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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여인에 대한 예수의 일반적 평가 : 복음서에서 주목되는 점은 그 내용이 짧은데 비해 예수와 여인의 관계가 자주 보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위에서 살펴본 그 당시의 사회풍토로 보아 예수가 여인과 관계했다는 사실은 결코 명예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오히려 그러한 전승들이 전승과정에서 많이 축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대표적인 예로 초기에 쓰여진 서간에는 예수를 따르던 단 한 사람의 여인의 이름도 거명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십자가사건과 부활의 목격자인 막달라 마리아를 위시한 여인들도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으며,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인이 행한 일을 전하라고 하던 그 여인의 이야기도(마르 14, 19)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서에는 예수가 여인과 접촉한 십여 차례의 경우가 전승되고 있는데, 그중의 일부는 예수와 남자들의 관계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이런 사실은 뒤에서 좀더 집중적으로 고찰할 것이다.

예수가 여인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삼은 예도 많다. 그런데 그것들이 예외없이 적극적이고 또 중요한 문제와의 관련에서 언급되고 있다. 몇 가지 예를 보자.

여기에 비정한 재판관(남자)과 한 과부(여자)가 있다(루가 18, 2~5). 남자는 지배층이고 여자는 피지배층이다. "사람도 하늘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말로써 남자의 완고한 의지와 위치가 이야기되고 있다. 이에 비해서 여인은 과부라는 신세가 말해주듯이 가난하고 외로우며 아무런 힘도 못 가진 사람이다. 이 여인은 억울하게 경제적인 수탈을 당했다.12)J. Blank, "Frauen in den Jesusüberlieferungen", in : Die Frau im Urchristentum, G. DautzenbergH. MerkleinK. Müller(hrsg.), FreiburgBaselWien, 1987, S. 65. 그런데 여기서 설정된 상황은 임박한 종말이다(J. Jeremias, Die Gleichnisse Jesu, Göttingen, 1962, S. 156). 그러므로 그것은 극한투쟁이다.

이 이야기는 이처럼 남녀를 대결시키고 있는데, 여인의 집요한 투쟁에 그 남자는 마침내 항복한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겼다는 표본이 된다. 그러나 적극적인 면에서 보면, 그 여인이 그 남자를 이김으로써 재판관으로 하여금 재판관이 되게 했다. 재판관이 재판관 되는 것으로 자기를 찾았다면, 이 여인은 그 남성에게 자신을 찾는 길을 열어준 셈이다.

여기 또 한 과부가 있다(마르 12, 41 이하). 이에 대해 돈 많은 부자 남자가 대조적으로 등장한다. 둘 다 하느님께 헌금을 한다. 이 과부가 바친 돈은 2렙톤에 불과하다.13)1렙톤은 1/100드라크마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그것은 하루 임금의 1/100로서 풀빵 1개를 살 수 있을 정도의 적은 돈이었다. 반면, 그 부자는 과부의 것보다 몇십 배, 몇백 배를 바칠 수 있었다. 물량적인 면에서 보면 이 남성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그러나 예수의 계산은 다르다. 그는 가진 것 전체와 헌금한 것의 거리를 비교하여 판정한다. 과부는가진 것 전체를 바친 데 반해 이 부자는가진 것 중에 극히 일부분을 바쳤다. 여인의 헌신적인 진실이 부자의 물량적 우위를 이긴 것이다.14)예수가 율법학자들에게 한 비판에서 과부의 집을 삼키는 자들(마르 12, 40)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 앞에 있는 것은 대조적이다. 당시 라삐들은 과부를 착취하는 경우가 많았다(R. Schnackenburg, Das Evangelium nach Markus Bd. II, Düsseldorf, 1971, S. 180).

