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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예수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다닐 때 열두 제자와 더불어 많은 여인들이 동행했다는 보도는 루가의 특수자료이다(루가 8, 2~3). 그런데 그들은 특별히 병을 앓다가 고침을 받은 여인들이라고 하면서 그 이름들을 나열했다. 맨 처음에 거명된 것이 저 유명한 막달라 마리아이며, 그 다음이 헤로데의 시종 쿠자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라는 여인이다. 그리고 "그밖의 여러 다른 여인"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상당수의 여인들이 예수를 에워싸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자기네가 가진 것(재산)으로 예수를 섬겼다는 표현이나 헤로데의 시종의 아내가 끼여 있다는 이유 등으로 저들을 반드시 가진 자 또는 상류층의 여인들이라고 볼 필요는 없다.39)예수시대 이후 그레꼬 로마 사회에서는 여성의 경제권이 어느 정도 인정되었다(K. Thraede, "Frau", in : RAC, VIII, 1972, S. 229f). 그러므로 여인들의 경제적 지원은 헬레니즘 사회를 전제한 루가의 서술일 것이다(L. Schottroff, "Frauen in der Nachfolge Jesu", a.a.O., S. 101). 그렇게 볼 때 저들은 열두 제자와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 말은 예수의 주변에 많은 여인들이 있었다는 종합적인 보도로서 중요한 자료가 된다.

맨 처음에 씌어진 마르코복음에는 그런 내용의 종합적 보도가 없다. 그러나 다른 맥락에서 진술한 보도는 이와 관련된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마르코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 그의 운명을 지켜 본 여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또 여인들도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젊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리고 살로메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 따르며 시중들던 여인들입니다. 그 밖에도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많은 여인이 있었습니다(마르 15, 40~41).

이 보도에서 주목할 것은, 첫째 저들이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를 따르며 시중들었다는 것이며, 둘째 저들이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까지 예수와 동행했다는 것이고, 셋째 그 수가 많았다는 것인데40)이렇게 많은 여인들이 갈릴래아로부터 예루살렘까지 예수를 동행하였다면, 그것은 그 당시 사회체제에서 가히 여성해방대열이라고 할 만하다. 무엇 보다 중요한 것은 저들이 죽음의 위험을 무릅썼다는 사실이다.41)티베리우스 황제시대에는 십자가에 처형된 사람을 애도하기만 해도 공범자로 처벌당했다(L. Schottroff, "Maria Magdalena", a.a.O., S. 5). 이것은 루가의 보도와 상응된다. 루가 자신도 마르코의 내용에 따라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를 따라다니던 여인들이 예수의 운명을 지켜보았다고 한다(23, 49b). 단, 그들만이 아니고 "예수를 아는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라는 말을 첨가함으로써 그 여인들의 행위를 상대화하고 있으며, 그중에 여인들의 이름을 예거하지 않고 있는 것이 마르코와 다른 점이다. 루가에는 예수가 처형장으로 향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는데 그중에는 여인들도 있었다고 하고, 그 여인들은 예수를 위해 슬퍼하며 통곡했다고 한다(루가 23, 27). 십자가처형을 지켜보던 여인들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의 뒤를 따랐을 것이므로 이 구절은 신빙성이 있는 보도이다. 그러나 루가는 여인들을 말하기 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다는 전제를 붙이는데, 이는 십자가를 쳐다보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과 꼭 같은 루가적인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여인들만이 그 뒤를 따랐다는 것은 루가의 보도 자체에서도 반영되고 있다. 그것은 28절에서 예수가 여인들을 돌아보면서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요한복음마저도 십자가처형을 지켜보고 있던 여인들을 언급하고 있다(요한 19, 25).42)단, 여기에는 여인들이 중심에 있지 않고 예수의 어머니를 위해 부탁하는 것이 그 중심이다. 따라서 마지막까지 예수를 따른 이는 여인들뿐이었다는 마르코의 서술은 믿을 만한 전승이다. 그렇다면 평소에 예수는 많은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음에 틀림없다. 루가는 예수를 따르며 섬기던 여인들이 예수로부터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했는데, 사실상 예수의 치유이야기 가운데는 여인을 치유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 마르코는 예수가 맨 처음 치유한 사람이 베드로의 장모라고 보도하고 있다(마르 1, 30~31).

