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는 이미 2세기 중엽부터 그리스도교의 상징으로 사용되어 오다가1)RGG, 제3판, Bd. II, 8. 6. 마침내 정착되었다. 이것은 결코 당연한 귀결은 아니다. 로마제국의 처형대인 십자가틀이 어떻게 한 종교의 상징이 될 수 있었을까. 무엇보다도 콘스탄티누스 대제(313년) 이래로 로마제국의 지배이데올로기 역할을 한 긴 역사를 가진 그리스도교가 이것을 고수해 왔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까닭은 그리스도교가 권좌에서 영광을 향유하는 동안 예수상은 날로 영광의 승리자로 승격되어 갔기 때문이다.2)초기의 예수상에는 수염이 없었는데 점점 그 수염이 길어졌다. 그것은 권력자들에 상응하는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한때는 십자가보다 무덤을 박차고 손에 승리의 깃발을 들고 나오는 승리의 예수상이 그리스도교의 상징처럼 그 중심에 등장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틀이 여전히 그리스도교의 상징으로 관철된 것은 바울로의 주장에서 힘입은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바울로는 역사의 예수에 대해 거의 침묵한 것으로 유명하나 역사적 사건으로 가장 확실한 예수의 죽음만은 절대 중요시했으며, 이 사건 위에 자신의 신학을 정립했다. 그런데 그는 예수의 '죽음'을 말하는 대신 예수의 죽음의 역사적 사건성(정치적으로 '죽음당함')을 가장 잘 나타내는 십자가를 말했다.3)σταυρός(고전 1, 17~18; 갈라 5, 11ᆞ6, 12; 필립 2, 8ᆞ3, 18). 동사형 σταυρόω(고전 1, 23ᆞ2, 2ᆞ2, 8; 고후 13, 4; 로마 6, 6; 갈라 2, 20ᆞ3, 1ᆞ5, 24ᆞ6, 14 등). 그는 자신의 사상의 중심에 십자가 사건을 두고 있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여러분과 함께 지내는 동안 예수그리스도, 특히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입니다"(고전 2, 2). 이것으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마저도, 십자가에 처형되었다는 사건을 통해서 파악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런데 우리를 의아하게 하는 것은 십자가에 처형되었다는 것은 너무도 역사적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 십자가 사건의 역사적 조건 등을 일체 규명하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에게서 예수는 언제 어디서 왜 누구에게 어떻게 십자가에 처형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불문에 부치고 곧 그 의미를 제시할 뿐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라고 하면서도 그말 바로 전에 "십자가의 말씀"(ό λόγος ό τού σταυρού/ 고전 1, 18)이라고 말하고, 그것이 유다인들에게는 거리낌이 되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하느님의 능력이요, 지혜라고 한다(23~24절). 그는 예수의 죽음당함의 의미를 이렇게 표현한다. "그리스도께서 성서에 기록된 대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고전 15, 3) 또는 "자기를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필립 2, 8). 이 둘은 그가 명시한 대로 이미 초대교회 안에서 형성된 신조를 수용한 것이기 때문에 바울로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이러한 입장을 수용해서 철저화한 장본인이다. 왜 십자가라는 구체적 이름을 고수하면서 그것의 역사적 내용에 대해 침묵했을까? 여기에서 바울로의 상황적 고민을 짐작할 수도 있다. 그 유명한 옥중서신(필립비서)에서 왜 그가 투옥되었는지를 일언반구 말하지 않고 사건의 의미4)바울로는 그것을 '복음의 전진'으로 본다.만을 말하고 있음에 놀라는데(필립 1, 12 이하 참조), 이로 미루어 볼 때 로마제국의 정치상황 아래서 그리스도교 선교를 제 일차 목적으로 한 데서 온 그의 한계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어떤 이유에서였든 간에 십자가 사건의 케리그마화는 십자가 사건의 사건성을 은폐함으로써 날로 교리화 일변도로 풀이되었으며, 정치적 현실과 상관없는 상징으로 남아 그리스도교의 비정치화를 정당화하는 구실을 주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것에 대치되는 것이 복음서에 전승된 예수의 수난에 대한 민중의 증언이다.