여기 한 어머니가 있다(마르 7, 24~30). 그녀는 유다인이 아닌 헬라 여인인데 병든 딸을 구해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이 여인에 대한 예수의 반응에서 유다인과 이방인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담이 노출된다. 예수는 "자녀들을 먼저 배부르게 해야 한다. 자녀들의 떡을 집어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 27)고 대답한다. 그 요청에 대한 거절로서는 너무나 잔인한 말이다. 만일 이 말이 이방 선교를 변호하기 위한 후기 창작이 아니고15)페슈는 이 본문이 이방 선교에 관련된 상징적 이야기아지 역사적 사실일 리가 없다고 단정한다(R. Pesch, Das Markus Evangelium(HThK, II/ 1~2), Freiburg, 1976, Bd. I, S. 390). 한편 블란크는 이미 갈릴래아에서 이방 선교의 길이 열렸음을 전제하면서 이 이야기의 역사적 핵을 인정한다(J. Blank, a.a.O., S. 17). 타이센은 마르코복음 기자가 예수의 띠로 여행을 "이방 땅으로의 여행"으로 이해했다고 주장하면서도 예수의 이방 지역 여행은 유다인들이 살고 있던 지역의 여행에 지나지 않았다고 분석한다[G. Theissen, "Lokal und Sozialkolorit in der Geschichte der syrophönikischen Frau"(Mk 7, 24~30), a.a.O., S. 208f/ 한역본 825면]. 예수 자신이 실제로 한 말이라면 그 여인을 최대한으로 시험한 것이 된다. 그런데 그 여인은 "옳습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 있는 강아지들도 자녀들이 흘린 떡 부스러기는 주워 먹습니다"라고 응수한다(마르 7, 24~30). 여기에서 그 여인의 절실한 모성애와 더불어 그녀의 슬기로움이 과시된다. 이방인에 대한 도움문제를 둘러싼 강자(예수)와 약자(여인)의 대결에서 강자가 약자 앞에 굴복한다. 그것은 동시에 유다와 이방 사이에 막힌 담을 헌 것16)타이센은 유다와 이방 사이의 막힌 담이 도시와 농촌 사이에 존재했던 수취관계상의 모순을 반영한다고 분석한다. 이 점을 인정하면, "개에게 떡을 던져줄 수 없다"는 예수의 말은 시골지역의 유다인들이 도시지역의 헬레니스트들에 대해 품은 적대감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G. Theissen, a.a.O., S. 216/ 한역본 835면).이 남자인 예수가 아니라 약한 여인이었다는 말이 된다.

예수가 여인을 소재로 하는 경우 언제나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며, 부정적으로 이용하는 경우는 하나도 없다. 여인의 역할을 그토록 부정적으로 보는 유다교의 상황에서 볼 때 이 사실은 결코 가볍게 보아넘길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고 예수가 사람 모두를 긍정적으로만 본 것도 아니다. 불의한 상을 그릴 때 남성을 내세우는 예는 얼마든지 있다.17)악한 종(마르 12, 1~7; 마태 25, 14~30), 악덕부자(루가 16, 19~31), 어리석은 부자(루가 12, 13~21), 음모자(마르 14, 1). 남성인 제자들의 무지와 잘못을 책망하는 것은 여러 장면에서 볼 수 있지만 여인들을 책망하는 경우는 단 한 군데도 없다. 이것은 예수의 민중 일반에 대한 태도와 꼭 같다.