그런데 예수와 여인의 관계에서 우리가 관심을 집중하려는 것은 그것이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가령 예수와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의 관계는 더욱 뚜렷이 전해지고 있다. 예수는 어부인 베드로를 위시한 두 형제를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 불러냈다(마르 1, 16~17). 예수는 열두 제자들 가운데 특히 세 사람을 핵심인물처럼 거느렸다. 그런 과정에서 특히 베드로의 성격과 그것에 관련된 예수의 관계가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예수와 제자들 사이에 주고받은 이야기의 내용, 예수가 한 말씀에 대해 설명을 요구함으로써 그들의 무지를 폭로하여 곧잘 책망을 받았던 점43)제자들을 비판한 예들은 마르 4, 408, 3310, 33에 나온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를 배신하고 도망치는 장면44)예수를 판 자도 그를 부인한 자도 남자들이다. 등이 그런 것이다. 그중에 특히 저들이 예수를 이해하는 수준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가령 마르코복음 8장에서 예수가 수난을 예고 했을 때 제자를 대표하는 베드로의 몰이해가 예수의 분노를 사서 "사탄아, 물러가라"는 극단적인 책망을 듣기에 이른다(마르 8, 33).

그러나 자주 거론되는 여인들에 대해서는 그 관계를 거의 알 길이 없다. 십자가에서의 최후를 지켜본 그 여인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예수를 만났는지 일체 알 길이 없다. 다만 루가에서 그중의 한 사람인 막달라 마리아가 심한 정신병환자로 예수에게 치유받았던 것이 예수를 따른 계기처럼 이야기되고 있다(8, 2). 또한 예수와 여인들 사이에 나눈 대화의 장면도 없다. 루가복음에 나오는 예수가 마르타(루가 10, 40) 그리고 시로페니키아 여인과 제한된 상황에서 나눈 대화(마르 7, 28; 마태 15, 25~27)를 빼면45)요한복음에 나오는 대화장면들은 여기서 일단 제외한다. 그 어디에도 저들의 생각을 파악할 만한 일체의 대화가 없다.46)마르타의 예수에 대한 "주님은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제가 믿습니다"(요한11, 27)라는 고백이 주목되기도한다. 보른캄은 이 구절이 세례고백문이라고 본다(G. Bornkamm, Gesammelte Aufsätze, II, 1970, S. 192). 이것은 역사의 예수와 연결된다기보다 상당히 진전된 공동체의 신앙고백으로 보는 것이 옳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로는 그들이 생각하는 바를 알 길이 없다. 더욱이 그들이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고백하는 말은 전혀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저들은 단지 예수에 대해서 수동적인 한 객체에 불과했는가? 만일 그것뿐이라면 예수가 그들에게 무엇을 베풀었는가 하는 것을 보는 것으로 끝 난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아래에서 구체적인 경우들을 집중적으로 살펴보자.

 

