운동으로 전개되었는지를 상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돌아가라고 한 예수의 명령은 민중운동의 확대의 일환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4. 귀신축출 이야기는 다른 치유이야기와 본질상 다르지 않으나 민중운동의 차원에서 볼 때 핵심적인 사실을 드러낸다. 유다 사회뿐 아니라 사회 일반에서 치유기적은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치유와 종말론을 연결시킨 것은 신약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36)G. Theissen, Urchritliche Wundergeschichten, S. 274~277. 그런데 이런 특성이 귀신축출(Exorcism) 이야기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귀신축출 자체도 예수에게만 고유한 것이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 무당들도 엑소시스트에 속한다. 그리고 유다교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다반사로 있으며, 신약에서도 예수만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도 예수 못지않게 기적을 행했는 데, 심지어 죽은 자를 살려 일으킨 이야기마저(사도 9, 36 이하) 자명한 듯이 전한다. 그러나 예수의 귀신축출은 민중 해방운동으로서의 하느님 나라운동과 직결되어 있다.

홀렌바흐는 복음서에 서술된 예수가 귀신축출에 자신의 사명의 초점을 둔 듯한 전거로서 다음의 사실들을 예거한다.37)P. W. Hollenbach, a.a.O., S. 582f. 첫째, 예수는 "내가 하느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들을 쫓아낸다고 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임한 것이다"(루가 11, 20)라고 말한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기적행위와 하느님 나라를 직접 연결시키고 있다. 둘째, 예수는 그의 공생애의 절정기에 제자를 파견할 때에 귀신(사탄, 악령)축출을 중심적 과제로 삼고 있다(마르 6, 7). 그런데 그가 제자를 선택할 때 그 목적이 귀신축출에만 있는 듯한 내용이 있다(마르 3, 15; 루가 9, 1). 셋째, 그는 그의 공생애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귀신 축출을 감행했으며, 바로 그 행위 때문에 유다 지도자들에게 비판의 표적이 된다(마르 3, 22~27). 넷째, 헤로데가 예수를 죽이려 했던 결정적 요인이 바로 그의 귀신축출 행위이며, 예수 자신도 그런 전제에서 대답한다(루가 13, 32).

그러나 현실적으로 예수는 귀신추방에만 전념하지는 않았다. 그의 행태를 성격화한다면 민중 속에서 민중과 더불어 민중으로 행위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귀신축출 이야기도 민중운동의 일환으로 볼 때 비로소 홀렌바흐의 시각이 정당해진다. 예수는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루가 10, 18). 그것은 낡은 에온(Eon)을 지배하는 주권이 무너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는 말이다.38)S. Hollenwieder, a.a.O., S. 197. 그것은 어떤 현실일까? 예수를 묵시적 상상력의 소유자로 처리해 버림으로써 그를 하나의 무위의 예언자로 이해하면 되는가? 아니, 예수의 행태는 민중운동이다. 그 행태의 구상화가 귀신축출로 첨예화된다. 예수는 사탄을 굴복시킴으로써 하느님의 주권의 도래를 입증하는 것이다.39)샌더스는 마태 12, 28을 지적하면서 예수가 귀신축출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온다고 생각했다고 확신할 수 없다고 한다(E. P. Sanders, a.a.O., p. 166). 그러면 예수를, 일개 정신병자를 치유함으로써 기존의 권력구조가 무너지리라고 보는 그런 망상가로 치부해도 되는가?

아니, 그는 민중운동의 일환으로 사탄이 굴복하는 사실을 중시한 것이다. 그가 제자들을 선정할 때 귀신축출을 목적으로 했다는 단순한 표현은 그들에게 낡은 주권과의 투쟁을 위한 능력을 주었다는 말이고, 그 운동의 일환으로 그를 따르는 자들을 파견한 것이다. 민중운동의 확산이다. 유다교에서 귀신축출은 일반적으로 정당한 행위로 인정되고 있는데 왜 예수의 귀신축출 행위는 용납될 수 없었을까? 예수가 일개 엑소시스트에 불과했다면 왜 헤로데 안티파스가 불안해했을까?(루가 9, 7~9) 그것은 그의 귀신축출 행위가 사회정치적으로 기존체제를 전복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40)P. W. Hollenbach, a.a.O., S. 583. 그런데 예수운동의 확산이 헤로데의 개입을 자극했다고 한 것은 옳으나, 그 예수운동이 '열두 제자의 선교'로 알려졌다고 말한 것은 홀렌바흐의 인식의 한계이다. 그렇다면 이 귀신축출은 민중운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귀신처럼 민중을 현혹한다고 하는 표현이 있는가 하면(마르 6, 14~16), 그를 체포하여 처형한 결정적 이유가 민중소요에 있었던 것처럼, 예수의 경우에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귀신들렸다는 것은 곧 정신병인데 그것은 사회적 긴장 속에서 심화된다. 가령 경제적 착취에 뿌리를 둔 계급간의 적대감, 전통사회가 이질문화에 의해 붕괴되어 감으로써 일어나는 갈등의 반영(홀렌바흐) 등을 생각할 수 있는데, 이러한 현상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는 바로 식민지 지배 하에 있는 사회에서 볼 수 있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정치적으로 돌파구를 찾지 못함으로써 일으키는 자기파괴적 행위 또는 억압자에 대한 분노가 극치에 이르고 있으나 정면대결할 무기를 갖지 못한 약자이기 때문에 위장되어 나타나는 저항행위 등일 수 있다. 거꾸로 식민지 세력이나 통치자가 민중봉기의 주동자들을 무력하게 하는 방법으로 귀신이 들렸다는 말과 소요분자라는 말을 혼용해 왔는데, 식민지 하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바로 이러한 술수를 역이용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41)F. Fanon, The Wretched of the Earth, New York, 1963, p. 250f. 한마디로 미친 척하는 것이다. 예수를 바엘세불이 들렸다고 비판하는 것은 바로 그가 민중에게 끼치는 영향을 희석시키려는 권모술수적 루머였을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가장 잘 표상하고 있는 것이 마르코복음 5장 1~20절의 게라사의 귀신들린 사람 이야기다.

TAG •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
텍스트를 수정한 후 아래 [수정요청] 버튼을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