이와 관련지어 주목할 것은 유다의 종교직 모범자들과 대립되는 세리와 더불어 창기들이 하늘나라에 먼저 들어가고 있다는 말이다(마태 21, 31).18)로마이어와 슈마우흐는 이 구절이 종말의 날에 일어날 대전환을 말한다고 보고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는 예수의 어법이 이를 뒷받침한다고 본다(LohmeyerSchmauch, Das Evangelium nach Matthäus, S. 308).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세리와 창기가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있다"는 어구의 현재시제형과 충돌한다. 슈바이처는 이 구절이 예수 자신에게서 기인했다고 본다(E. Schweitzer, a.a.O., S. 267/ 한역본 432면). 슈바이처는 이 어구의 현재시제형에 주목하면서 이것은 지금 하느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자에 대한 심판이요, 실천을 촉구하는 급박한 요구라고 본다(a.a.O., S. 269/ 한역본 435면). 큄멜은 종말론적인 하느님의 백성이 믿지 않는 유다인을 대신한다는 식으로 이 구절을 해석한다(FeineBohmKümmel, a.a.O., S. 68). 복음서에서 예수와 창기의 관계는 구체적으로 보도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가 창기와 같은 여인들에게 더 큰 관심을 가졌음은 물론이고 오히려 그들에게 참된 미래를 기대했을 수 있다. 다음 말의 맥락은 그런 상상을 가능케 한다. 한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포도원 일을 하도록 지시했을 때 동의했던 아들은 가지 않고 오히려 이를 거부했던 아들이 그 뜻을 실행했다(마태 21, 28~31)고 하면서 그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실천했느냐고 묻고 그 맥락에 이 이야기를 연결시켰다. 그것은 이른바 '모범적'인 계층과 '거역자'를 대조시키면서 세상에서 판단하는 것과 달리 창기가(세리와 더불어) 참을 실천하고 있으므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또 그토록 심하게 정결법을 주장하는 사회였는데도 그런 시각에서 여인을 경원하는 예수의 태도는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부정한 죄로 인해 정죄받았다고 하는 혈루증 앓는 여인19)"이런 상태의 여인이 가까이 오면 발효 전의 과즙은 시어지고 정원의 나무는 시들며…… 심지어 쇠까지도 녹이 슬고 공기에서도 불쾌한 냄새가 난다"(Plinius d. Ä, Nat. Hist., VII, 64; XXIII, 23). 이것은 그 당시 유행하던 혈루증 환자에 대한 미신이다.)에게 "딸아"라고 부르며 "편안히 돌아가라"고 한 것은 아주 다정한 관계를 표시한 것으로 예수의 자세가 잘 드러난다(마르 5, 34).

예수의 언어가 농경사회의 언어임은 모두 인정하고 있다.20)M. Dibelius, Theologische Literaturzeitung, 52(1928), S. 529; J. Jeremias, Die Gleichnisse Jesu, 3. 그런데 그중에서도 주목되는 것은 예수가 여성의 언어 또는 여성과 관련된 언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떡, 식탁, 소금, 맷돌, 누룩, 옷 깁기, 물동이,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 잔치, 유방 또는 젖, 태, 품 등. 그런데 이 언어들이 쓰인 맥락을 보면21)그 맥락은 아래에서 자연히 드러날 것이다. 모두 중요한 주제에서 사용된 것이다. 떡은 식탁, 나눔, 잔치, 결혼식 등과 결부된 것으로 공동체와 깊은 관계가 있으며, 그것은 하느님 나라 비유에 연결된다. 가령 잔치라고 하면 우리는 거기에 참여하는 손님을 생각하기 쉬우나 잔치에 필요한 모든 것을 장만하는 이는 사실상 여인들이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생각하는 데 떡가루 속에 누룩을 집어넣는 노동하는 여인의 현장을 연상하였을 수도 있으며(마태 13, 33), 떡 만드는 여인을 주목하면서 그 여인의 손에 의해 가루 속에 섞여진 누룩의 역할을 보고 하느님 나라를 생각했을 수도 있다. 누룩을 넣고 떡가루를 반죽하는 여인에게서 하느님 나라 건설에 참여하는 전형적인 인간상을 보았을 수 있다.

예수는 심판과의 관계에서도 여인들의 세계를 연상하였다. 소금은 일상생활에서 여인들의 전용물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소금이 맛을 잃으면 결국 쓸데없는 것이 되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것(심판)이라 한다(마태 5, 13). 또 심판날에 맷돌을 가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데려갈 것(마태 24, 41)이라 했는데 맷돌을 가는 것은 여인들이다. 이 경우에도 예수는 맷돌 가는 여인들을 주목함으로써 심판의 그날을 연상했을 수 있다. 그것은 여인의 행위를 주시한 발로일 수 있다.