이름없는 여인47)L. Schottroff, "Frauen in der Nachfolge Jesu", a.a.O., S. 128f. 쇼트로프는 이 이야기에서 가난한 자에 대한 입장이 마르코적이라고 보고 이를 예수시대로 돌릴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너무 단순한 처리다. : 우선 예수에 의해서 결정적으로 인정을 받은 기름 부은 여인 이야기부터 보자. 이 이야기는 네 복음서에 전부 실려 있다(마르 14, 3~9; 마태 26, 6~13; 루가 7, 36~50; 요한 12, 1~8). 마르코가 전한 이 익명의 여인 이야기는 이렇다. 장소는 베다니아에 있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고, 때는 예수가 식사할 때이다. 한 여인이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를 담은 옥합을 깨뜨리고 그것을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마르 14, 3). 이에 같이 있던 몇 사람이 300데나리온에 해당하는 향유를 낭비한다고 항의한다(마르 14, 4~5). 이에 대해 예수는 "가만 두어라, 왜 그를 괴롭히느냐? 그가 내게 한 일은 아름답다…… 이 여인은 자기 힘껏 했다. 곧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한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계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여인이 한 일도 전해져서 이 여인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마르 14, 6~9).48)이 이야기의 어투는 셈어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유다적 분위기를 잘 드러낸다. 이 이야기의 역사성을 의심할 타당한 근거가 없다(R. Schnackenburg, a.a.O., II, S. 229; J. Gnilka, Mk, II, S. 221/ 한역본 289면을 참조).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그리스도론적 케리그마를 읽어내려는 해석들은 역사적 현실로부터 이탈하고 만다. 이 이야기를 일단 루가복음을 뺀 나머지 두 복음서와 비교하면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 ① 이 이야기가 수난사의 서장이 되었다는 점, ② 일상성을 파괴하며(그 값진 기름을 쏟아붓는 것과 그 행위에 항의하는 데 대한 예수의 옹호가 그렇다), ③ 이 행위에 대한 비판자가 등장하고, ④ 여인은 끝끝내 말이 없으며, ⑤ 예수는 이 행위를 옹호하고, ⑥ 그 여인이 한 행동의 의미를 대변해주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상은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들이 세 복음서에서 공통됨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서 루가복음에서도 같은 점은 그 여인이 비싼 옥합을 깨고 기름을 부었다는 사실과 그 여인은 행동할 뿐 말이 없다는 사실이다(루가 7, 37~38). 그러나 가장 중요한 차이는 루가에서 이 이야기의 맥락은 수난사가 아니며 그녀가 기름 부은 것은 죄 사함을 받은 데 대한 감사의 표시라고 함으로써 이 여인을 죄인으로 규정한 점이다(루가 7, 37). 그런데 다른 복음서들은 여인이 기름을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고 하는 데 비해서 루가복음과 요한복음이 유사한 것은 여인이 기름을 예수의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았다는 점이다(루가 7, 38; 요한 12, 3).49)머리와 발에 기름을 부은 차이는 그리 중요한 의미가 없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그녀가 눈물로 예수의 발을 씻었다는 말은 없다.

루가와 마르코와 상통하는 점들이 요한복음에 있는 것으로 보아 요한은 이 두 복음을 자료로 사용했음을 엿볼 수 있다.50)C. K. Barrett,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SPCK, 1978, p. 409/ 한국신학연구소 번역실, 『요한복음 I』, [국제성서주석 32, 1], 한국신학연구소, 1985, 198면 이하. 그런데 요한이 이를 예수의 수난사와 결부시킨 점은 같으나 그 구체적 계기는 죽은 라자로를 살려 일으킨 것이며(요한 12, 1), 이에 따라 그 현장도 라자로의 형제인 마리아와 마르타의 집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익명의 여인의 이름을 밝힌 것은 요한복음뿐이다(요한 12, 3).

이렇게 보면 이 이야기는 예수의 민중들의 뇌리에 박인 사건으로 약간씩 변화를 일으키면서 전승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요한을 제외하면 그렇게 중요하게 취급되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의 이름을 모두가 감추었다는 것이 이상하다. 요한도 죽은 라자로를 살려 일으켰다는 것을 수난의 계기로 보았기 때문에 마리아를 거명하는 것이지 그 이름 자체를 밝히려는 데 목적을 둔 인상은 아니다. 서방 교회는 루가의 것과 다른 복음서의 이야기를 같은 이야기로 보고 그 마리아는 죄인이었다고 해석해 왔는데, 동방 교회는 그 둘은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 보아왔다.51)이에 대해서는 J. Gnilka, Mk, II, S. 227ff./ 한역본 300면 이하 참조. 그러나 이 두 이야기는 같은 원천을 가졌다는 입장이 옳은 것으로 보인다.52)Wellhausen, Das Evangelium Lucae, Berlin, 1904, S. 31f; R. Bultmann, Die Geschichte der synoptischen Tradition, S. 19f/ 한역본 22면. 루가가 맥락을 바꾸어서, 그가 즐겨 주제로 삼는 회개한 죄인의 반열에 이 여인의 이야기를 포함시켰기 때문에53)U. Wilkens, "Vergebung für die Sünderin"(Lk 7, 36~50), in : "Hoffmann(hrsg.)", Orientierung an Jesus, Freiburg, 1973, S. 400ff. 달라진 것이지 그것을 제외하고 보면 내용상 별로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전제에서 예수와 여인의 관계의 대표적인 경우로서 이 이야기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해보기로 한다.

