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탈가족적'이라는 것을 구조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탈가족적 생활양식은 예수로부터 발단된 것이 아니다. 예수 당시의 에쎄네파, 세례자 요한파 등도 그러했다. 그러한 생활양식을 종교적 동기에서 찾는 것은 툴리지 않는다. 종교적인 금욕주의 전통에 종말 사상이 가미된 것으로 보면 된다.13)에쎄네파는 스스로를 '종말론적 구원공동체'로 이해했다. 그런데 헹겔은 이 공동체의 형태가 종교적 사법체의 전형적 특징들을 갖고 있었다고 하며, 그것은 헬레니즘시대의 전형적인 현상이라고 분석한다. 여기서는 성인들의 가족적 유대같은 것은 해체되었다(M. Hengel, Judentum und Hellenismus, S. 404, 446). 그런데 그런 시각에서 결론을 내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또한 기존체제에서의 탈출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당시의 가족제도는 가부장제도이다. 그것은 부권 위주의 사회단위로 그 권위는 절대적이다. 그런데 그것은 결코 일부일처제에서 보는 것과 같이 성이 중심에 있지 않다. 또한 일부다처가 허용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반드시 성적 향락의 욕구가 그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 수탈을 위한 수단으로 성을 이용한 경우이다. 일부다처제는 남자의 경제능력만큼 허용되었는데 그것은 동시에 그의 사회적 지위에 상응한다.14)여덟째 마당 '예수와 여인'을 참조.
가부장제도는 국가권력구조의 단위이다. 국가에서 군주의 절대주권이 주장되었듯이, 가족 내에서는 가부장의 절대권이 행사된다. 종과 더불어 그 밑의 여인들이나 아이들의 인간적 존엄성 따위는 인정되지 않는다. 예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께 직속되었다고 본다. 그 뜻을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고 계시다"(마태 10, 30)라고 표현한다. 인간은 하느님에게 직속되었다. 그것은 사유화할 수 없는 공적 존재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탈가족은 바로 가족성원을 사유물처럼 아는 가부장제도에 대한 거부행위라고 볼 수 있겠다.
사람들 중에는 사랑의 가부장제도가 초대 그리스도교의 이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15)사회적 관심을 크게 내세우는 서구의 성서학자들은 놀랍게도 예수의 이상이 사랑의 가부장제도에 있었다고 본다(M. Hengel, Eigentum., S. 36f. : G. Theissen, Studien zur Soziologie des Urchristentums, Tübingen, 1983, S. 102, 288). 그러나 이것은 적어도 예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가족적 윤리를 거부하라고 권유한다(마르 3, 33~34; 루가 9, 39 이하 : 마태 8, 21 이하). 이것은 결코 상대화해 버리거나 간과해도 좋은 내용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예수는 물론이요 그의 제자들의 행태에서도 뚜렷이 반영된다. 우리는 그를 따랐던 자들의 가족관계를 거의 모른다. 만일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그의 제자들 모두가 독신자로 보일 정도로 그들과 가족의 관계가 일체 언급되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의 제자들의 자식이나 아내 또는 남편이 등장하는 구체적인 경우를 알지 못한다.
이러한 여러 사례에서 짐작되는 예수의 가족관은 다음 말로 구체화된다. "부활 때에는 장가가는 일도 없고 시집가는 일도 없다"(마르 12, 25/ 병행). 이것은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가이파의 교리적 질문에 대한 답변인데 궁극적으로는 가정의 중심인 부부관계는 그 자리가 없다는 언명이다. 이상은 모두 사유화의 근거를 파괴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사유화는 물질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권력도 '공'이지 사유화의 대상일 수 없다.
팔레스틴 땅은 역사적으로 그 소유권을 주장하는 세력이 계속 바뀌어왔다. 바빌론, 에집트, 희랍, 로마 등등의 외세들이 침범해서 주권행사를 해 왔는데, 예수 당시에는 로마가 그 땅의 주인행세를 했으나 그들의 식민정책에 의해서 주권행사가 최소한 세 갈래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것은 공납의 대상이 셋이었기 때문이다. 로마제국 자체, 헤로데 왕가, 예루살렘 세력인 산헤드린과 성전이 그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내부적으로 더 복잡하게 분화되어갔다. 위에서 이미 서술한 대로 이른바 헤로데 대왕시대에는 헤로데 왕가가 팔레스틴 전체에 대한 청부적 권력행사를 해왔으나 그의 유언에 의해서 팔레스틴이 그의 아들 셋에게 분할됨으로써 나누어졌다.16)Bo Reicke, a.a.O., S. 84f./ 한역본 126면. 이하.
