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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세력

바리사이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미 둘째 마당에서 서술된 내용과 중복될 수 있는 소지를 무릅쓰고 예루살렘의 체제를 분석하는 것이 그 첩경일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유다 사회의 지배체제를 규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예루살렘은 일명 다윗의 도성이라고 일컬어지는 데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다윗에 의해서 만들어진 도시이다. 다윗이 유다 지방을 점령하여 그 왕이 되고(삼하 2, 4) 뒤이어 이스라엘 국을 합병할 때(삼하 5, 3) 그 분계선에 위치한 여부스족의 성을 빼앗아 자신의 사영지(私領地)로 만들어(삼하 5, 7~9) 웅대한 궁전을 세우고, 이스라엘의 해방의 신을 상징하는 법궤를 예루살렘에 안치한 것은 자신의 군주체제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이 바로 솔로몬대에 이르러 세워진 예루살렘 성전의 거점이 된 것이다(열왕상 8, 1~13). 이른바 준아시아적 생산양식의 사회인 팔레스틴 농민들은 왕에게 생산물을 공납했다.14)아시아적 생산양식은 농업경영에 필수적인 거대한 관개사업을 국가가 수행한 데서 비롯되었다. 거대한 관개사업을 위해서는 방대한 노동력이 필요했고, 이 노동력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필수적이었다. 노예노동은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필수부문이었다. 준아시아적 생산양식은 거대한 관개사업이 발달되지 않은 지역의 생산양식이다. 팔레스틴이 대표적인 예이다. 팔레스틴에 전제왕권이 수립된 이후 왕권의 유지, 특히 관료제도와 상비군의 유지가 불가피했다. 관료와 군인들은 왕으로부터 봉토를 분배받았고, 여기서 대토지소유제도로 발전하는 맹아가 싹렀다. 생산농민들로부터 공납을 징수하는 것은 전제국가의 재정을 위해 필수불가결했다(삼상 8, 10~18; Marlene Fendler, a.a.O., S. 34f를 참조). 그런데 이 이스라엘이 외세에 점령됨으로써 정권도 없어졌으며, 성전은 다른 신에 의해서 점유 되었는데, 마카베오 독립투쟁에 의해서 비록 완전한 주권은 아니었으나 이스라엘의 독립을 회복하고, 그와 동시에 예루살렘 성전이 야훼를 모시는 신전으로 정화되었다.15)Bo Reicke, a.a.O., S. 47/ 한역본 75면. 주전 162년 종교적 자유의 회복, 주전 152년 요나단의 대사제 즉위, 주전 142년 세금면제권 획득. 팔레스틴에 제한된 주권의 사제국가가 형성된 것은 매 10년마다 이루어진 이와 같은 조치들로 인해 가능했다. 이 독립전쟁의 완수와 예루살렘 성전의 정화에 결정적 역할을 한 집단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하시딤이다.16)"그러자 일부 하시딤 사람들이 모여와서 그들과 합세했다. 그들은 용감한 사람들이었고 모두 경건하게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었다"(마카상 2, 42). 하시딤에 관해서는 W. Förster, a.a.O., S. 62ff.; M. Hengel, Judentum und Hellenismus, S. 320~323, 327~330을 참조. 시리아세력 밑에서 부정해진 예루살렘을 떠나 광야에서 살던 신앙의 동지 하시딤은 숙원이던 예루살렘 탈환에 성공함으로써 다시 성전 중심의 생활을 할 수 있었으나 하스몬왕조로 변신한 마카베오 가(家)의 타락으로 또다시 성전종교가 부패하여 권력과 야합 하자 다시 예루살렘을 탈출했다.17)Bo Reicke, a.a.O., S. 51/ 한역본 80면. 그런데 하시딤 이래로 반예루살렘파의 대부분이 분노한 주된 이유는 외세의 지원에 의해서 성전종교체제가 구축되는 반면 성전이 누리는 특권은 유다 민족을 담보로 하는 결과를 초래한 점이다. 위에서 서술한 대로 대사제직은 정치적 권력을 상실한 후기 하스몬 왕가 때부터 매매의 대상이 되었고,18)대사제직 매매는 그 이전까지 소급된다. 이미 토비아드 가문의 메넬라우스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로부터 대사제직을 사서 유다인들을 통치하였다. 하스몬왕가시대의 대사제직 매매에 대해서는 마카하 4, 7~104, 244, 32를 참조. 헤로데시대에 대사제직이 정권에 완전히 예속된 이래 대사제직의 획득을 둘러싼 경쟁과 매수는 극에 달했다(b. Joma I, 38. 43). 따라서 그 임명권이 외세에 이양되었으며, 그 상징으로 대사제복의 보관권도 외세의 손에 넘어갔다.19)Jos., Ant., 18, 4, 3; 20, 1, 1~2. 주전 7년~주후 37년까지 대사제복은 로마의 수중에 있었다. 대사제복은 안토니아 요새의 수비대가 보관하고 있다가 축제일에만 내주었다. 주후 45년 클라우디오 황제의 칙령에 의해 대사제복은 유다인들에게 완전히 반환되었다. 이 같은 굴욕 속에서도 대사제를 정점으로 하는 성전종교는 엄청난 권력을 국민에게 행사했다.