첫째로 수난사의 서장을 장식하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여인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거기에 합석한 남자들은 "그 때 "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다. 세 복음서에서 남자들은 오히려 일상적인 입장에서 그 여인의 낭비성을 비판한다(요한은 가리옷 사람 유다로 국한시킨다). 확실히 그 여인의 행위는 비정상적인 행위이다. 그것은 그 여자만이 비상한 때를 알고 비상한 행위를 감행했다는 뜻이 된다. 둘째로 이 여인은 그림자처럼 나타나 행동하며 비판의 소리에도 아무 반응이 없다. 이것은 당시의 사회적 관습에 의한 여인의 일반적 자세를 나타내는 것일까? 그것을 그 여인의 행동에 대한 예수의 인식과 관련시켜 보면 후자의 경우임에 틀림없다. 이 여인은 예수의 죽음당함을 기정사실로 알고 있다. 아니,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래야만 한다는 결론을 안고 행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수난예고를 들은 예수의 남성 제자들의 경우와 비교해보면 놀라운 대조를 보인다. 예수는 예루살렘 도상에서 필립보의 가이사리아에 이르렀을 때 처음으로 수난예고를 한다(마르 8, 278, 31~32). 그것은 베드로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이후이다(마르 8, 29). 그런데 예수가 수난을 당할 것이라는 말에 베드로는 "예수를 따로 모시고 간했다"(마르 8, 32)고 한다.54)마태오는 베드로의 고백에 대한 예수의 큰 칭찬을 삽입한 다음에 "간했다"는 말을 쓰면서까지 "주님, 안 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라는 베드로의 주장을 쓰고 있는데(마태 16, 22), 루가는 이를 삭제함과 동시에 예수의 책망도 삭제했다. 그것은 예수의 선언을 철회하라는 것이며, 그 길을 거부한다는 말이었음에 틀림없다. 그에게 그리스도 고백과 예수의 수난은 상부(相符)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저들은 누가 높으냐를 두고 싸운 자들이다)에서나 아니면 예수를 향한 애정의 표시로 그랬을 수 있다. 이에 대해서 예수는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마르 8, 33)고 저주에 가까운 가장 준엄한 책망을 한다. 이것이 표면에 나타나는 제자들의 모습이다.

이에 대해서 이름없고 말없는 이 여인의 행동은 어느 누구보다도 예수가 가야 할 길을 정확히 인식한 것이며, 그 인식을 행동으로 나타낸 것이다. 바로 그것을 예수는 감지한다. 베드로는 사랑하는 스승을 잃어버리는 데 대해서 항의했는데, 왜 이 여인은 그와 반대로 그의 죽음의 길을 기정사실로 단정하는 이런 행위를 했을까? 베드로는 수제자였으면서도 스승이 갈 길을 몰랐는데, 어떻게 이 여인은 예수의 길을 그렇게 정확히 통찰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의 사랑이 그녀의 눈을 뜨게 한 것이 아니었겠는가!(후론) 그러나 이 여인은 결코 그 사랑에 침몰되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를 잃는다는 아픔을 넘어서는 강인함을 행동으로 시위하고 있다. 예수가 이 여인이 한 일이 아름답다는 말은 바로 이러한 내면성을 말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베드로는 하느님의 뜻과 사람의 뜻 중에서 사람의 뜻을 선택했기 때문에 사탄이라고 비판받은 데 대해 이 여인은 사랑(사람의 뜻)과 예수가 가야 할 길(하느님의 뜻) 중에서 사랑의 아픔을 견디면서 예수를 예수 되게 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여인의 행동에 대한 예수의 의식이다. 말없는 여인의 행동을 말없이 읽는 관계, 이것은 남성 제자들과의 관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그런 것이다. 이 여인이 내 장례를 미리 예비했다고 한 예수의 반응은, 예수가 이미 각오하고 있는 바를 미리 알고 행동하는 그 여인을 칭찬하는 것인가, 아니면 아직도 죽음 앞에서 내적으로 고뇌하고 있는 예수를 죽음의 길로 내모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이해한 것인가? 만일 우리의 상상력을 허락한다면 후자의 경우가 맞을 것이다. 게쎄마니 동산에서의 예수의 고뇌는, 그의 심리적 갈등을 묘사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받아들인다면 후자의 상상이 결코 무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게 볼 때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계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이 한 일도 전해져서 이 여인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마르 14, 9)라는 그의 말은 제자리를 찾는다. 이것은 이 여인 외에는 어느 누구도 들어보지 못한 최고의 찬사이다. 여기에서 예수와 여인의 관계는 결코 주객도식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가장 전형적인 동반자적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예수가 그 여인(들)에게 구원의 길에 대한 의식을 강화시킨 반면에 그 여인은 바로 그런 입장에서 예수의 자기인식과 결단을 강화시킨 것이다. 어쩌면 그 길을 피하고 싶은 예수에게 더 이상 도피할 수 없도록 가능성을 완전 봉쇄한 정적 순간이 되었을 수도 있다.