심판을 경고하는 예수의 말 가운데 여인들의 운명을 걱정하는 말이 여러 번 나오는 데서 그것을 볼 수 있다. "그날에 아이 밴 여인들과 젖 먹이는 여인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마르 12, 17). "보라, 그 날이 정녕 올 터인데 그날에는 사람들이 아기 배지 못하는 여인과 아기 낳아보지 못한 태와 젖 먹여보지 못한 유방이 행복하다할 것이다"(루가 23, 29). 이와 관련해서 수난의 도상에 있는 예수가 그 여인들을 위해 한 말인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루가 23, 28)고 한 것도 이 범주에 속한다. 생베조각으로 낡은 옷을 기위서는 안 된다는 말(마르 2, 21)도 심판과 관련이 있다. 즉 낡은 것과 새것은 분명히 갈라놓아야 한다는 맥락에서 씌어진 것이다. 끝으로 주목할 것은 예수가 예루살렘을 보면서 "암닭이 병아리를 모아 날개 아래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자녀를 모으려 했던가"(루가 13, 24)22)"병아리들"에 해당하는 νοσσία는 "한배에서 난 병아리들"을 뜻하기도 하고 "둥우리"를 뜻하기도 한다. 이 구절은 어미새(όρνις 또는 όρνιξ[B.D. 47])가 둥우리 속에 있는 새끼새들을 보호하기 위해 품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다(I. H. Marshall, Lk, II, 해당부분 참조 / 한역본 268면).라고 한 말이다. 이는 예수의 심정을 토로한 것인가?23)이 구절은 예수 자신에게서 기원했다고 보는 것이 좋다(I. H. Marshall, Lk, II, 해당부분 참조 / 한역본 266면).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진실한 사랑을 여성의 품으로 상징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예루살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말한 것일 수도 있다. 예레미야 22장 5절에 근거해보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품! 그것은 생명을 보호하며 양육하는 창조적인 사랑의 전형적인 상징이다.

이상의 관찰이 물론 여성에게만 해당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남성과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주제와 연결해서 사용된 남성적 언어가 얼마든지 있다. 씨 뿌리는 행위(비록 남성만의 전유행위는 아니지만), 밭 가는 일, 포도원 재배, 건축, 고기를 낚는 일 등등이 그런 것이다. 단지 명기할 것은 예수의 세계가 결코 남성의 독무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새 술은 새 부대라고 하는 것이 남성적 표현이라면 그와 곧 병행해서 낡은 옷을 새 조각으로 기우면 안 된다는 여성적인 표현으로 대비시킨다. 두 남자가 밭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는 말(마태 24, 40)과 더불어 맷돌을 가는 두 여인의 이야기를 나란히 든다(마태 24, 41). 또 잃은 양을 찾아 기뻐하는 목동(남성)의 이야기와 잃었던 은전을 찾아 기뻐하는 여인의 이야기를 나란히 병행시킨다(루가 15, 1~10).

