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 배가 고파서 밀이삭을 자르는 예수의 일행을 보았을 때(마르 2, 23) 바로 그 배고픈 자에 대한 문제의식, 즉 배고픔에 대한 인식이 선행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이 체제주의자들은 오직 안식일법을 지키느냐 범하느냐에만 관심을 갖고 있다(24절). 손이 오그라진 사람을 보았을 때(마르 3, 1) 그 사람에 대한 측은한 마음과 그가 정상인이 되기를 희구하는 마음이 본래적인 인간상일 것이며, 그러한 마음이 선을 행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그것이 선행인지 악행인지에 대한 판단기준을 잃고 오직 체제옹호에만 혈안이 된다(2절). 정결법도 그렇다. 예수의 일행이 정결법을 깨고 식사를 했다(마르 7, 2). 배고픈 사람에게 어떻게 이 정결법의 엄수가 가능할 것인가? 그러나 저들에게는 저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어야 하는 그 사정에는 아무 관심도 없고 오직 정결법 위반에 대해서 고발한다(5절). 이러한 저들의 행태에 대한 예수의 공격은 모든 체제를 뿌리에서부터 흔드는 근본적인 것이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지 않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 사람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 27).
이 선언은 결코 안식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지배체제나 권력도 그것이 그 자체의 목적이 될 때에는 모두 거부된다. 안식일 제도가 하느님의 이름을 등에 업은 규율임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선언을 했다면 정치제제나 권력을 위시한 어떤 것에도 적용되지 않을 수 없다. 또는 "밖으로부터 들어가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 18)는 선언은 일차적으로 정결법 전체를 상대화하는 것은 물론이고 의식종교화된 성전종교 전반을 깨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이것을 더 확대시키면 강자에 의해 만들어진 온갖 법적, 제의적 질서 전반을 거부하는 것이 된다.
이미 언급한 대로 갈릴래아에서 예수와 민중 사이에 끼여들어 예수를 비난하거나 반대한 자들이 대부분 바리사이파임을 밝히면서 저들을 "예루살렘에서 온"(마르 7, 1)이라는 한정사로 규정하고 있다. 예수가 신랄한 비판과 책망을 한 대상도 바로 이 바리사이파로 되어 있다.
그들은 예복을 입고 다니는 것과 장터에서 인사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한다(마르 12, 28).
이 비판은 내용상 상류계급 전반에 해당될 수 있겠으나 스스로를 '구별한다'(바리사이)고 명명함으로써 엘리트의식을 철저화한 바리사이파에 해당되는 것이다.
화가 있으리라, 너희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소홀히하고 있구나(루가 11, 42).
그들은 무거운 짐을 묶어 남의 어깨에 메게 하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려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경문곽을 크게 하고 옷단을 넓게 한다. 그리고…… 장터에서 인사 받는 것과 사람들이 선생이라 불러 주는 것을 좋아한다(마태 23, 4~7).
이 서술도 바리사이파에게 적중한다. 마침내 예수는 저들을 맹렬히 공격한다.
위선자인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으라!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하느님 나라 문을 닫아놓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사람도 못 들어가게 하고 있다…… 너희는 한 사람의 개종자를 만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닌다. 그러다가 만들면 너희보다 더 악한 게헨나의 자식으로 만들어버린다.
맹인이면서 남을 인도하는 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으라. 너희는 '누구든지 성전을 두고 맹세하면 아무래도 좋으나 성전의 금을 두고 맹세하면 맹세대로 해야 한다'고 말하니,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어느것이 더 중하냐?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또 너희는 '누구든지 제단을 두고 맹세하면 아무래도 좋으나 그 제단 위의 제물을 두고 맹세하면 맹세대로 해야 한다'고 말하니, 눈먼 자들아! 어느 것이 더 중하냐? 제물이냐? 그 제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마태 23, 13 이하).
해석자들 중에는 이 비판이나 공격이 예루살렘 함락 이후에 바리사이파를 겨냥한 초대 그리스도교의 소산이라고 보는 이들도38)J. Gnilka, Mk, I, S. 109/ 한역본 137면; W. Schmithals, Mk, I, S. 166f.; E. Schweitzer, Mt, S. 280/ 한역본 435면. 특히 슈바이처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70년 이후에 나은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한다. 있으나, 이에 동의할 수 없다. 그것은 이미 위에서 언급한 대로 바리사이파에게 적중하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성전이 이미 완전히 파괴된 이후에 이 같은 내용으로 저들을 비판했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 비판에서 핵심적인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섬김을 받으려는 저들의 교만이요, 또 하나는―이것이 중요한데―본질적인 것과 바본질적인 것을 구별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바리사이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늙어버린 유다교 전반에도 그대로 적중된다. 이러한 예수의 비판은 예수의 대율법관과 맥을 같이한다. 마태오복음서에는 예수를 율법의 완성자요 수호자로 보게 하는 구절이 있다(5, 17~18). 정말 예수가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다 지켜야 한다고 보았을까? 이 같은 말을 예수에게 돌린 마태오는 그 다음에 저 유명한 여섯 가지 반제(Antithese)를 서술하고 있는데(5, 21~48), 그것은 위의 견해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이 반제는 교회의 실천항목으로 발전된 것이 뚜렷하다. 토라에 대한 유다교의 이해에 대해서 예수의 말씀을 내세운 것은 라삐적인 서술방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예수의 대율법 입장이 잘 드러나 있기 때문에 그 성격을 순서대로 해명해보기로 한다(마태 5, 21).
