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율법해석을 확대 실천하면 기존질서는 모두 붕괴된다. 기존질서는 사유화를 인정하고 보호해주는 것을 중심과제로 하고 있다. 그 사유화의 과정이 어떠했는지 그 결과가 무엇을 초래했는지는 묻지 않고 그것을 보호해주는 것이 국가권력의 존재이유다. 국가권력 자체도 사유화에서 독점화를 위한 도구로 이용된다. 사유화를 확대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동력이 필요하다. 그것을 위해 노예가 필요했던 것이다.
로마제국은 상업으로 부유해진 재산의 보호와 증대를 위해서 약소 민족을 속속 침략하여 전리품을 모으는 동시에 노예를 확보해나갔다.1)이에 관한 요령있는 설명으로는 K. M. Fischer, Das Urichristentum. Kirchengeschichte in Einzeldarstellungen I/1, Berlin, Evangelische Verlagsanstalt, 1985, S. 24-25. 그래서 자신들의 부를 계속 증가시킬 수 있었다. 그 부의 분배가 정의로운지는 묻지 않은 채 계급체제에 의해서 자동적으로 상위충이 독점하게 되었다. 팔레스틴 역시 이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로마는 오직 부강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팔레스틴을 점령했으며, 아무런 정당성이 없는 기득권을 행사해서 막대한 조공을 바치게 하고,2)로마는 연 600달란트를 팔레스틴에 요구했다(B. Schürer, Geschichte des jüdischen Volkes in Zeitalter Jesu Christi, Bd. I, 1901, S. 473ff., S. 508ff.). 정치적으로는 괴뢰정부를 세우며, 이스라엘의 상류층과 연계하여 이른바 분할통치를 꾀했는데, 그것은 모두 사유권을 조장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예루살렘의 종교귀족들마저도 성전을 독점하고 그것을 근거로 하여 전 국민에 대해 경제적 착취를 권리로써 자행할 수 있었다.3)둘째 마당 '예수의 시대상'을 참조.
이런 현장에서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고 회개를 외쳤다(마르 1, 15). 이 회개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지금까지 서구성서학에서는 그것을 '가던 길을 돌아선다'는 뜻4)바로 이것이 회개를 뜻하는 μετανοια의 문자적 의미이다.이라고 이해하면서 그 결론은 오고 있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자신을 개방하는 일이라고 했으며, 그것을 다른 말로 '믿는 일'이라고 하여 구체적이며 실천적인 행위보다 한 개인의 내적 자세를 말하는데 그쳤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 나라 자체에 대한 해석과 마찬가지로 관념적인 것으로서 예수의 본래 뜻과는 거리가 멀다. 복음서의 내용들은 바로 회개의 구체적 실천내용이라고 보아야 할 만큼 그 의미가 중요하다.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것은 그의 회개의 설교에 동의했음을 의미한다.5)J. Becker, Johannes der Täufer und Jesus von Nazareth, 1972, S. 68. 마태오복음은 주저없이 세례자 요한의 설교와 예수의 설교를 일치시킨다(마태 3, 2ᆞ4, 17). 이 회개는 이른바 '죄인'에게만 요구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에 요청한 것으로 그것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한다.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토라를 지킴으로 구원받는다거나 성전종교의 의무를 다함으로 구원받는다는 유다교의 특권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일이다.6)셋째 마당 '세례자 요한과 예수'를 참조. 예배를 드리거나 율법을 지킴으로 새 사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회개의 구체적 행위는 무엇인가? 세례자 요한의 입을 통해서 그 중요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회개의 설교를 듣고 모인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를 묻는 데 대하여 세례자 요한은 "속옷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과 나누어 가지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라"(루가 3, 11)고 지시한다.7)세례자 요한의 지시는 구약에서 볼 수 있듯이(예컨대 삼상 10, 2), 자기 영역을 넘지 않은 것이었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I. H. Marshall, a.a.O., 해당부분 참조/ 한역본 179면). 그러나 11절에서 세례자 요한의 지시가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을 전제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위에서 예수가 말했던 하느님 나라의 내용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관련시켜볼 때 이것은 회개의 실천방향을 제시하는 것을 넘어서 기존사회의 불의를 파헤치려는 근본적인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있는 자는 없는 자에게 나누어주라고 명령하는 것은 자선의 문제를 넘어서 기득권에 대한 부정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그런데 예수는 다른 차원에서 회개의 길을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