끝으로 이상의 사실들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예수의 입장을 보자. 이미 우리는 위에서 두 가지 창조설화에 대해 언급했다. 사제자료(P)와 야위스트자료(J)가 그것이다. 예수는 어느 편에 섰는가? 이혼이 남성 마음대로 가능한 남성 위주의 유다 사회 지도계층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는 먼저 모세의 계명을 묻는다(마르 10, 2~3). 모세의 계명은 이혼증서를 써 주면 된다고 했다는 대답(마르 10, 4)에 대해 예수는 준엄하게 저들을 비판한다. "너희가 완악하기 때문에 너희에게 이 법을 제정해준 것이다"(마르 10, 5). 이 "너희"는 물론 남성이다. 저들은 필요하면 언제든지 이혼할 권한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모세의 법(신명 24, 1)에 허락되어 있다.24)신명기 24, 1에 대한 힐렐학파의 해석에 따르면, 부인이 간음했거나 무엇인가 남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남편이 부인과 이혼할 자격을 갖게 된다고 한다(J. Jeremias, Jerusalem., S. 407/ 한역본 463면). 그런데 이 사실 자체가 바로 남성 둘의 완악성(σκλεοκαρδίαν)을 폭로 하는 이상의 아무 의미도 없다고 하면서 모세의 법도 상대화하고 만다(마르 10, 6). 그런 다음 예수는 바로 사제자료의 입장에 서서 "하느님께서는 창세 때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고(10, 7) 선언하고 "둘이 한몸이 되는"(10, 8)25)"한몸"(μία σάρξ)은 단순히 성교를 전제한 말이라기보다 파괴되지 않는 생명의 공동성을 말한다는 루이제 쇼트로프의 통찰은 날카롭다(L. Schottroff, a.a.O., S. 104). 결혼은 바로 이 동등한 인격을 하느님이 짝지어주셨기 때문이므로 사람은 이혼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한다(10, 9).26)L. 쇼트로프에 따르면, 이 구절은 하느님과 예수의 이름으로 결혼의 유지를 강요하는 이혼금지의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혼장도 이혼당한 아내에게 경제적 미래의 전망을 확보해주고 새로운 결혼의 권리를 보증하는 실제적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이 말하는 이혼금지는 한몸을 이루는 공동체성의 회복, 곧 창조의 새 회복이라는 의미로 읽어야 한다고 본다(L. Schottroff, a.a.O., S. 105). 그러나 쇼트로프는 모세의 법을 상대화시키는 것이 그 당시의 율법체제와 관련해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를 간과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남녀의 종속관계를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여성에 대한 남성의 방종을 신랄하게 비판할 뿐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한 모세의 법까지 상대화해버린다.

그러한 그의 의지는 그 다음에 나오는 이혼문제에서 되풀이된다. 그것은 남자나 여자 모두 결혼과 이혼에 대한 권리와 의무가 똑같다는 것이다(10, 11). 여인은 생식기능을 담당하는 존재이기 전에 남자와 똑같이 창조된 존재이다. 따라서 여인은 결코 남성의 단순한 음욕의 대상이 될 수 없다(마태 5, 27 이하). 여인을 음욕의 대상으로 보는 것을 금하는 말에 이어 "네 오른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뻬어 버리라"(마태 5, 29)는 등의 극단적인 말이 뒤따르는 것은 가볍게 처리해서는 안 될 점이다.

 

여인과 제자직―예수와 여인의 관계 : 위에서 본 대로 여인들에 대한 예수의 관심은 컸으며, 그와 많은 여인들 간에 교류가 있었음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여성들의 입장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바대로, 예수의 이야기에도 남성들이 표면에 나서고 여성들은 주역이 아닌 것처럼 서술되어 있는데, 그것이 당시 여성들의 실상을 나타내는 것인지 아니면 남성 위주의 시대상을 전제한 복음서 기자들에 의한 서술 때문인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첫째로 문제가 되는 것은 예수가 여인들을 제자로 삼았느냐 하는 점이다.