맨 처음은 "살인하지 마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재판을 받아야 한다"(마태 5, 21)이다. 이것은 출애굽기 20장 13절, 신명기 5장 17절 등에 나오는 십계명을 확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형제를 향하여 성을 내는 사람은 누구든지 재판을 받게 되고 형제더러 미련 한 놈이라고 하면 의회에 끌려가게 될 것이다"(22절)라고 말한다. 이것은 살인죄를 철저화해서 살인의 동기에까지 소급한 것이다. 『미슈나』에서는 살인을 죄 없는 자의 목숨을 끊는 것과 피를 흘리는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살인과 성내는 것을 동일시하면 율법의 법성이 무의미해진다. 까닭은 그렇게 되면 재판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둘째, "간음하지 마라"는 십계명에 대해서 예수는 "남의 부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누구든지 마음으로 그 여인과 간음한 것이다"(5, 28)라고 한다. 이것도 십계명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간음이란 구체적으로 남의 부부관계를 파괴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정욕 자체를 그 행위와 동일시하면 역시 율법의 성격을 폐기하는 것이 된다.
셋째,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면 그에게 이혼증서를 써주라"(신명 24, 1)는 말은 신명기법전의 대목으로서 이혼의 권리를 허용해준 것이다. 이혼에 대한 예수의 입장은 마르코 10장 5절 이하에 분명하게 천명되어 있다. "하느님께서는 창세 때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이러므로 사람은 자기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이혼을 허용한 모세의 법을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다.39)물론 이 구절을 이혼문제와 직결시키지 않는 해석도 있다(L. Schottroff, "Frauen in der Nachfolge Jesu.", S. 105).
넷째, "거짓맹세하지 말고 네가 주께 맹세한 것은 다 지키라"(레위 19, 12; 민수 30, 2). 이에 대해서 예수는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한다(마태 5, 34). 해석자 중에는 이것은 율법에 대한 직접적인 반대가 아니고 그것의 철저화라고 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견해는 맹세한 것에 대해서만 성실할 것이 아니고 생활 전반이 성실해야 한다고 해석을 붙일 때 비로소 가능한 견해이다. 그러나 이 점 역시 율법의 법적 질서를 안중에 두지 않는 반론이다. 까닭은 법적 질서를 집행하는 데 맹세나 서약 같은 것이 불가결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출애 21, 24)이다. 이것은 신명기, 레위기 등에도 반복되는 율법질서의 골격을 이루는 중요한 계명이다. 모든 법률은 이 기초 위에 세워졌으며 종교마저도 이것을 근거로 교리를 형성한다. 그런데 예수는 이 계율을 정면으로 거부하여 "너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보복하지 마라"고 하며, 한걸음 더 나아가서 "누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왼편 뺨을 돌려대고 누가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 하거든 겉옷까지 주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주라"(마태 5, 39~41)고 함으로써 저 유명한 계율의 실천적 거부를 권고하고 있다. 여기에서 '누가'라고 된 것은 위와의 관계에서 보면 적대자이다. 가해자에게 보복을 금하고 오히려 선을 행위로 보여주라는 것이다. 이대로 한다면 율법적 질서는 물론이요, 민족적 존립도 위협을 받게된다.
끝으로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에 대해서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한다(마태 5, 44). 이것은 레위기 19장 18절, 즉 "동족에게 앙심을 품어 원수를 갚지 마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아껴라"라는 말과 유사하다. 그런데 구약에는 어디에도 원수를 미워하라고 한 말은 없다. 그러나 구약은 이방인들과의 관계에서 미움을 행동으로 실천했으며, 실제로 그 정당성을 하느님의 뜻으로 뒷받침한다. 그러면 이웃은 바로 유다 민족 자체이고 원수는 이방인이 된다. 그 이방인은 바로 박해하는 이방인이다.40)A. Dihle, Die goldene Regel. Eine Einführung in die Geschichte der antiken und frühchristlichen Vuläarethik, 1962, S. 116. 이렇게 보는 것이 옳다면 이것도 율법에 흐르고 있는 민족주의적 적대성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다.41)안병무, 「율법과 하느님의 뜻」, 『현존』 1969년 8월호, 14면.
이상에서 예수의 대율법 자세를 다음과 같이 성격화할 수 있다. 첫째는 예수는 모세 오경을 법질서로 보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에 의한 처벌이나 재판 등은 안중에 두지 않았다. 둘째, 예수는 율법에 의한 형식주의를 배격하고 있다. 바리사이파에 대한 그의 비판이 바로 이 점에 치중하고 있다. 셋째, 율법 자체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구분하여 본질적인 것을 선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