대사제는 두 가지 기구를 장악했다. 하나는 이른바 산헤드린으로서 유다인을 대표하는 최고의결기관이다. 로마정부는 산헤드린에 보내는 서한에서 그것을 가리켜 '정부' '원로원' 또는 '예루살렘 시민' 등의 명칭을 붙였다.20)Jos., Ant., 20, 11. 산헤드린은 70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 구성원은 사제계층, 장로, 서기관 등이었다.21)J. Jeremias, Jerusalem., S. 252/ 한역본 287면. 이 기구는 행정권과 사법권을 행사했다.22)Bo Reicke, a.a.O., S. 107 / 한역본 159면. 저들에게는 국민을 다스리기 위해 최소한 매질할 권리와 투옥할 권리가 주어졌다. 사형권은 원칙적으로 부여되어 있지 않았지만 로마총독 동의하에서는 이것도 가능했다.23)클라우스너는 산헤드린이 사형을 선고한 한 예를 든다(J. Klausner, a.a.O., s. 177). 헤로데시대에는 산헤드린이 완전히 종속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아무 실권도 없었다(a.a.O., S. 201). 빌라도가 예수를 처형할 때 산헤드린의 사형권은 전혀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빌라도가 산헤드린에 사전 양해를 구했을 가능성은 있다(a.a.O., S. 461f.). 그리고 이들에게는 성전체제를 위한 세금징수를 결정할 권한이 주어졌다.