복음서에는 예수가 열두 제자를 선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것은 몽땅 남성들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제자의 반열에서 여인을 배제했던 것일까? 이런 물음에 앞서서 정리해야 할 것이 있다. 이른바 열두 제자 제도가 역사적인 사실인가하는 것이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분명히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한다. 그럼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의 대표성을 내세우는 것이다.27)그닐카에 따르면, 예수시대의 이스라엘은 두 지파 내지 두 지파 반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의 제자들의 수효를 가리키는 '열둘'이라는 숫자는 종말론적으로 회복되어야 할 이스라엘을 상징한다고 본다(J. Gnilka, Mk, II, S. 139/ 한역본 179면). 그런데 예수에게 실제로 그런 의식이 있었을까?28)이 문제는 제자임명이 부활절 이전에 있었는가, 그 이후에 있었는가와 관련된 복잡한 논의와 관련되어 있다. 그닐카는 부활절 이전설을 지지하는 데 반해(J. Gnilka, Mk, II, S. 142/ 한역본 182면), 마샬은 부활절 이후설을 지지한다(I. H. Marshall, Lk, II, 해당부분 참조/ 한역본 311면). 필하우어는 "열 둘"이라는 숫자를 제베대오의 아들들의 처형과 아그리빠 1세의 박해로 인한 베드로의 도피 때문에 사라진 부활절 이후 공동체와 연결시킨다(P. Vielhauer, Aufsätze zum neuen Testament, TB, 31, 1965, S. 68). 저들에게 그와 같이 막중한 역할을 기대한 것이라면 저들의 행동이 뚜렷이 부각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에는 제자들의 이름조차도 일치되어 있지 않으며29)제자들의 명단은 마르 3, 16~19; 마태 10, 2~4; 루가 6, 14~16 : 사도 1, 13에 나온다. 이 명단들은 대체로 일치하지만 차이점도 있다. 마르코와 루가의 명단을 비교해보면, 루가에는 타대오 대신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나온다. 마르코와 마태오를 비교해보면, 마르코가 말하는 열혈당원 시몬은 가나안 사람 시몬으로 바뀌어 있다.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 등 세 사람 이외에는 사실상 제자들의 역할이라고 할 만 한 것이 뚜렷이 없다. 따라서 여인들이 열두 사도라는 선택된 범주에 속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놓고 실질적인 남성 우위성이 드러났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심으로 등장하는 세 제자들의 역할은 무시할 수 없는데, 거기에 여인들이 끼이지 못했다는 것은 현실이다. 이것은 여인들이 대표성을 갖고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면 여인들은 단순히 예수의 뒷바라지나 했으며 제자의 반열에는 속하지 못했다는 말인가? 예수와 여인의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처럼 단순히 섬기는 관계이며, 정신적인 유대나 사명과는 무관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먼저 섬긴다는 말의 의미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 루가복음 8장 1~8절에서 예수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복음을 전하는 데 열두 제자들이 동행했다고 하고, 그 일행에는 여러 여인들이 참여했는데 저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으로 예수 일행을 "섬겼다"고 한다(3절). 먼저 주목할 것은 여러 여인들이 예수와 동행했다는 사실 자체이다. 이것은 라삐전통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섬겼다는 말인 디에코노운(διηκόνουν)은 우리가 보통 집사라고 번역하는 디아코노스와 어간이 같다. 이 디아코노스는 사도행전에 비로소 나오는데, 저들은 사회봉사를 분담할 사람을 디아코노스라고 명명했다(사도 6, 1~6). 현실적으로 그 여인들은 모두 사도와 똑같이 복음선교의 전선에 나섰다. 마르코는 십자가 처형장에 있었던 여인들은 예수가 갈릴래아에 있을 때부터 따르며 시중들던 여인들이라고 한다(마르 15, 41). 시중든다는 말은 루가에서와 마찬가지로 디아코에노운이다. 또 주목할 것은 "따르며"라는 말이 병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루가복음 8장에는 따른다는 말은 없으나 여인들이 실제로 열두 제자와 같이 예수를 따랐고, 그들이 갖고 있는 재산으로 예수를 섬겼으므로 내용상 제자로 볼 수 있다. 또 이와 관련해 주목할 것은 예수가 세상에 온 목적은 섬기기 위함이라고 했는데(마르 10, 45 / 병행), 이때 쓰이는 말도 똑같은 단어 디아코네오(διακονέω)이다. 이처럼 예수는 제자들에게도 바로 "섬기는 일"을 요구하고 있다.30)섬김과 따름에 관해서는 L. Schottroff, "Maria Magdalena und die Frauen am Grabe Jesu", EvTh, 1982(41Jrg, Heft 1), S. 10ff.; L. Schottroff, a.a.O., S. 107ff.