 

막달라 마리아 : 다음으로 예수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또 하나의 전승으로 그 이름이 알려진 막달라 마리아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마르코전승에는 이 여인이 맨 마지막 십자가처형의 현장과 빈 무덤 전승에서만 등장한다(마르 15, 4016, 1 이하). 또 여인들도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중에 막달라 마리아가 가장 먼저 꼽히며, 그는 예수가 갈릴래아에 있을 때부터 그를 따르며 시중들던 여인이라고 한다(마르 15, 40~41). 이 여인은 제자들이 모두 도망해버렸는데도 두려움을 무릅쓰고 다른 여인들과 예수의 운명을 지켜보았으며, 그의 시체를 둔 곳까지 확인한다(마르 15, 47). 그리고 안식일 다음날 여인들 몇과 함께 그의 시체에 바를 향유를 가지고 무덤을 찾아간다(마르 16, 1~2). 죽은 시체라도 섬기겠다는 애절함이 충분히 느껴진다.

이 여인은 누구인가? 본문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여인은 첫째 갈릴래아에서 왔다는 것, 둘째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를 따르며 시중들던 여인 중의 하나였다는 것(이것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제자였음을 말한다), 셋째 예수의 수난의 도상에 동행해서 예루살렘까지 왔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대로 루가의 특수자료에 있는 새로운 사실은 그녀가 일곱 귀신이 들렸다는 것이다.55)마샬은 일곱 귀신이 들렸다는 것은 심한 정신병을 앓았다는 뜻으로 해석한다(I. H. Marshall, 해당부분 참조/ 한역본 422면). 루가복음 11장 26절에서도 보는 바와 같이 일곱이라는 숫자는 최악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대전제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에 의해 치유된 자로 그것이 계기가 되어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루가는 막달라 마리아의 병력을 저 익명의 여인의 경우처럼 수치스러운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바로 그가 예수의 수난과 부활 사건의 중심적 증인으로 부각되는데, 그는 예수에 의해 악마에게서 구출되어 새사람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 같은 엄청난 사건의 증인이 됨으로써 예수의 능력을 과시하려는 목적이 있음을 보인다. 그런데 마르코복음서의 추가문인 16장 9절에서 이 사실이 다시 언급된다. 따라서 이 사실은 널리 유포된 전승으로 보인다. 마르코는 이 사실을 루가에서 그대로 전승했을까? 그런데 놀랍게도 루가와는 달리, 마르코복음에서 이 여인은 홀로 무덤에 가서 처음으로 예수를 만난 사람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예수의 수난사와 빈 무덤 이야기에서 서술하고 있는 이 여인은 모든 여인 중에서 가장 예수를 추앙하고 사랑한 이로 부각되어 있다. 복음서마다 그 두 장면에 나타난 다른 여인들의 이름이 통일되어 있지 않으나 막달라 마리아만은 동일하게 거명될 뿐 아니라 언제나 먼저 꼽힌다. 그리고 요한복음(20, 14~16)과 마르코의 추가부분(16, 9 이하)에서는 부활한 예수의 현시를 처음 그리고 홀로 경험한 이로 부각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요한복음의 서술은 특이하다. 마리아가 새벽 미명에 죽은 예수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빈 무덤에서 울고 있는데 부활한 예수가 홀연히 "마리아야" 하고 부르자 마리아는 "라뽀니"라고 응답한다. 예수가 "나를 만지지 마라"고 한 것은 그 여인이 몸으로 반가움을 나타내려고 했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것은 생시의 예수와 마리아의 관계가 깊었음을 극적으로 묘사하려 한 것이다. 이 여인은 누구일까?