대사제가 장악하고 있었던 또 하나의 기구는 물론 성전이다. 성전 운영은 대사제를 정점으로 하는 10명 내외의 제사장으로 구성된 상임집행부에 의해 집행되었는데,24)대사제회의의 구성원들에 대해서는 Bo Reicke, a.a.O., S. 109/ 한역본 162면; J. Jeremias, Jerusalem., S. 181~204/ 한역본 212~236면을 참조. 그 권한은 단순히 종교영역에 국한되지 않는 막대한 것이었다. 그중에 특기할 것은 경제발동권이었다. 이스라엘인은 유다 지방은 물론 세계 어느 지역에 있든지 그 소득의 10분의 1을 공납할 의무를 가졌다.25)Bo Reicke, a.a.O., S. 125/ 한역본 182면. 그리고 1년에 몇 차례 시행하는 거대한 종교행사가 있었는데 이때마다 국내외의 유다인을 동원할 권한을 갖고 있었다. 1년에 다섯 번 있던 대축제 때 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다인까지도 예루살렘으로 모이게 했다. 이런 축제는 성전의 이데올로기화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에만 야훼 하느님이 현존한다는 도그마였다. 그러므로 야훼 하느님 신앙을 빼고는 이스라엘민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저들은 최소한 1년에 한 번씩이라도 야훼를 배알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와야 했다.26)예레미아스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과 완전개종자는 과월절과 추수철과 초막절에 반드시 참여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으나, 디아스포라의 유다인들에게는 과월철 축제에만 참여하도록 완화조치가 취해졌다고 한다(J. Jeremias, Jerusalem, S. 88/ 한역본 110면). 그때마다 이스라엘민은 모든 재산을 털어 예루살렘 순례의 길에 나서야 했다. 저들은 속죄의 제물로 짐승을 사서 바쳐야 했는데 그 짐승은 정결한 것이어야 한다는 단서를 붙임으로써 성전 당국이 전매권을 점유했다.27)J. Jeremias, a.a.O., S. 114/ 한역본 139면. 왜냐하면 그 순결성은 사제계급이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저들이 지니고 온 돈도 외국화폐일 경우 부정한 것이라 하여 예루살렘에서 통용되는 화폐로 바꾸도록 제도화하였다.28)Bo Reicke, a.a.O., S. 125 / 한역본 182면. 그러므로 성전이 은행의 역할까지 겸한 것이다. 차후에도 이 성전의 운영내용에 대해 언급하겠으나 예루살렘 성전제도는 세계에서 그 유례가 없을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하스몬왕가는 신흥제국 로마에 의해 주전 63년에 사실상 로마의 속국이 되어 국권은 다시 상실되었다. 로마는 노예들의 노동력에 의해 번영한 나라였는데 그 노예는 저들이 점령한 지역의 민중들로 충당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민은 예외로 취급되었다. 저들은 이스라엘민은 노예로 징용하지 않았다.29)Bo Reicke, a.a.O., S. 105/ 한역본 155면. 그것은 성전 중심의 이스라엘 종교의 특유성을 인식했다는 점과 저들의 직접통치를 대리하기 위해서 양성한 헤로데의 정책이 주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로마는 팔레스틴을 군사와 상업의 유통지로 활용했으며, 연 600달란트라는 세금 외에 많은 경제적 포탈을 감행하는 대신 유다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했다. 그것은 하스몬왕가의 지배권을 뺏는 대신 대사제직을 유다 민족의 최고의결기구인 산헤드린의 장으로 인정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 같은 와중에 하시딤에 정신적 기원을 가진 예루살렘 잔류파인 바리사이파가 율법을 이데올로기화하여 국민운동을 전개했다. 바리사이파는 초기에는 국민의 편에 선 대중적 운동을 전개했으나 살로메 알렉산드라 여왕(주전 76~67년 재위) 때에 그들의 정책이 수용된 이후부터 유다교 이데올로기화의 중심에 서게 되었으며,30)Bo Reicke, a.a.O., S. 120/ 한역본 175면. 이때 바리사이파는 산헤드린에 진출하도록 허락받았다. 로마시대에 와서도 초기에는 약간의 충돌이 있었으나 결국 저들에게도 그 실세가 인정되어 대사제가 이끄는 산헤드린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성전 중심의 유다교 확립에도 주역이 되었다.31)J. Jeremias, Jerusalem., S. 268ff./한역본 304면 이하. 유다교의 중심지를 예루살렘으로 볼 때 저들은 예루살렘파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다교가 이러한 형태로 존속하게 되었다는 것은 점령세력과의 유착을 의미한다. 다윗왕조 이래로 정권과 유착되어왔는데, 외세가 침공해올 때마다 예루살렘파는 그것과 유착하는 것이 상습화되었다. 이러한 체질이 로마시대에 와서 극에 이르렀다. 예루살렘파는 자기 민족의 운명을 희생하는 대가로 예루살렘의 특권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바리사이파에 대해서 이와 다른 견해가 있으나 우리는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이 같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하나는 비판세력으로 알려진 바리사이파가 사제계층을 비판하거나 그들과 충돌한 일이 없었으며 오히려 그들과 깊은 유대관계를 맺었을 뿐만 아니라(마르 7, 1), 사제에게만 국한되었던 율법 적용의 범위를 국민생활 전반에 확대시킴으로써 사제종교를 강화했다는 사실,32)J. Jeremias, a.a.O., S. 292/ 한역본 329면. 그리고 또 하나는 저들이 로마제국과 대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사람들 중에는 젤롯당을 지휘한 사람 중에 바리사이파에 속했던 사람들이 가담했다는 사실33)Bo. Reicke, a.a.O., S. 120/ 한역본 175면 이하.로 바리사이파 자체가 반로마적이었다고 보나 그것은 예외적인 현상일 뿐이다. 저들의 대로마 자세는 유다 전쟁 당시에 잘 드러났다. 바리사이파가 중심이 된 율법학자 일군(一群)이 로마의 양해 아래 얌니아 지역에서 율법학교를 계속하였다는 것이 그 사실을 입증한다.34)경전 편수작업에만 전념한다는 조건으로 얌니아에 율법학교를 건립하도록 공적인 허가를 받았다(W. Förster, a.a.O., S. 84/ 한역본 165면). 저들이 특히 예루살렘 함락 이후에 국권 없는 이스라엘민에게 큰 영향을 미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경쟁의 대상이 된 것은 사실이나, 예수 당시의 바리사이파를 예루살렘 성전종교와 유리시켜 볼 근거는 전혀 없다.