이상에서 보는 것처럼 남성에 비해 여인들은 제자들이 아니며 단순히 그들의 뒷바라지나 하고 있다는 사고는 예수운동과는 맞지 않는다. 남성들이 대표자로 표면에 나섰다는 것은 단지 당시의 시대적 풍습하에 놓인 여인들의 자세에서 온,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가부장제도와 여인 : 다음에 물을 것은 예수가 가부장제도를 전제했는가 하는 점이다. 이미 말한 대로 만일 그랬다면 제도적으로 남녀차별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시대가 가부장적 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러한 틀 안에서 여인들의 위상을 규정하고 있는 것은 한 군데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거의 같은 시대 사람인 바울로는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며,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라고 결정적인 주종관계를 말하고 있는데(고전 11, 3), 예수에게서는 그런 사고를 상상조차할 수 없다. 예수는 여러 여인과 관계한 그 어느 곳에서도 여인을 가부장제도, 구체적으로 남편에게 예속된 존재로 대한 흔적이 전혀 없으며 자주적인 존재로 여인을 대할 뿐이다.31)사실 예수의 민중은 가부장적인 가족생활을 영위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난했기 때문이다(L. Schottroff, "Frauen in der Nachfolge Jesu", a.a.O., S. 103, 106f.).

오히려 예수에게는 가부장적인 제도와 충돌되는 행위와 말들이 있다. 이미 지적한 대로 예수는 이혼을 반대하는 근거로 "하느님께서 창세 때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사람(남자)은 그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몸이 되는 것이다. 이제는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어서는 안 된다"(마르 10, 6~8)고 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남자가 부모를 떠난다는 것과 둘이 한몸이 된다는 것이다. 그 어디에도 가부장제도나 남성우위를 인정한 데가 없다. 오히려 이어서 "누구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그는 그 여자와 간음을 행하는 것이요, 또 아내가 자기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면 그 여인은 간음을 행하는 것이다"(마르 10, 11~12)라는 말로 남녀의 동등권 행사를 주장했을 뿐 아니라, 당시의 일부다처제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예수에게서는 가부장적 사회구조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권위를 거부하는 발언도 볼 수 있다. 당시 체제의 이론적 수호자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를 공격한 말 속에는(마태 23, 1 이하) 그러한 예수의 의도가 역력히 보인다. 저들은 무거운 짐을 남에게 지우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며 사람들이 '선생'이라 불러주기를 좋아한다고 신랄히 비판한 다음 "너희는 모두 형제이다. 또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 아버지 한 분뿐이시다. 또 너희는 지도자라는 칭호도 듣지 마라. 너희의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마태 23, 8~9)라고 말한다.

동양의 봉건사회 윤리에서는 군사부일체라는 관념이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 예수의 말 속에는 바로 그런 체제가 거부되고 있다. 여기에는 새로운 공동체에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형제(8절 후반)라는 대전제가 있다. 하늘 아버지, 그리스도만이 주권자라는 전제가 권위주의에 의해서 유지되는 가부장제도를 파괴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는 파격적인 말이 가능한 것이다. 이런 전제에서 보면 예수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위성을 인정했을 리가 없다.

복음서 기자들마저도 남성에 비해서 아이와 여인을 구별하여 제외했다(마르 6, 44; 마태 14, 21).32)마르코와 루가에는 단순히 "남자가" 5천 명이라고 했는 데 반해(우리말 성서 새번역의 "남자만"은 잘못된 것이다), 마태오는 "여자와 어린이를 제외하고"를 첨가한다(마태 14, 21). 그것은 유다교 전통을 탈피 못한 찌꺼기다. 토라에 대한 지식과 그것에 대한 실천이 인간성을 측정하는 기준인데,33)W. Bousset, a.a.O., S. 187. 저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취급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궤변이 이를 뒷받침했던 것이다.34)어린아이를 데려와서 예수가 위의 말을 한 것을 놓고 학자들은 아포프테그마적 성격이라고 규정하는데(R. Bultmann, Die Geschichte der synoptischen Tradition, S. 70/ 한역본 77면; J. Gnilka, Mk, II, S. 56/ 한역본 78면), 이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런데 예수는 "누구든지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영접하는 것이 나를 영접한 것이다"(루가 9, 37)라고 함으로써 자신과 어린이를 일치시킨다. 권위주의를 철저히 배제한다. 그런데 마태오는 "너희가 마음을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18, 3)라고 해석하며,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람 만이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다"라고 한다(마태 18, 4). 또 사람들이(아마도 어머니들이었을 것이다) 어린이를 데리고 와서 축복해주기를 바라는 것을 꾸짖는 제자들을 본 예수는 도리어 노하여 제자들을 꾸짖으며 선언한다. "……하느님 나라는 이런 어린이들의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의 심정으로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르 10, 15). 어른(남자/권위)의 위치에서가 아니라 어린이의 위치에서 새로운 세계의 질서를 천명하는 중요한 말이다. 이런 세계에서는 가부장적 권위주의가 성립될 수 없다.