예수에게 기름 부은 익명의 여인은 누구인가? 그가 예수의 운명을 가장 바르게 예견한 여인이었다면 그리고 예수를 가장 사랑한 여인이었다면 이 결정적인 장에 나타나지 않을 수 있을까? 오히려 그 여인은 이 마지막 현장에서도 가장 앞장서야 할 사람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할 때 그 익명의 여인과 막달라 마리아를 별개의 사람으로 단정해버리기는 어렵다. 그렇지 않으면 막달라 마리아는 너무도 갑자기 돌출한데다 그후에도 그녀의 이름이 다시 등장하지 않으므로 그의 정체는 미궁에 빠지기 때문이다.

눈을 돌려 루가에만 전해지는 이야기를 우리의 관심과 관련해서 고찰해보기로 한다. 예수는 마르타라는 자매를 가진 마리아를 방문한다56)루이제 쇼트로프는 이 이름들은 개인들의 이름이 아니라 특정한 역할을 유형화한 이름이라고 한다(L. Schottroff, "Frauen in der Nachfolge Jesu", a.a.O., S. 121f). 그러나 이것이 역사적 사실을 부정할 이유는 못 된다.(루가 10, 38 이하). 그런데 이 이야기도 예루살렘 도상이라는 맥락으로 엮어져 있다. 그러므로 그의 방문의 성격은 일상적인 것이 아니다. 마리아는 예수의 무릎 아래 조용히 앉아 있었다는 그 이상으로 다른 언급이 없다. 그의 자매인 마르타의 항의에서 이 마리아의 행위가 간접적으로 드러날 뿐인데 그것 역시 일상적이 아니다. 이 여인의 행태에 대해 마르타는, 저 익명의 여인의 행태에 대해 제자들이 비판한 것과 같은 비판을 한다. 그러나 바로 저 익명의 여인처럼 이 마리아도 끝까지 그림자처럼 침묵한다. 그 대신 예수가 이 여인을 옹호하여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했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마리아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42절)라는 말로 그녀의 행태에 대해 저 익명의 여인에게 한 것과 유사한 변호를 하고 특수한 의미 부여를 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여인은 저 익명의 여인처럼 남성들이 얻지 못한 특수한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놀리운 것은 이 여인이 요한복음에 나타난 마르타의 자매인 마리아와 상당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마리아는 라자로라는 동생을 잃었다. 그들을 찾아온 예수에게 달려간 것은 마르타였고,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요한 11, 20). 성격적으로 루가에 있는 그 자매들과 상통한다. 마르타를 본 예수는 보이지 않는 마리아를 불렀다(요한 11, 28). 이 말을 듣고 비로소 마리아는 예수에게로 간다. 우는 마리아를 본 예수는 마음에 충격을 받고 안타깝게 여기며 눈물을 흘렸다(요한 11, 23). 요한은 의도적으로 그 깊은 사랑의 관계를 극화한다. 예수는 마침내 죽은 라자로를 살려냈다. 그런데 다른 날 예수가 다시 그 집을 찾아간 것으로 되어 있다(요한 12, 1). 유월절 엿새 전이라는 말로써 바로 그것이 예수의 수난주간 임을 시사한다. 이때에 마르타는 역시 시중드는 일에 분주했는데 마리아는 아무 말 없이 예수에게 향유를 부었다는 이야기로 이어진다(요한 12, 2). 그에 대한 가리옷 사람 유다의 비판에 예수가 마리아를 옹호한 내용이나 마르타의 비판에 대해 그 여인을 옹호한 내용이 또한 유사하다. 요한이 루가의 이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를 잘 알고 새로운 이야기를 엮어내지 않은 이상 그 유사성은 실질적 인물들에 대한 묘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호기심을 풀기 위해서 대답을 기대할 수 없지만 한 가지 질문을 해보자. 마르타가 음식장만에 분주했을 때 예수와 마리아는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적어도 그것은 일상적인 교훈이나 이야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요한의 이야기와 연결시켜서 이 여인이 예수의 죽음을 예지하고 그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 기름을 부은 그 여인이었다면, 그 대화의 내용은 최후의 결단과 관련이 있는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또 한편 만일 우리가 게쎄마니 동산에서 고무하는 예수의 고뇌를 이 장면과 연결시킨다면,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나눈 대화는 어떤 것이었을까?