바리사이파가 주동이 되어 형성된 유다교는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 생활 전반을 지배하는 체제이다. 이 체제를 절대화하기 위해 저들은 모세의 글과 토라의 권위를 절대적인 것으로 떠받들었다. 그러나 토라만으로는 생활 전체를 규제하는 체제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토라 해석의 전통―이것은 현대적으로 말하면 판례법적인 효력을 가졌다―중에 문서화된 것은 물론 문서화되지 않은 구전전승까지 망라해 구성했다. 그것을 집대성한 것이 2세기말에 완성된 『미슈나』다. '미슈나'는 '반복한다' '전승된 것을 배운다'라는 히브리어 시니쉬(snh)에서 온 말이다. 그것은 생활 전반을 총망라한 시행령과 금령으로 되어 있다. 그중에 우리와 관련된 안식일법을 보자.

먼저 주목할 것은 안식일법이 제사종교 특징의 하나인 축제 편에 속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정결법과 유리되어 있지 않다. 먹고 마시는 일, 몸을 단정히 하는 일, 심지어 보행에 관한 일까지도 규정되어 있다. 가령 '안식일에는 2천 보 이상 걸어서도 안 된다' '병을 고쳐서도 안 된다'는 규정 중에는 어린아이의 병도 고쳐서도 안 되며 부러진 팔다리를 펴는 것도 금지되어 있다.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심지어 두 글자 이상 쓰거나, 또 글자를 고쳐 다시 쓰기 위해 지워서도 안 된다. 물건을 옮기거나 운반해도 안 된다. 한 컵의 술, 행상용 바구니, 곡물을 옮겨서도 안 된다. 낙타 몰이나 배꾼이 큰 줄로 고를 맬 수도 풀 수도 없다. 금요일 저녁 해가 지면 곧 안식일이 시작된다. 안식일이 시작되기 직전 짐을 싣고 마당에 도착해도 해가 지면 그 짐을 내려서는 안 된다. 더욱 해괴한 것은 안식일에 집 밖에 있는 가난한 사람이 집 안에 있는 주인의 손에다 무엇을 놓거나 그 손에서 어떤 것을 가져가도 안 된다는 점이다. 이럴 경우 그 책임은 가난한 자에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즉 안식일엔 구걸할 수도 없고 이로써 구제하지 않아도 되는 충분한 구실이 된다.

이상에서 보면 글 쓰는 것을 뺀 모든 것이 농부들을 위시한 하류층의 민중에게 관계된 규정이다. 까닭은 모두가 노동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안식일의 본래정신은 가난한 자를 쉬게 하려는 것이었는 데 체제화됨으로써 가난한 자를 억누르는 법망이 되어버렸다.

또 한 예로 정결법을 보자. 이미 위에서 언급한 대로 정결법은 성전종교의 핵심인 의례와 직결된 것이다. 이 규정에는 정결, 부정에 대해 상세히 다루고 있다. 가령 음식 그릇을 씻는 일을 비롯해서의 복, 몸에 대해 어떻게 정결하게 해야 하는가하는 방법을 세밀히 규정하고 있다. 이 정결법은 안식일법과 마찬가지로 특히 노동계층은 거의 지키기 불가능한 법망이 되어버렸다. 또 『미슈나』에는 가령 첫 편의 농사에 관한 규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십일조를 바쳐야 한다는 것 이외에 사제계급인 레위족속에게 바치는 방법, 예루살렘 축제 때에 제물을 바치는 방법, 처음 수확한 곡식과일짐승을 바치는 방법을 세밀히 규정하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규정을 범했을 경우에 그 속죄행위로서 제물을 어떻게 바쳐야 하는가까지 규정되어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바리사이체제는 다음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였다. ① 점령세력에게 바치는 것 외에 나라에 바치던 공납제도를 바꾸어 성전에 바치도록 했다.35)Bo Reicke, a.a.O., S. 122, 124/ 한역본 178면 이하. 181면 이하. ② 이 제도를 존속시키기 위해 언제나 점령 세력과 타협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36)성전의 수장인 대사제의 임면권이 왕이나 로마관리에게 주어져 있었음을 상기하라. 또한 성전체제의 중심세력인 사제귀족들이 지주계층이었다는 점도 타협을 용이하게 했을 것이다(H. Kreissig, Die sozialen Zusammenhänge, Bd. II, S. 99). ③ 민족을 분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37)J. Jeremias, a.a.O., S. 294, 302f./ 한역본 319면 이하, 331면. 이 체제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의인이며, 못 지키는 자는 죄인으로 소외계층이 되었다. 소외계층은 가난이나 병 또는 그런 것을 지킬 수 없는 천직자들이다. 그러므로 계층사회를 심화시켰다. ④ 가장 근본적인 것은 율법의 본래정신을 변질시켜 성전 중심의 착취체제를 정당화한 점이다. 이러한 체제가 민족 사회를 얼마나 비인간화하는가가 열거한 논쟁이야기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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