마침내 예수는 남성 위주의 가족제도에 대한 폭탄선언을 한다. 위에서 말한대로 유다사회에서 여인은 재산목록의 하나이며, 그 중요한 임무는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과 그 집안의 혈통을 이어주는 것이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녀가 없이 남편이 죽으면 그 대를 잇기 위해 그 남편의 형제들과 관계해서라도 자손을 낳아주어야 했다. 그런데 어떤 예수의 반대자가, 일곱 형제가 차례로 한 여인을 그런 결혼풍습에 따라 아내로 삼았는데 그 형제들이 부활하면 그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질문을 한다(마르 12, 9~23). 이에 대해서 예수는 "사람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이 되는 것이다"(12, 25)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말 바로 앞에는 "너희는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권능도 모르기 때문이다"(12, 24)라는, 묻는 자에 대한 분노 섞인 책망이 있다. 그것은 바로 여인을 결혼이라는 합법적인 제도를 통해 단순히 혈통을 잇는 도구로 삼는 것을 자명한 것으로 아는 가부장제도에 대한 분노가 아니겠는가!35)예수의 이 선언을 그 시대의 가부장제와 연결시키지 않고, 26~27절의 부활에 대한 언급에 비추어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 단화에서 전승의 핵심이 되는 것은 18~25절이고, 이것은 다시 예수의 활동에 대한 역사적 회상에 터 잡은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Lohmeyer, Das Evangelium nach Markus, KEK, I /2, 1963, S. 257). 새 세계에서 결혼이라는 것은 없다는 선언은 가부장제도에 대한 전면적 부정을 내포한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 나라 자체에 대한 서술이기 전에 현체제 아래서 신음하는 자를 해방해야 한다는 의지의 표명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해방의 대상은 말할 것도 없이 여인들이다. "하늘에 있는 천사와 같이 되리라"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 구절에서, 천사는 결혼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성격화한 데는 없다.36)천사는 결혼하지 않는다는 것이 유다교의 관념이다(J. Gnilka, Mk, II, S. 159/ 한역본 213면). 이것은 남에게 굴종하거나 예속되지 않는 존엄한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예수가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과 누이가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누가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냐? 보라 여기 내 어머니와 형제들이 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마르 3, 33~35)라고 선언한다.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두 번이나 비슷한 말을 반복하는 데서 언제나 아버지가 빠졌다는 사실이다. 물론 예수를 찾아온 이들 중에 아버지가 없었기에 언급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 그들이 바로 민중인데, 저들이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말하면서도 아버지라는 말은 뺐다.37)어떤 이들은 마르 10, 30에도 아버지가 빠져 있음을 지적한다. 예수의 가정에는 아버지가 전제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요셉은 일반적인 추측대로 일찍 죽었을지도 모른다. 바로 이것이 예수가 가부장제도를 전제하지 않게 된 이유 중의 하나일 수도 있다.38)H.Wolff, Jesus der Mann. Die Gestalt Jesu in Tiefenpsychologischer Sicht, 1977, S. 30f. 볼프는 심층심리학적 입장에서 가부장제도의 성립근거를 다음과 같이 설정한다. 첫째 종교적 편견에서 오는 여성 멸시, 둘째 남자에 대한 여성의 능력상, 인간성에서의 열등성, 셋째 성적 감수성이 강하기 때문에 육정이 강한 점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그 어느 곳에서도 여인을 이렇게 평가하거나 취급한 일이 없으며, 이러한 예수의 행태는 그가 가부장적 질서를 인정하지 않은 증거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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