그 중에서도 특히 갈릴래아 지방은 오랫동안 이스라엘 주권에서 완전히 잘려나가 이방 세력에게 예속되는 역사가 600년이나 계속된 땅이다.17)넷째 마당 '갈릴래아로'를 참조. 그러는 동안 갈릴래아는 종족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많은 이방인들과 공존하므로 유다 지방 사람들은 이 지방과 그 사람들을 멸시하여 이방인의 땅 갈릴래아인이라고 불렀다. 아켈라오스가 지배하는 영역도 종교적으로 나뉘어 서로 반목, 질시하는 상태였다. 이렇게 보면 팔레스틴은 비록 로마의 통치권 아래 있었으나 내부적으로는 국경 아닌 국경이 많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은 10년 만에 아켈라오스 대신 로마총독이 직접 관할하는 지역이 되었다.18)Bo Reicke, a.a.O., S. 99f./한역본 148면 이하.
땅은 하느님의 것(公)인데 그 소유(사유)권 쟁탈을 위한 전쟁이 계속되고 그로 인해 불의가 자행되며, 사실상의 주인인 현주민은 가혹한 착취의 대상이 되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유린당했다. 땅의 소유권을 둘러싼 싸움은 바로 권력싸움이었다. 그런데 이 같은 판국에 예수는 로마나 헤로데 일당과 정면 대결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저들을 거의 묵살해 버리는 자세였다. 왜 그랬을까? 땅의 주인이 계속 바뀐 역사가 가르쳐온 것처럼 저들이 그 땅의 주인이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일까? 이 문제는 앞으로 계속 논의하게 될 것이지만 예수의 권력에 대한 인식은 뚜렷하다. 그것은 이미 언급한 마르코복음 10장 42절에서 볼 수 있다. 그것을 직역하면 다음과같다. "민족들을 지배한다고 생각하는 자19)새번역은 "이방 사람들의 집권자로 알려진 사람들"로 되어 있다.들은 저들 위에 주인으로 군림하고, 저들 중의 큰 자들은 저들에게 세력을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마르 10, 42~43). 이 구절에서 "생각하는 자들"에서 "생각하는"(δοκέω)은 "……처럼 생각" 또는 "……처럼 인정한다"로 통치자를 상대화하는 표현법이다. 주인으로 민에 군림할 수 없는 것들이 자기에게 속하지 않는 권위(έξουσία)를 자기 것인 양 민에게 행사한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 연결해서 "누구든지 크게 되려고 하면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마르 10, 43-44)하고, 누구든지 주인이 되고자 하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바로 권위와 상반된 것으로 섬김을, 주인 됨에 상반된 것으로 종 됨을 내세워 권력구조나 그 체질을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다.
사실상 공의 이름으로 권력을 행사한 사람들은 도둑들이었다. 로마의 황제들은 다분히 살인을 전문으로 하는 군인 출신이었으며, 그 중에는 네로나 도미띠아누스 같은 광인들이 섞여 있었다. 저들은 당시의 도덕적 차원에서도 용인될 수 없는 인물들이었다.20)네로는 그의 어머니가 시아버지를 독살함에 따라 권좌에 올랐는데, 그는 이복동생, 어머니, 누이, 부인까지도 살해했다(H. Dörrie, Art., "Nereus und Achilleus", in : RGG, Bd. N, S. 1402). 도미띠아누스 후기에는 전제군주가 되어 그리스도교를 박해했으며, 그의 백부인 Flarios Clement를 처형하고 그 부인을 추방하는 등 광인적 행위를 했는데(H. Dörrie, RGG, Bd.II, S. 238), 로마황제들 가운데는 이런 자들이 많았다. 국내적으로는 권력투쟁에 잔인했으며, 대외적으로는 무죄한 약소국을 먹어 삼키는 것을 전문으로 한 자들이었다. 팔레스틴에 주둔한 역대의 총독들도 모두가 빌라도의 후예인 듯이 공권력을 사유화하여 짧은 임기 동안 최대의 치부를 하는 데 혈안이 된 자들이었다. 헤로데 가는 더욱 그러했다.21)헤로데 가문에 대해서는 둘째 마당 '예수의 시대상'을 참조. 대왕으로 자처하고 군림한 헤로데는 로마에서 뇌물과 아첨으로 권력투쟁의 자리를 뚫고 들어가 마침내 영토가 없는 왕으로 임명받고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와 동족 아닌 동족과 싸워서 왕좌를 굳혔으며 그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로마권력에 아첨하고 유다교에 아첨하는 야누스적인 얼굴을 가진 자였고, 10만으로 추정되는 사람을 죽이고 자기 아내와, 그 사이에서 난 자식들 그리고 장모까지도 죽여버린 광적인 인간이었다. 아켈라오스는 그의 아비의 유언대로 유다 지방의 왕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로마에 뇌물공세를 계속 펴왔으며, 민중봉기에 대해서는 한꺼번에 3천 명을 죽인 살인마였다. 갈릴래아의 봉건영주 안티파스는 자기 형제 아켈라오스와 경쟁하여 왕권을 쟁취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썼으며, 마침내 민중이 예언자로 받드는 세례자 요한을 살해한 위인이다.
이중 어느 누구도 그 땅의 주인들로 자처할 수 있는 인물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저들은 모두 주인이 아니라 침략자였고, 하느님의 것 즉 공을 빼앗은 도둑들이었다. 예수가 저들을 인정할 까닭이 없었다. 하느님의 나라 선포는 이처럼 잘못된 권력구조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