예수는 기름 부은 익명의 여인의 행위를 자신의 장례를 예비하는 것이라 했다(요한 12, 7). 이 말을 그 여인에게 적용시키면, "당신은 죽어야 합니다"라는 뜻을 행동으로 나타낸 것이 바로 기름 부음의 행위가 된다. 요한에게서처럼 그가 바로 이 마리아라면 예수가 한 말은 그의 고뇌를 토로한 것일 수 있으며, 만일 이에 대해서 그 여인이 끝끝내 침묵했다면 그것은 "당신의 길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라는 엄숙한 대답 이상 다른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상에서 계속 "만일"이라는 말을 전제하면서 여러 각도로 상상해왔지만 처음부터 구체적인 대답을 전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에서 얻어내려는 결론은 죽음에 대한 예수의 결단이 영웅주의에서 말하듯 홀로의 결단이 아니라 민중의 염원, 그중에서도 그를 둘러싼 여인들, 그중에서도 어느 특수한 여인의 통찰에 의한 기대와 결단에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것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기름 부은 익명의 여인, 베다니아의 마리아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는 한 여인이거나 아니면 예수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한 여인 군(群)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이름일 수도 있다.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여인들이 자신의 행위를 표면에 내세울 수 없었다는 데서 이와 같은 혼선이 가능하다.

그런데 왜 여인들이 예수의 결단에 절정적인 역할을 했을까? 그들의 특유한 위치, 즉 자신들의 억압에 의한 한을 풀려는 염원과 기대가 예수에게 종교적 차원으로까지 승화되었을 수도 있다. 또한 예수에 대한 그들의 기대와 존경에는 성(性)이 작용했을 수 있다.57)Elisabeth Moltmann-Wendel, Ein eigener Mensch werden. Frauen um Jesus, Gütersroh, 1980/ 김희은 역, 『예수 주변의 여인들』, 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벤델은 특히 요한복음의 빈 무덤 설화 가운데 부활한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만남을 논하면서 "막달라 마리아는 구원을 육체적인 것으로 체험했다. 그녀는 예수를 개인적으로 사랑했다"(한역본 97면)고 한다. 또 그녀는 예수를 육체적으로 만지려 했는데, 예수는 거부했다. 그것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성숙한 존재가 되라"는 요구요 방향전환의 요청이었다고 해석한다. 벤델은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말을 인용하여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깊은 관계를 나타내며, Paul Heyse, Heinrich Böll 등의 글을 동원하여 교회의 전통인 성의 경원시로 인해 진실이 은폐되었다고 한다(한역본 118면 이하). 그러나 예수가 해야 할 일, 가야 할 길을 주시함으로써 죽음으로 나누어질 아픔도 초극하는 결단을 내리게 한 것은 투철한 민중의식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여인은 민중 중의 민중이다. 이중 삼중의 억압과 착취 밑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국가적 차원에서는 제도와 법적 질서에서 배제되었고, 가정에서는 가부장제도 밑에 혹사당하며,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생식기능을 담당하는 도구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러한 한을 풀 수 있는 어떤 수단도 갖고 있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편에 서 주는 이도 없었다. 종교마저도 저들을 소외시켰다. 가장 종교적이면서도 종교에서 가장 소외된 것이 여성이라는 말 그대로가 바로 저들의 현실이다. 저들의 유일한 희망은 군림하는 철권의 메시아가 아니라 저들 편에 서 주는 이, 그것이 바로 그들의 메시아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무조건 여인들 편에 서되(제자라는 '이름'을 내세우며) 저들 사이를 차단하는 남성들의 포위망까지 헤치면서 그들과 합류하려는 예수에게서 여인들은 새 세계를 본 것이다.

그러나 그 새 세계는 직선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고난을 통해 온다. 이 사실을 통찰한 저들은 민중운동에 앞장선 예수가 가야할 피할 수 없는 십자가의 길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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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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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수의 시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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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갈릴래아의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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